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8화(18/218)
과일 꼬치를 다 먹은 후, 여전히 구경을 이어가던 나는 여러 잡다한 것들을 늘어놓은 좌판을 발견했다.
이제껏 쇼핑할 여유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나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걸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저런 걸 보면 일단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확실했다.
조르르 그 앞으로 다가가자 팔찌, 목걸이, 이상한 장난감 등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투박한 모양들도 있었지만 제법 정교하다 싶은 물건도 여럿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무섭게 생긴 가면을 집어 들었다.
‘이런 걸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대.’
거의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비주얼인데.
재미는 있었지만 정서에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아 얌전히 내려 두었다.
그렇게 잠시 노점상을 둘러보던 우리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리를 알지 못하는 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가는 대로 따랐다.
“여기는 조금 다르네?”
나는 이전과 조금 다른 거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는 시장 같은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조금 더 정돈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번화가 같았던 거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한산해졌다.
“아까 거기는 시장이었고, 여기는 사치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래.”
“아…….”
나는 오라버니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자면 시장과 백화점 정도의 차이인가?
주변을 둘러보자 공예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잡다한 것들을 파는 잡화점도 있었다.
그리고 검과 다양한 무기들을 파는 무기점까지.
식료품을 받아 오던 가게로 가는 길을 제외하면 리센의 거리조차 제대로 모르던 내가 보기에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저건 뭐지……?’
즐겁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유리창 너머로 양피지만 잔뜩 진열해 놓은 가게를 발견했다.
간판을 올려다보자 스크롤 상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크롤이라고 하면 마법 스크롤인가?
“아버지, 저건 마법 스크롤이에요?”
“그래. 잘 찾아보면 쓸 만한 게 있기도 하지.”
“잘 찾아보면……?”
그럼 쓸모없는 게 걸릴 확률이 높다는 거잖아.
뭐, 저기서 쓸 만한 걸 건지는 재미도 쏠쏠하긴 하겠지만.
그것도 마법을 아는 사람이나 고를 수 있지 않을까.
“저긴 하위 마법이 적힌 것밖에 없어.”
“하위 마법이 어떤 거예요?”
“음……. 시원할 정도로 바람을 불게 한다든가, 장작에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
나는 오라버니가 조곤조곤 말해준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잘 찾아봐야 쓸 만한 게 있다는 말과는 다르게 하위 마법도 나름 쓸 만한 것 같은데?
더울 때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건 조금 탐난다.
혹시나 다음에 오고 싶을 수도 있으니 위치를 잘 눈여겨보아 두었다.
“가지고 싶어?”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오라버니의 질문에 나는 흘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여름에 에어컨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
“네가 가지고 싶다면 줘야지.”
“와아, 정말요?”
“그래. 저택에 가면 많으니 그걸 주마.”
음? 저기서 사 주는 게 아니라?
뭐, 아무렴 어때. 아버지가 주시는 게 더 좋겠지.
나는 그때의 내 생각이 안일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저택 뒤의 숲을 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쓸 만한 스크롤이라고 했을 때는 그 위력이 어마어마하리란 걸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했던 소소한 마법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 역시.
앞으로는 아버지에게 함부로 무언가를 받지 않겠다 다짐한 것도 그때의 일이 계기였다.
***
중간에 레스토랑에 들러 밥도 먹고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한둘씩 켜지는 상점들의 불이 거리를 반짝반짝 빛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구나.”
온종일을 노는 데 투자했지만 아직도 조금 아쉬웠다.
아마 저택에 돌아가면 금세 곯아떨어질 테지만.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아쉬워하지 마.”
“그럴게요!”
부드럽게 내 손을 잡고 걷는 오라버니의 다정한 말에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마차에 올라타자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던 피로가 쏟아졌다.
‘지금 가기를 잘했다.’
만약 더 돌아다녔으면 내일은 꼼짝없이 침대에 박혀 있어야 했겠지.
다행히 푹신한 의자 덕에 마차 안에서도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러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잠들겠다…….
“에리타.”
내 품에 안은 곰 인형을 쿡쿡 찔러보던 나는 아버지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잠시 손을 줘 보렴.”
“손을요?”
어리둥절하며 손을 내밀자 이내 내 손목 위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바라보자 내 손목에 걸린 팔찌가 보였다.
얇은 은색 링 위, 보라색 보석 사이에 박힌 파란 보석이 영롱한 팔찌였다.
“이건…….”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예쁘구나.”
“아버지…….”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은색 링을 매만졌다.
분명 차가운 금속이 분명했지만 어쩐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해요.”
감사 인사를 전하자 아버지가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래 준다면 고맙겠구나.”
지금껏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이 이것뿐인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남다르게 느껴졌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알 수 없는 포근한 기분을 느끼며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
다음 날, 대공령 곳곳에서는 세작들이 올려 보낸 전서구들이 날아올랐다.
저마다 향하는 곳은 달랐지만, 적혀진 내용은 전부 같았다.
[아슬란 크로바하츠의 딸, 대공녀가 돌아옴.]하나같이 똑같은 사실을 담은 전서구들이 제 주인들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했다.
가끔은 사냥을 위해 먹이를 놓아 주는 맹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아슬란은 허락도 없이 제 땅의 하늘 위로 날아오른 새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불안에 떨어 보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대공령에서 흘러나온 소식이 수도로 퍼지는 데에는,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황실은 물론이요, 웬만한 유력 귀족들은 전부 소식을 듣고도 남았을 시간.
레노센과 황후. 그들의 일그러졌을 낯짝을 떠올리니 절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리타를 데려온 지 이 주가 넘게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으니, 조금 찝찝하더라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을 터.
“……그 여우 같은 낯짝에 웃음이 있어선 안 되지.”
아슬란의 낮은 읊조림이 스산했다.
그들이 느낄 불안과 초조는 아주 길고 진득할 것이다.
오랜 시간을 고통받은 제 아이들의 몫과 사랑하던 이의 목숨만큼 깊고 처절한 복수는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깊든 얕든 관여한 모든 자는 그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리라.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통신용 수정구가 밝게 깜빡였다.
그에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던 아슬란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마력이 동그란 수정구를 밝혔다.
한 인영의 모습이 불투명하게 나타났을 때는 아슬란이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뒤였다.
일렁이던 수정구에 화려한 의복 차림의 미중년이 비쳤다.
진한 금발에 번듯한 얼굴을 한 남자.
번쩍거리는 외양만 보아도 능히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제국에서 그보다 높은 존재가 없다는 황제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정중한 인사였지만 말투는 무감하기 짝이 없었다.
-하하, 이리 대공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아슬란의 단조로운 인사에도 수정구 너머의 황제가 허허 웃었다.
인자한 얼굴 뒤로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민낯을 숨기고 있는 인간.
지금의 황제에 대한 아슬란의 평가였다.
“수도에 갈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내가 보낸 초대장을 전부 돌려보내 놓고 그리 말하니 섭섭하군. 대공과 내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안타까워.
말과는 달리 황제의 얼굴에는 서운함이 서려 있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만족감이라 칭할 법한 감정이었다.
제국에 하나뿐인 대공의 영향이 황권보다 뒤처지지 않으니 황실, 아니 황제로서는 그가 가만히 대공령에 머무는 게 이득일 테지.
언제나 그보다 위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황제가 아닌가.
그런 황제였기에 지금까지 아슬란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았다.
하지만 지금 수도의 시선이 대공령으로 향하는 상황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그러니 득달같이 연락을 취한 것 아니겠나.
‘시간이 지나도 변한 게 없군.’
황제, 율리스 루인 엘베르는 본래 욕심이 많고 열등감이 심한 이였다.
지금부터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선황제와 전대 대공이었던 그의 부친은 마음이 맞는 친구였고, 의도치 않게 어렸던 아슬란 역시 황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친우의 아들이었던 그를 선황제는 꽤 아꼈다. 제 아들인 율리스를 소개해 줄 만큼.
하지만 그는 저보다 뛰어난 아슬란의 재능을 질투했고, 그 감정은 머지않아 증오로 변질됐다.
고작해야 열댓에 불과했던 둘이었지만, 황태자라는 자리는 율리스의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의 수위를 높였다.
아슬란은 증오라는 감정이 사람을 어디까지 추악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때 알았다.
그랬던 율리스는 황제가 된 이후, 곧바로 아슬란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길 요구했다.
아슬란 역시 율리스가 제게 가졌던 열등감을 알았기에 괜한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그가 선을 넘지 않았더라면.
대공령을 북부로 옮기라니.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 아닌가.
아슬란이 그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한 이후로 율리스는 기를 쓰고 저와 제 가문을 견제했다.
어리석게도 무엇이 제게 득인 줄 모르고.
아슬란은 굳이 새어 나오는 실소를 막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제가 수도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실 텐데요.”
어떻게 잘 유지하고 있는 권력이 흔들리는 것은 싫을 테니.
뒷말은 굳이 뱉지 않았지만, 뜻은 충분히 알아먹었겠지.
아슬란의 느른한 대꾸에 황제의 눈매가 잠시 움찔거렸다.
픽 웃으며 대꾸하는 아슬란의 모습이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 테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여전하군.’
하지만 제국의 황태자와 그저 대공자에 불과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그가 제게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굳이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지.
꼴사나운 모습은 제가 아니라 그가 자처한 것이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대공도 바쁠 텐데 너무 오래 잡고 있었어.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춘 황제가 꺼낸 말은 예상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대공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황궁 벽을 넘어 들어왔더군.
“소식이 상당히 빠르군요.”
-허어. 이거 참 축하할 일이 아닌가.
무심한 긍정에 황제가 애써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감추고 인자하게 웃었다.
-대공령이 축제 분위기라더니,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그래.
“…….”
-공녀는 잘 지내고 있나? 대공의 딸이면 내 조카와도 같은 아이가 아닌가. 소식을 들은 후부터 걱정이 되어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리 말하며 지어 보이는 표정에는 또 얼마나 걱정이 그득그득 묻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 말을 진심이라 생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아슬란의 눈에는 그저 탐욕에 눈이 먼 황제일 뿐이었다.
“그는 폐하께서 염려하실 부분이 아닌 듯싶습니다.”
-……하하. 그저 순수하게 공녀를 생각하는 마음뿐이니 곡해하지 마시게.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지요.”
아슬란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굳이 돌려 말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은 직설적인 말에 차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래, 대공이 그렇다면야. 하면 이만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난 직후, 밝게 빛나던 수정구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아슬란은 통신이 끊어진 수정구를 바라보다 이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는 제가 고개를 조아리는 걸 보기 위해 인사를 받은 후에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통신을 끊더니.
“폐하께서 기분이 퍽 상하신 모양이야.”
그 작태를 비웃은 아슬란은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쓴 목표는 충분히 이루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