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7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78화(178/218)
“아까 그렇게 말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대가 저를 많이 좋아한다고 멋지게 말했던 거요.”
칼리온의 말에 머리가 제멋대로 아까의 상황을 상기했다.
‘아까는 칼리온을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뱉은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낯간지럽고도 부끄러운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다니.
뭐, 일단 아버지와 에일런의 약속을 받았으니 목적은 달성했다지만…….
아쉽게도 내 민망함은 멀쩡하게 작동했다.
“정말 멋졌습니다. 다시 한번 반했어요.”
칼리온이 내가 좋아하는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연인의 사랑스러운 고백은 듣기 좋았지만 쑥스럽고 민망한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내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 얘기는 그만하면 안 돼요?”
칼리온은 그러겠노라 대답하지 않고 능청스레 흠……,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대가 저를 멋지게 지켜 준 순간이라 평생 간직하고 싶은걸요.”
그러고는 애교를 부리듯이 맞잡은 내 손을 살살 흔들며 씩 웃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라는 게 단박에 느껴졌으나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 역시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황후가 일 황자를 황태자에 올리는 게 그렇게 빨리 될까요?”
“흐음, 아마 한 달 내로 진행할 겁니다.”
내가 부러 말을 돌렸다는 것을 알아챈 칼리온은 다행히도 내 의도에 넘어와 주었다.
“한 달…….”
나는 칼리온이 말한 기간을 한번 곱씹어 보았다.
황제가 쓰러져 있는 상황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황제는 우리 계획에서 그리 큰 변수가 되지 않았다.
황제 개인의 권력으로 보나 지금 제국의 상황으로 보나, 황제가 깨어나더라도 일 황자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만약에, 음, 그,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죠?”
이 저택은 내 소유였고 그에 걸맞게 온갖 마법진으로 보호받고 있기에 말이 새어 나갈 걱정은 없다는 걸 알지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목숨을 입에 담는 것이다 보니 저절로 조심스러워진 탓이었다.
칼리온은 약간 에둘러 말한 내 말을 알아들은 듯이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황후가 황제를 죽일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는 확신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대에게 한번 말한 적이 있을 겁니다. 황후가 저와 제 어머니를 증오하는 이유를요.”
뒤이은 칼리온의 말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온과 아실라를 향한 황후의 지독하리만치 강한 증오는 배신당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말대로 황후는 황제를 사랑합니다. 과거형이 아닌 이유는, 지금도 황후가 황제를 사랑하기 때문이고요. 뭐, 정확히는 애증이라고 해야 옳겠죠.”
애증.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양면적인 감정을 뜻했다.
“지금까지 황제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제가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면 내 형님은 더 손쉽게 황제가 됐을 테고.”
사실이었다.
만약 황후가 황제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보다 더 일찍, 더 깔끔한 방법을 사용했겠지.
“하지만 황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뭐, 제가 황후의 속내를 알고 있는 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요.”
칼리온은 무언가 떠오른 듯한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구태여 그에게 어떻게 황후의 마음을 확신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다면 칼리온의 어머니, 아실라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불가피할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래 지나지 않아 어딘가 가라앉았던 표정을 말끔히 정돈한 칼리온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쥘 뿐이었다.
***
“전하, 정말로 가실 겁니까?”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띤 바론의 물음에 후드 매듭을 묶던 칼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별다른 말 없이 비스듬하게 기울인 고개가 그렇다는 뜻을 드러냈다.
바론은 제 주군의 실력도 잘 알고 지금 이 결정이 모든 게 제 뜻대로 되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내린 것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보좌관이 된 입장으로서 단신으로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겠다는 주군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 황자가 전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바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 의견을 꺼냈다.
“그럴 수도 있지.”
바론이 말을 꺼내기 전 멈추었던 손을 움직여 깔끔한 매듭을 완성한 칼리온은 선선히 긍정했다.
그러자 바론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지금 가는 곳이 황궁 중심에 위치한 일 황자궁이라는 것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시는 건 아닐까?
저절로 불경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주군께서 안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일 황자가 주군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당장 황궁 안에서 황실 기사단에 쫓기게 되실 텐데…….”
불만스러운 말투였으나 그 속에는 칼리온을 향한 걱정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일 황자가 칼리온이 온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그는 당장 드넓은 황궁 내에서 수많은 이들의 추격을 받을 터였다.
만약 무사히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칼리온이 멀쩡하다는 걸 알아챈 황후가 계획을 바꿀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시 모를 변수는 없앨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없애는 게 나았다.
그때 칼리온이 입을 열었다.
“테시스가 황후에게 지극하다는 건 사실이다. 몇 달 전이었다면 나도 이 계획은 말할 것도 없이 폐기했겠지.”
칼리온의 말을 들은 바론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몇 달 전과 지금의 일 황자가 다르다는 소리인가?
제가 볼 때는 그때나 지금이나 빌어먹을 황후에게 지극한 오만한 황자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칼리온이 의뭉스레 대답했다.
충격적인 사실이라니.
바론은 머리를 팽팽 굴렸다. 최근의 행실로 보았을 때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는데.
그때 칼리온이 답답한 바론의 속을 뻥 뚫어 주듯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형님은 황후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황후가 한 짓거리도.”
“예?!”
그 말에 바론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바론의 경악에 칼리온은 친절하게 다시 한번 설명해 주는 대신 검을 집어 들었다.
바깥은 해가 완전히 져 캄캄했다.
경계가 삼엄한 황궁에 침입하는 처지에 어둠은 그를 돕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설명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돌아온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녀와서 설명해 주지.”
짤막한 말을 남긴 칼리온은 그대로 열어 둔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주군……!”
바론의 작은 외침은 칼리온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가 뛰어내린 곳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보좌관을 뒤로한 칼리온은 손쉽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물론 당연하게도 저택에 있는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저택에 상주하는 하인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테르반의 신임을 받는 이들이었지만 칼리온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신중하기를 택했다.
사락-
칼리온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에리타가 그에게 내어 준 저택은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고위 귀족들의 저택이 몰려 있는 거리의 반대쪽, 부유한 상인들이나 하위 귀족들의 저택이 늘어선 곳이었다.
빠르게 발을 놀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웅장한 황궁의 모습이 보였다.
‘……감회가 새롭군.’
그의 궁이 있던 곳은 어제 일어난 대형 화재로 인해 싸그리 다 타 버렸을 터였다.
칼리온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처음 와 보는 곳도 아니고 인생 중 절반 이상을 보낸 곳이었으니 어디의 경계가 허술한지, 그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 중 가장 빠른 곳이 어딘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저벅저벅-
물론 황궁의 경비는 삼엄했기에 모든 곳에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암-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군.”
기사 둘의 발소리와 함께 피곤에 찌든 목소리가 들리자 칼리온은 가볍게 땅을 박차고 울창한 나무 위로 올라섰다.
두꺼운 나무줄기에 비례해 굵직한 나뭇가지는 그의 몸을 안정감 있게 지탱했다.
빼곡하게 돋아나 있는 푸른 잎사귀는 어둠을 입고 그의 모습을 완벽하게 감추었다.
“왜 아니겠나. 어제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갑자기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신 것도 모자라 그 배후가 이 황자 전하셨다니…….”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
“뭐가.”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기사들은 저들의 머리 위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입을 조잘거렸다.
잠을 떨쳐 내려면 계속 말을 해야 했다. 대화가 끊기면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밀려올 터였다.
졸린 눈을 애써 번쩍 뜨고 주위를 휘휘 살핀 기사가 작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황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독살하려 하셨다는 거 말이야.”
조금 전 ‘그게 정말일까?’라고 운을 띄웠던 기사였다.
절반의 의아함과 절반의 부정이 섞여 있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두 기사의 걸음이 멈추었다.
반역이라 판명 난 일의 진상을 의심하는 듯한 동료의 말에 다른 기사가 경악한 얼굴로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이봐……! 누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
다행히 주위에는 저들뿐이었지만 황궁이 어떤 곳인가. 지나가는 새조차 의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게! 그런 말을 하던 자들이 모조리 퇴출당한 거 모르나? 자네가 그분과 함께 전장에 다녀온 건 알겠지만 이건 이미 끝난 일이야.”
“어휴, 알았네, 알았어. 조금 긴가민가해서 그래. 되었으니 그만 가세.”
그 말을 끝으로 두 기사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온은 픽 웃었다.
‘어지간히도 불안한 모양이군.’
저렇게 눈치를 보는 걸로 보니 그를 옹호하는 뉘앙스의 말을 하다가 퇴출당한 이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이 정도라면 형님도 알고 있겠지. 부모와 달리 영민하시니.’
기사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칼리온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궁의 경비를 재배치한 건 아닌 듯 조금 전 보았던 기사 둘을 제외하고는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탓-
오늘 그가 만나러 온 이의 궁에 도착한 칼리온은 소리 없이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