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8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82화(182/218)
아홉 시가 조금 넘은 밤의 정원은 어두웠다.
아무 말 없이 걷던 나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오는 단단한 손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칼리온이 보였다.
“내일이 걱정되는 겁니까.”
내 손을 살살 어루만지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아까 전부터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으음,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한 건 여러 이유가 섞인 탓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건 내일이 걱정되어서가 맞으니까.
비스듬히 고개를 올려 바라본 칼리온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이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상황만 두고 본다면 나보다 더 떨려야 할 사람은 칼리온일 텐데도.
“전하는 걱정되지 않으세요?”
“결과를 아니까요.”
칼리온의 대답은 싱거우리만치 간단했다. 결과를 아니까 걱정하지 않는다.
그 덤덤한 대답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웃자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칼리온의 입꼬리도 살짝 말려 올라갔다.
나는 칼리온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당부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내 당부를 들은 칼리온이 웃는 모양인지 기댄 가슴팍이 약하게 울렸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그 나직한 대답이 마음에 든 나는 한 번 더 속삭였다.
“다치지도 마시구요.”
“다치지 않을게요.”
다시 돌아온 대답은 옅은 웃음기를 머금어 다정했다.
나는 감은 허리는 놓지 않은 채로 상체만 살짝 뒤로 물려 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를 안은 순간부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건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든 내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레 그의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칼리온의 얼굴에 놀랄 새도 없이 말캉한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
깜짝 놀란 탓에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 그의 셔츠 자락을 세게 쥐었다.
그런 내 반응을 본 건지 칼리온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칼리온의 말랑한 입술이 금세 내 이마에서 떨어졌다.
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다를 닮은 칼리온의 눈동자가 보였다.
“싫었습니까?”
그의 다정한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기는 무슨.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지만 이마에 닿았던 연인의 따스한 입술이 싫을 리가 없었다.
내 부정에 칼리온의 눈빛이 조금 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느릿하게 올라온 칼리온의 손이 아주 부드러이 내 입술을 톡 건드렸다.
“……그럼 여기는요?”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어쩐지 초조해 보이기도, 어딘가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표정을 보자 놀랐던 탓에 쿵쿵 뛰던 심장 박동이 기분 좋은 설렘의 박동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하는 대신 뒤꿈치를 들었다.
그러고는 칼리온의 말랑한 입술을 내 입술로 꾹 눌렀다.
그의 입술은 조금 전 이마에 닿았을 때 느꼈던 것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지금, 이게…….”
가볍게 붙였던 입술을 떼어 낸 나는 멍한 얼굴로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칼리온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손을 잡고 끌어안는 건 능글맞은 얼굴로 잘하더니.
칼리온의 당황한 얼굴에 자꾸만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닿은 곳도 당연히 좋아요. 전하는요?”
탄탄한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속삭이듯 묻자 칼리온은 입술을 꾹 짓씹었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귀여운 칭얼거림은 덤이었다.
***
이번 황태자 즉위식은 특이하게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외궁에서 진행되었다.
당연히 평민들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먼 곳에 뭉쳐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황태자 즉위식 중에서는 가장 개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통은 가장 화려한 본궁에서 즉위식을 끝낸 후 말을 타고 수도를 한 바퀴 돌 때나 제국민들에게 얼굴을 내비치니까.
이건 테시스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기 위해 황후가 수를 쓴 것이었다.
한번 심어진 인식은 쉬이 바뀌지 않으니 황실의 상징인 금발의 테시스가 계단을 올라 황태자가 되는 것을 보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사람이 엄청 모였네.’
과장을 조금 보태 수도에 있는 제국민의 반 정도는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비록 실패로 끝날 황태자 즉위식이지만 저들은 그것을 모르니.
나는 저 멀리 모여든 인파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올려 계단의 가장 위를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후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높게 지어진 외궁의 완만하고 긴 계단 가장 위는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의 자리였고, 계단의 중간쯤부터 양쪽으로 귀족들이 그 계급에 따라 층층이 자리를 잡고 섰다.
나와 아버지, 에일런은 당연하게도 귀족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섰다.
이 자리의 단점은 높이가 높이인 만큼 많은 시선이 쏟아진다는 거였지만 나 역시 높은 곳에서 아래를 살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망가진 데는 없네.’
느릿하게 주위를 훑는 척 몇 군데를 확인한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황족이 나올 테고 그와 동시에 즉위식이 시작될 것이다.
웅장한 즉위식의 시작을 알리는 짧은 연주는 오랜 내 목표를 위한 찬가가 될 터였다.
‘……드디어 끝나네.’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으며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스물네 시간의 하루. 그 하루가 지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었다.
오늘 나는 오래된 목적을 이루고, 또한 이미 지나갔지만 바래지는 않은 원망을 털어 낼 수 있겠지.
“후우…….”
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후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치맛자락 위에서 한쪽 손목을 잡고 모은 손 아래로 소중한 팔찌의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아버지와 에일런과 함께 마을 나들이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받았던 팔찌.
그 후로 두 사람에게서 수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이 팔찌는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늘 손목에 끼고 있었다.
나는 팔찌를 쓰다듬으며 마력을 거미줄보다도 더 얇고 촘촘하게 펼쳐 냈다.
범위는…… 내 시야가 닿는 곳까지.
순식간에 저 멀리까지 뻗어 나간 가느다란 내 마력 가닥 하나하나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누볐다.
오늘을 위해서 술식을 비틀고 뜯어고쳐 만들어 낸 새로운 마법.
‘……찾았다. 동쪽 넷, 북서쪽 다섯, 남동쪽 셋, 기사단 사이에 둘, 귀족들 사이에 여섯.’
어둡고 질척한 마력을 가진 이들을 찾아낸 마력이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정체를 숨긴 흑마법사들의 뒷덜미에 달라붙었다.
저 마력들은 내가 신호를 보내면 제가 붙은 당사자의 몸을 밝게 빛낼 것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게.
그때였다.
“제국의 가장 찬란한 태양,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제국의 가장 빛나는 달, 황후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외궁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단번에 고요해졌다.
평민들이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조금씩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지금 이곳은 고요에 가까웠다.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세공된 육중한 문이 열린 사이로 황제와 황후가 걸어 나왔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인 상황에서의 예는 고개를 숙이며 잠시의 침묵을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사이가 좋음을 강조라도 하듯이 팔짱을 끼고 나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잠시 오래전 보았던 모 연예 시상식을 떠올린 나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마련된 자리로 향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델리아는……, 없네.’
황후의 뒤에는 델리아가 없었다.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델리아는 분명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델리아를 찾는 대신 황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아 제국이 소란스러웠음을 안다. 하나 오늘은 제국의 역사에 있어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다.”
마법을 사용한 듯 미리 준비된 황좌에 앉아 입을 연 황제의 목소리가 드넓은 공간에 빈틈없이 울렸다.
그 목소리는 내가 알고 있는 황제의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황제의 눈은 아니었다.
화려한 정복을 걸친 채로 말을 이어 나가는 황제의 눈을 주의 깊게 바라본 나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너무 늦었네. 길어도 석 달밖에 안 남았어.’
독을 이기고 깨어난 이후부터 황제는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무는 평소처럼 보는 것 같다고 했지만 황제가 주로 머무는 곳은 황제궁과 황후궁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흑마법에 잠식된 건 독에서 깨어난 그날이었다.
지금은 그로부터 삼 주가 지났고.
‘지금 알려야 하나?’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알려도 혼란만 가중될 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가 따로 말한 적은 없지만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황제와 아버지의 사이가 그랬다.
‘……모든 게 끝나고 말해도 늦지 않아.’
황제를 잠식한 흑마법.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나 정신 깊은 곳을 장악하는 최고위 주술.
술자를 죽여도 풀리지 않는 그 주술의 악랄한 점은 지금에 와서는 장점이 되었다.
내가 델리아를 죽인다고 해도 황제가 함께 죽지는 않을 테니까.
“한번 쓰러져 보니 알겠더군. 제국에는 든든한 후계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든든한 후계자.
흑마법에 잠식당하지 않은 황제라면 테시스를 두고는 절대 꺼내지 않았을 단어였다.
황제는 레노센을 경계했고 레노센의 피를 이은 테시스가 그들의 힘이 되는 것을 경계했으니까.
그는 칼리온 역시 경계했다. 전쟁 영웅인 칼리온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그 유명세가 권력과 영향력으로 직결되었으니.
결과적으로 황제는 두 황자가 서로의 힘을 갉아먹으며 제 자리를 탐하지 않기를 바랐다.
‘성대한 즉위식으로도 모자라서 황제의 적극적인 지지라…….’
황후가 그린 그림 속의 테시스는 완벽하고 흠결이 없는 강력한 군주일까, 아니면 완벽하고 흠결이 없는 그녀의 꼭두각시일까.
짧지도 길지도 않은 황제의 말이 끝나고,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