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8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83화(183/218)
정복 위로 두르는 황제의 망토는 짙은 붉은색이다.
그에 반해 황태자의 망토는 짙은 자주색이었다.
“일 황자, 테시스 루인 엘베르는 계단을 오르라.”
황제가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주색 망토를 걸치고 그 아래에 새하얀 황태자의 정복을 입은 테시스가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표정이…….’
테시스의 얼굴을 응시하던 나는 그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격식이 있는 자리이기에 긴장한 걸까? 아니, 고작 그런 말로 설명될 표정이 아니었다.
‘체념…… 자괴감…….’
내가 테시스의 얼굴에서 읽어 낸 감정은 그랬다.
왜? 테시스의 입장에서 오늘은 기쁜 날일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칼리온과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고 손쉽게 미래의 황좌를 차지하는 날이니까.
그런데 왜 저런 감정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느리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얼굴은 마치 그가 걸친 망토를 달가워하지 않는 듯한…….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불쑥 든 생각을 부정했을 때였다.
틱-
미리 정해 둔 신호가 울렸다.
“이 황자 전하시다……!”
누군가 큰 소리로 칼리온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나는 칼리온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좋은 날이군요, 형님.”
칼리온이 나타난 건 테시스가 선 곳보다 조금 아래, 세 칸 낮은 계단 위였으니까.
***
칼리온은 저보다 조금 위에 선 테시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크게 떴던 테시스는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옳았다, 칼리온. 진실을 가리는 추악한 짓은 하지 않겠다.”
테시스의 작은 속삭임은 그가 양손에 쥐었던 선택지 중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땅으로 떨쳐 버렸는가를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그 선택이 손쉽지 않았던 듯 테시스의 얼굴은 이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을 알아들었음을 표현한 칼리온은 시선을 비스듬히 올렸다.
완만하고도 긴 계단의 끝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황후는 경악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온은 입가에 부러 여유로운 미소를 그렸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뭐, 뭐라?!”
칼리온의 인사에 팔걸이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선 황후와 달리 그 옆에 앉은 황제는 별다른 감정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다.
‘……저 낯짝이 일그러지지 않는 건 조금 아쉽군.’
몇 주 전 에리타가 조심스레 꺼낸 말로 인해 칼리온은 지금 황제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깨어 있으나 그저 깨어만 있는 상태. 말을 하고 몸을 움직이나 그것이 자의가 아닌 상태.
-황제가 대외 활동을 줄인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흑마법에 잠식당한 이상 오래 마주하고 있다 보면 누군가는 이상함을 알아차릴 테니까요.
‘저 모습을 보고도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사람은 눈이 없다고 봐야지.’
칼리온이 아는 황제이자 그의 아비는 저를 보고도 저리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항상 이유 모를……,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감정으로 점철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였으니.
칼리온은 픽 조소하며 대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당황한 듯이 황망하게 그를 바라보는 테시스의 세력들이었다.
그중 압권은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레노센 공작이었다.
조금 전 보았던 황후와 똑같은 표정. 순간의 기분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는 꼴이 아주 판박이였다.
“칼리온!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야……!”
그때 뒤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칼리온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이 황자 전하시라고?”
“그래! 이 황자 전하가 맞으시네! 황족 중에 그분만 은발이시지 않은가!”
제국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들판에 번진 불길처럼 빠르게 퍼져 갔다.
“하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황후 폐하. 제가 황궁이 아니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황후의 고함과 반대로 잔잔한 칼리온의 목소리는 평민들이 있는 저 멀리까지 선명하게 울렸다.
모습을 감추고 있는 페른이 마법을 펼친 덕이었다.
태연한 칼리온의 대꾸에 황후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네가 어찌 황궁에 들어오느냔 말이다! 뭣들 하는 것이야! 당장 반역자를 잡아들여라!”
즉위식이 진행되는 동안 황족과 귀족이 있는 곳의 경비를 맡은 제1 황실 기사단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홱 돌린 황후가 소리를 높였다.
발작에 가까운 황후의 명을 들은 기사들은 몸을 움직이기 전 황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 제1 황실 기사단은 황제의 명만을 받든다.
황제가 일시적으로 그 권한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면 설령 황후의 명이라 하여도 그들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명을 내려야 할 황제는 어딘가 마력이 다 되어 멈춰 버린 시계와 같이 굳은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칼리온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건 제가 아닙니다.”
“네가 아니라니! 뻔뻔하기가 제국에서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버젓이 증인과 증거가 있거늘!”
“누명을 쓴 겁니다.”
칼리온의 단호한 부정에 군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멀리까지 선명히 울려 퍼지는 목소리 덕에 평민들도 황후와 칼리온 사이의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거 보라니까! 누명을 쓰셨다잖아.”
“에이, 그게 진짠지 가짠지 우리가 어떻게 아나?”
“그 뭐냐, 흑마법을 쓰는 놈이 누명을 씌웠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소란은 비단 평민들 사이에서만이 아닌 귀족들 사이에서도 일고 있었다.
귀가 있기에 그 소란을 들은 황후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 망할 소문!
‘빨리 저놈을 잡아 처넣지 않으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것이다. 놈의 입에서 흑마법에 대한 것이 나오기 전에……!’
흑마법사는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삼백 년 전 제국이 모든 흑마법사를 죽이지 못한 것도 그 이유 탓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어찌 이리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냐……. 저놈은 내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몰라. 알 리가 없다.’
혹여 의심을 한다 해도 삼백 년 전이 아닌 현재에는 흑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 흑마법의 흔적이라면 몰라도 그 술자인 흑마법사를 구분해 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생각과는 별개로 초조해진 황후가 다시금 반역자의 변명을 들어 줄 필요 따위 없다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제가 누명을 쓴 이유는 흑마법을 파헤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아’라는 흑마법사 단체를 말입니다. 제게 누명을 씌운 자는 감히 황제 폐하를 미끼 삼아 저를 내치고 흑마법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키려 한 겁니다.”
흑마법.
칼리온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좌중이 소란스러웠던 것이 무색하게도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칼리온의 그 말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자 전하, 방금 하신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제국의 국교인 태양교, 그리고 그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의 종.
“사실입니다, 대신관.”
칼리온은 황태자의 즉위식에서 축복의 기도문을 읊어 주기 위해 참석한 대신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덤덤한 대답에 대신관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혹여 황자 전하께서는 그 사악한 사술을 사용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추측한 것이지만 전하께서는 전하께 누명을 씌운 이를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대신관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황후의 낯이 허옇게 질려 갔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누명을 씌운 이를 알고 계시는 듯하다는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평소의 황후였다면 이 정도로 평정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태어나기를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을 당연하다 배웠고 이십 년이 넘도록 제국의 여인 중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군림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황후의 정신이 닳고 닳아 마모된 상태였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칼리온에게 걸었던 저주가 되돌아온 것이었고, 그다음으로 큰 원인은 그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 매일 먹었던 약이었다.
“대신관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으신단 말입니까!”
결국 황후는 체통도, 평정도 모두 잃고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만히 상황을 살피던 귀족들의 눈이 황후에게로 향했다.
누가 보아도 지금 황후의 반응은 과했다.
그건 대신관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폐하, 흑마법은 그 사특함과 끔찍함이 큰 피해를 낳아 삼백 년 전 지엄한 황명으로 금지된 것입니다. 태양신께서도 악하다 하신 것이니, 그분의 종인 저로서는 황자 전하의 말씀을 들어 진상을 명백히 밝힐 소명이 있습니다.”
“대신관……!”
“황자 전하, 알고 계시다면 속히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의 말씀이 사실임이 증명된다면 당장 그 간악한 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추포하라 명을 내릴 것입니다.”
무시에 가까운 대신관의 대응에 황후의 창백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대신관이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황후가 흑마법을 사용하는 건 모르는 모양이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온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을 생생하게 듣고 있는 군중들도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칼리온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통탄할 일이지만 이 황궁 내에 금지된 사술을 사용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빠르지 않은 그의 말에 대신관이 독촉하자 칼리온의 시선이 느릿하게 굴러갔다.
그리고 그 굴러간 시선의 끝에 자리한 건…….
“황후 폐하십니다.”
핏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얼굴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황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