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7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76화(176/218)
“전하, 다음번에 뵐 때는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좋은 소식을요.”
“허허, 그거야 전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이 늙은이는 전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을 기다리겠습니다.”
모르는 척을 하던 칼리온은 허허 웃는 제 조부의 말에 이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 연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제 동생의 앞에서만은 무표정을 버리는 소대공이 무어라 짓궂은 말을 하고 있는지 에리타의 표정이 애처로웠다.
에리타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을 때, 칼리온은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얘기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역시 눈치챘나.’
소대공의 서늘한 눈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금세 에리타가 고개를 들고 다시금 종알거리기 시작한 덕에 그 살벌한 시선은 곧바로 거두어졌다.
하지만 소대공의 시선이 떨어지자 그보다 더 싸늘한 시선이 제게로 닿았음이 느껴졌다.
‘각오는 했지만…….’
칼리온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살벌한 얼굴이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잠자코 연애 사실을 비밀로 두고 싶지는 않았다.
칼리온의 시선이 여전히 울상인 에리타에게서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본래 위치로 돌아왔다.
“우선 허락을 먼저 구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러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그렇게 대답하는 칼리온의 입꼬리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가 있었다.
발레리아 후작은 애정을 가득 담고 다정하고도 부드럽게 풀어진 손자의 얼굴에 놀란 속내를 애써 다스렸다.
아실라가 죽은 뒤 웃음을 잃어버린 듯하던 손자였는데.
당연하게도 그때의 독기 서린 얼굴보다 지금 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 수십 배는 보기 좋았다.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렇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흐뭇함을 감출 생각도 않는 조부의 말에 칼리온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제 짙은 욕심을 전부 꺼내 들기에는 에리타가 너무 소중했다.
‘내가 그대에게 품은 마음을 전부 내어 보인다면…….’
아마 에리타는 잠시 놀란 얼굴을 하겠지만 이내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받아 줄지도 모른다.
제 연인은 단단하고 강한 이였지만 제 사람이라 정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무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만약 어두운 속내를 들키더라도 제가 울면서 매달린다면 내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마음 따위 볼 수 없는 곳에 숨겨 평생 꺼내지 않을 거지만.’
칼리온은 승산이 없는 게임을 수도 없이 해 왔다. 대체로 전쟁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발자취와 달리 그는 명확한 승리가 눈에 보이는 상황을 좋아했다.
그에게 만약이라는 말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어질 상황은 만들지 않을 테니까.
“전하, 하면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언제나 몸조심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그럼요. 조부께서도 건강 조심하시고요.”
칼리온은 인사를 건네는 발레리아 후작에게 가벼이 눈을 접어 대답하며 낮게 가라앉은 눈빛을 감추었다.
***
“오라버니이…….”
나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에일런에게 곤란함을 표현했다.
“으응, 왜?”
하지만 내 애절한 목소리와 눈빛에도 불구하고 에일런은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흐음, 아까 분명 어떤 놈팡이가 내 동생한테 평생 운운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어조와 상반되는 살벌한 눈으로 발레리아 후작과 이야기 중인 칼리온을 잠시 응시했다.
도와줄 사람을 찾아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아버지는 에일런보다 더 살벌한 얼굴로 페른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아버지의 흉흉한 시선이 칼리온에게 닿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른 듯싶었다.
‘아, 망했어…….’
아니길 바라다가 회의가 시작되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에일런과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넘어가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발레리아 후작도 이제 자리를 뜰 모양이었다.
‘아니, 칼리온은 왜 혼자 태연하냐고……!’
나는 심장이 쿵쾅대서 미칠 것 같은데 제 조부와 인사를 나누는 칼리온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떨려야 하는 건 칼리온 아닌가?
본래 내 가족에게 교제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상대의 부모를 만나 말하는 게 더 긴장되는 법이었다.
물론 나는 경험이 없으니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도 같았…….
‘편해지기는 개뿔!’
조금 뒤 있을 시간을 잠시 떠올려 보니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돌처럼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긴장하는 이유야 뻔했다.
사랑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도 처음이고, 그런 사람을 내 가족에게 소개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거라면 칼리온과 내 가족이 그저 아는 사이를 넘어서 친밀한 관계라는 거겠지만…….
‘뭐, 상대가 칼리온이니 아버지랑 오라버니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겠지.’
***
인자한 얼굴의 발레리아 후작이 저택을 떠난 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조금 더 작은 응접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평소였다면 칼리온과 떨어져 앉았겠지만 두 사람이 우리 관계를 알아차린 게 확실했으니 나는 슬그머니 칼리온의 옆에 앉았다.
다행히 아버지와 에일런은 그런 나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썹이 살짝 들썩인 건 내 착각에 불과하리라.
달칵-
정적이 흐르는 응접실에는 테르반이 우아한 동작으로 다과를 준비하는 소리만이 조그맣게 울렸다.
“시원한 허브차입니다. 디저트는 같이 곁들여 드시면 좋을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테르반…….”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테르반에게 감사를 전했다.
“별말씀을요, 아가씨.”
나와 시선을 마주한 테르반이 의미 모를 웃음을 그렸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결국 유일하게 소리를 만들어 내던 테르반마저 응접실을 나갔다.
평소였다면 옆에서 깐죽거렸을 페른은 불똥이 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듯 연구할 게 남았다며 잽싸게 몸을 빼낸 지 오래였다.
“……칼리온.”
분위기가 내 예상과는 달리 흘러간다는 걸 깨달은 건 아버지가 칼리온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칼리온이 사석에서 아버지를 스승님이라 부르는 것과 다르게 아버지는 사석에서도 칼리온에게 전하, 라는 존칭을 붙여 불렀다.
물론 모든 게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아버지도 칼리온을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 가능성도 있으니까.
……일 프로쯤.
“예, 스승님.”
하지만 당황한 것은 나뿐인지, 칼리온은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릴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등을 곧게 세운 자세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까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평생이니 뭐니 하는 소리 말이다.”
낮게 읊조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한겨울의 바람처럼 서늘했다.
그렇지 않아도 묵직하던 분위기가 두 배는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뻣뻣하게 눈동자를 굴려 칼리온과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명할 기회를 주마.”
아버지의 말을 들은 칼리온은 바르다 못해 경직된 자세로 앉아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버지는 여전히 살벌한 눈으로 그런 칼리온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 훤칠한 칼리온을 작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마치 맹수 앞에 선 초식 동물같이 보였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책임감과 미안함이 불쑥 솟았다.
‘칼리온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버지와 에일런이 나를 걱정하고 아끼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 때문에 저들이 칼리온에게 차갑게 구는 것은 싫었다.
칼리온이 무언가 잘못한 것처럼 긴장한 태도로 뻣뻣하게 몸을 굳히는 것도 싫고.
그렇게 생각하자 입이 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가 먼저 고백했어요!”
외침에 가까운 내 말에 칼리온을 무섭게 바라보던 아버지, 그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있던 에일런, 마지막으로 말을 고르던 칼리온, 세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세 쌍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하고픈 말을 마저 이어 나갔다.
“제가 많이 좋아하고, 먼저 고백했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아가, 이 아비가 뭐라고 하려 한 게 아니라…….”
칼리온을 몰아붙이는 아버지가 야속해 조금의 원망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아버지가 서늘하던 표정을 지우고 황급히 내 말을 부정했다.
“아버지가 전하한테 뭐라고 하시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 전 싸늘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선명했기에 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말을 마친 후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 방금 낯간지러운 말을 해 가면서 많이 좋아하노라 고백한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아.’
칼리온은 내가 먼저 나선 것에 대한 놀라움과 내 고백에 대한 답인 듯한 애정을 두 눈에 가득 담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오롯이 마주하자 왜인지 모를 뿌듯함과 공개 고백을 한 데에서 기인한 자그만 민망함이 둥실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