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7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77화(177/218)
“……아가.”
칼리온을 마주 보며 웃던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온 건 어딘가 떨떠름하게 느껴지는 아버지의 부름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자 똑 닮은 이목구비를 똑같이 구긴 두 남자가 보였다.
눈앞에서 자식과 동생이 닭살 돋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겠지.
아주 조금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분한테는 조만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원래 더 일찍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까 조금 부끄러워서 제가 계속 미뤘거든요.”
나도 모르게 줄줄 흘러나온 내 말은 칼리온을 감싸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버지와 에일런이 칼리온에게 안 좋은 말을 하거나 못되게 대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말을 통해 들은 적은 없지만 나는 두 사람이 칼리온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 봐야 핀잔을 주거나 조금 더 나가면 대련하자고 넌지시 제안해 몰아붙이는 정도겠지.
‘그래도 그것도 싫은 걸 어떡해.’
칼리온을 아끼는 두 사람이 고작 나와 연애한다는 이유로 잠깐이라도 그 태도를 바꾸는 게 싫었다.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리온이 스승과 친우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에일런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때 에일런이 서운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부끄러웠다니까 어쩔 수 없지.”
“하하……. 어쨌든 예쁘게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음, 저 없을 때도 막 뭐라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구요. 안 그러시겠지만요! 그렇죠?”
나는 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약속을 재촉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너를 이기겠느냐.”
“알았어.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지.”
결국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불만스러워하던 표정을 지워 내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미미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내가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새하얀 빛이 잠시 번쩍였다.
그 빛이 사라지고 보인 건 아까 전 자리를 떠났던 페른이었다.
“주군, 도련님, 지금 저택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있나?”
“북부에 대한 보고입니다.”
페른의 말에 아버지와 에일런이 반박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따 보자꾸나.”
“네에.”
“전하께서는 다음에 한번 찾아 주시고.”
“예, 곧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전하’로 돌아온 아버지의 호칭에도 칼리온은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응, 알았어. 너무 늦지는 말고.”
늦지 말라는 말을 한 에일런의 시선이 잠시 칼리온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페른은 갑자기 나타나 순식간에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방금까지 묵직한 공기가 감돌던 응접실 안이 고요하고 편해졌다.
‘페른한테 선물이라도 줘야겠네…….’
오늘만큼 페른이 멋져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페른이 그런 걸 의도하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조금 전 본 얼굴은 일할 때의 진지한 표정이었으니까.
‘어쨌든 잘 끝내서 다행이다…….’
세 후작과 함께 한 회의도, 가족에게 우리 연애 사실을 알리는 것도.
후자는 뒷마무리가 조금 깔끔하지 못하긴 했지만, 다음에 다시 얘기하면 되니까.
뭐든지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었다. 다음에 이야기할 때는 조금 더 편한 분위기가 흐르지 않을까.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하자 뻣뻣이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래저래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아…….”
나는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몸을 흐물흐물하게 늘어뜨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맙습니다, 에리타.”
나와 눈이 마주친 칼리온이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어여쁜 미소를 보자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과 피로감이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뭘요. 아버지랑 오라버니가 유난스러울 건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역시 뭐든지 생각보다 더한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욕을 얻어먹을 각오도 했었는데…….”
작게 웃으며 대답한 내 말에 칼리온이 눈꼬리를 나붓이 휘며 어깨를 으쓱였다.
“욕이라니…….”
아니, 무슨 사귀는 사람 가족한테 욕을 얻어먹을 각오까지 했대. 원래 모르던 사이도 아니면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서 더 잘 알고 있었던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막지 않았으면 욕을 먹었을 것 같기도 했다.
부정할 수 없이 살벌했던 아버지와 에일런의 얼굴을 생각하니 칼리온의 말에 상당한 신빙성이 더해졌다.
“전하께서 뭘 잘못했다고 욕을 들어요…….”
이게 상견례도 아니고 고작 연애 사실을 밝히는 자리에서 나올 고민인가 싶어 어이가 없어졌다.
절로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주하고 있는 칼리온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 듯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만약에 다음에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이상한 소리 하시거든 꼭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꼭 그대에게 말할게요.”
“흐음, 좋아요. 그럼 저희도 바깥으로 나가 볼까요?”
“바깥에 말입니까?”
“네, 저택 안에만 있기에는 날이 너무 좋잖아요.”
나는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내 말대로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은 온 세상에 밝은 햇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기 정원 구경시켜 드릴게요.”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 자락을 탁탁 펴 정리한 나는 에스코트를 하듯이 칼리온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그럼 부탁드릴까요, 마이 레이디.”
물론 칼리온은 내 장난스러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
저택을 나와 푸르른 잔디 위로 꾸며진 정원에 도착한 우리는 손을 마주 잡은 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는 밤중에 도착해 구경하지 못했는데 정원이 생각보다 넓군요.”
저택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정원은 넓은 편이었다.
“맞아요! 제가 여기를 산 이유도 정원이 예뻐서랍니다. 운이 좋았는지, 마침 제가 쓸 만한 저택을 찾고 있을 때 여기가 비었거든요.”
“역시 그대는 식물을 좋아하는군요.”
“흐음, 좋아하는 편이죠?”
대공령에 있는, 아버지가 세르비아에게 선물했다는 정원을 봤을 때부터 나는 정원을 좋아했다.
그 순간 내 망막에 각인되었던 정원에서 너무도 따스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 전하는 대공령에 와 보신 적 없으셨죠? 다음에 오시면 거기 정원도 안내해 드릴게요. 저한테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곳이거든요!”
“……그럴까요.”
잠시 멈칫했던 칼리온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니 연두색 덤불로 나뉜 갈림길이 나왔다.
양쪽의 갈림길은 둥근 곡선 형태로 서로 멀어지는 방향을 향해 뻗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실래요?”
갈림길 앞에 선 나는 신이 난 표정으로 어깨를 틀어 칼리온을 마주하며 물었다.
“양쪽이 다릅니까?”
“당연히 다르죠! 힌트를 드리자면 한쪽은 시원함이 주제고 다른 한쪽은 따스함이 주제랍니다.”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돌아올 때 다른 쪽으로 오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별거 아닌 일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꽤 귀여울 것 같아서였다.
“흐음, 그럼 따스함 쪽으로 먼저 가 볼까요. 오는 길에 시원함 쪽으로 오면 될 터이니.”
하지만 칼리온은 내 기대를 와장창 부숴 버렸다.
특유의 장난기가 묻은 생글생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니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게 뭔지 알고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완전 유치하고 치사해요.”
“이런, 제가 말입니까?”
내가 그를 흘기며 툴툴거리자 칼리온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전하께서 먼저 고르신 따스한 정원은 이쪽이에요.”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몸을 휙 돌려 갈림길 중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칼리온이 얼른 내 옆으로 따라붙으며 내 손을 조금 더 꾹 쥐었다.
“같이 가요. 저는 길눈이 어둡습니다.”
나 참, 길눈이 어둡기는.
우리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은 칼리온의 어깨 정도 오는 높이의 덤불로 양옆이 막혀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오 분 정도 걸으면 따스함을 주제로 한 정원이 나오고.
“여기서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길을 안 잃을걸요.”
“흠, 세 살짜리보다 못한 연인은 매력이 없는 법인데…….”
어이없어하는 웃음이 묻어 나온 내 말에 칼리온이 한껏 진지한 어조로 고민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지만 동시에 그 모습이 괜히 귀여워 보였다.
‘이거 좀 중증 아닌가…….’
그가 내 장난을 받아 주지는 않았어도 어차피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칼리온은 “그냥 그대의 손을 계속 잡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제일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결론을 내렸다. 내 눈에 콩깍지가 낀 게 아니라 칼리온이 귀여운 거라고.
“확실히 따스함을 주제로 둔 곳이군요. 봄을 옮겨 둔 것 같네요.”
라그라스 상단의 정원사가 열심히 가꾼 정원을 본 칼리온의 감상이었다.
“후후, 그렇죠? 여기 피어 있는 꽃들은 전부 라그라스 상단에서 취급하는 품종들이에요.”
그 후 몇 분 더 전체적으로 노랗고 붉은 계열의 꽃들 사이를 거닐던 우리는 햇빛을 피할 용도로 만들어 둔 정자 아래로 들어갔다.
쨍쨍한 햇빛을 잔뜩 만끽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 역시 좋았다.
“오늘은 놀라운 일투성이군요.”
“뭐가요?”
내 물음에 그가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