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8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84화(184/218)
수많은 시선이 황후에게로 향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때로는 침묵이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압박이 되기도 했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숨이 턱 막히는 정적을 깬 건 비명에 가까운 황후의 고함이었다.
칼리온은 벌컥, 소리를 지른 황후의 모습을 느릿하게 훑었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 그가 선 곳에서도 보일 만큼 떨리는 시선. 짓씹지 않으려 애를 쓴 듯하지만 세게 물었는지 피가 비치는 입술.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자 파르르 떨리는 꽉 쥔 주먹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까지 망가지셨습니까, 황후.’
어린 시절, 칼리온에게 있어 황후는 밉고 무서운 존재였다.
하녀를 매수해 어머니가 아끼는 물건을 망가뜨리는 건 일상이었고, 어느 날은 어머니가 먹지 못하는 음식을 선물이라고 하사해 먹고 쓰러지게 만들었다.
황후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 어머니가 궁 안에만 칩거하면 꼭 찾아와 온갖 물건들을 다 못 쓰게 만들며 패악을 부렸다.
황궁의 주인이자 그의 아버지인 황제가 어머니를 찾기라도 하는 날에는 황후가 부리는 패악의 수위가 훌쩍 높아졌다.
그날도 잔뜩 화가 난 황후가 다녀간 후였다.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철이 든 칼리온이었지만 황후의 고함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황후와 마주하고 나면 늘 어머니가 슬피 울며 가슴 아파한다는 것 정도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황후가 그의 어머니에게 칼처럼 날카롭고 아픈 말을 한다는 것도.
-칼리온, 내 아가……. 네가 황후 폐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이 어미가 저분께 잘못한 게 있어서 그래. 그것 때문에 황후 폐하의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셔서 그런 거란다.
엉망이 된 방 안에 힘없이 주저앉은 어머니는 그를 꼭 안고 그리 말했다.
어린 칼리온은 그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께서 잘못한 게 있으면 마음을 다해 사과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누군가 제게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한다면 너그럽게 그 사과를 받아 주고 용서하라 하셨잖아요.
어머니는 다음 날 앓아누우실 만큼 울면서 황후 폐하께 죄송하다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황후 폐하는 어머니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세요? 왜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으세요?
……도대체 어머니가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황후 폐하께서 저렇게도 오래 어머니를 미워하세요?
그런 말들이 차올라 목구멍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차마 그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못난 꼴을 보여 미안하구나. 오늘은 우리 아드님이 좋아하는 정원에 나가서 저녁을 먹자. 좋지?
온통 눈물로 젖은 얼굴로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도닥이는 어머니가 너무도 연약해 보였으니까.
당장에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좋아요.
결국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체념에도 끝은 있었다.
물감을 짙게 풀어 낸 것처럼 유난히도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날이었다.
검술 수업에서 칭찬을 들어 빨리 어머니를 뵙고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칼리온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칼리온은 운이 없게도 황후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를 보자마자 일그러지는 황후의 얼굴을 보고 그는 생각했다.
얼른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하지만 황후는 인사를 한 후 눈을 내리깔고 길을 가려던 칼리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악!
그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세게 붙잡은 황후가 악마의 것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악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어미가 너를 어찌 낳았는지 아느냐? 천박한 몸으로 이 제국의 황제를 유혹했다. 화려한 황궁이 탐이 났겠지!
-아랫것들이 너를 황자라 부른다고 하여 네가 진짜 황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는 이 황실의 이름을 더럽힌 아이이자 창녀의 자식이란다.
-너는 첩의 자식이다. 완벽한 가족을 깨트린 저주받은 씨가 너란 말이다.
황후는 어린 칼리온이라고 해도 알아채지 못하기가 어려울 만큼 진득한 악의가 담긴 폭언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다섯 살 난 칼리온이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 말을 듣고 엉엉 울면서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때, 두서없는 그의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가녀린 품에 그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그때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황후에게 미안하다며 울지 않았다.
그에게 황후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체념과 받아 주는 이 없는 사죄가 끝난 날이었다.
어릴 적 보았던 황후는 너무도 큰 사람이었고, 그 앞에서 칼리온은 무력했다.
“하하……. 저는 지극히 제정신입니다, 황후.”
“하면 너는 제정신으로 그런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게로구나.”
“궤변이 아니라 가릴 수 없는 진실을 말한 겁니다.”
“하! 황후인 내가 무엇이 모자라서 그런 사특한 것에 손을 댄단 말이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삼백 년 전 흑마법을 옹호하다가 멸문된 가문이 공작가라는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여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황후. 그건 황후가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애써 의연한 척하며 어깨를 편 황후와 여유로운 태도로 나긋하게 황후의 말을 받아치는 칼리온.
당연하게도 후자의 말에 더 믿음이 쏠렸다.
고요하던 좌중이 서서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황후께서 어찌 저리 당황하시는가.”
“설마 이 황자 전하의 말이 사실인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나! 황후 폐하께서 무엇이 모자라 그런 사술을…….”
간혹 황후를 옹호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금세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그때, 굳은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을 듣고 있던 대신관이 나섰다.
“이 황자 전하, 증거가 필요합니다.”
“대신관! 지금 저 반역자의 말을 믿는 겁니까?!”
“저는 신을 모시는 종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공정해야 합니다. 만약 증거가 없다면 그 대가는 이 황자 전하께서 치르셔야 하는…….”
“나는 황후입니다! 이 제국의 가장 높은 여인, 황후란 말입니다! 그런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당장 저것을 잡아 감옥에 처넣는 게 먼저입니다! 내 남편을 죽이려 한 저것을 죽이란 말이야!”
황후의 찢어지는 발악이 공기를 갈랐다.
아주 조금 남아 있던 그녀의 평정심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버티지 못했다.
제 남자를 빼앗고 제 공간이던 황궁에 들어앉아 황궁의 평화를 깬 아실라 발레리아.
제 아이에게 쏟아져야 할 찬사와 감탄을 빼앗아 간, 아실라 발레리아를 쏙 빼닮은 그녀의 아들.
칼리온이 꺼내는 말과 동요하는 좌중을 보자 실낱같던 황후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공포와 두려움, 분노가 뒤섞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추악한 감정이 황후를 지배했다.
고귀한 여인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다.
“……흑마법사는 순리를 거스른 이들입니다. 선과 가장 멀리 떨어진 악의 종주죠.”
칼리온의 나직한 말이 황후의 발악이 찢고 지나간 자리를 가볍게 덮었다.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힘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간 이들의 피에서 비롯된 원한. 그렇기에 가장 순수한 신성력과 가장 순수한 마력, 이 두 가지와 상반됩니다.”
“그렇다면…….”
“대신관이 원하는 증거, 내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칼리온이 신호를 보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하늘 위로 커다란 막이 드리웠다.
새하얀 빛을 발하는 반투명한 막은 황태자 즉위식이 진행되는 외궁을 포함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머리 위를 덮었다.
“저, 저게 뭐야……!”
“세상에, 태양신이시여!”
선 밖에 모인 평민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를 질러 댔고, 귀족들은 그보다는 점잖게 놀라움을 드러냈다.
수만에 가까운 인파 위의 하늘을 모조리 덮은 반투명한 막은 그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투명하면서도 하얀 그 막은 어딘가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다.
사람들은 하늘 위에 떠오른 저것이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순식간에 환호하며 손을 번쩍번쩍 들어 댔다.
“황자 전하, 저것은 대체…….”
겨우겨우 하늘에서 시선을 뗀 대신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막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기운은 그가 애타게 그렸던 제 주인의 것이었다.
주인의 은총을 내려받은 이들이 펼치는 힘이 아닌 온전한 주인의 권능. 그의 신, 태양신의 권능.
세월이 흘러 유한 주름이 진 얼굴이 칼리온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대신관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저 막을 이루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는 이내 대답을 들었다.
“그, 그렇다면……!”
칼리온의 말에 대신관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그는 십오 년 전까지 대신관의 자리에 있다가 그가 키워 낸 아이에 의해 쫓겨난 이였다.
그를 쫓아낸 아이의 뒤에 레노센과 황후가 있었음을 알게 된 건 고작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대를 다시 대신관 자리에 올려 주겠네.
-이 늙은이는 이미 한 번 내쳐진 몸입니다. 대공의 말씀은 제게 너무 버겁군요.
-내 아내는 흑마법으로 인해 죽었다. 저주였지.
-……예?
-대신관, 이 제국에 흑마법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이야.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대신관의 자리를 되찾았고, 애타게 그리던 주인의 힘을 다시 눈앞에서 보았다.
대신관은 차오르는 질문들을 꾹 삼키고 칼리온을 곧게 바라보았다.
지금은 대신관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했다.
“이것이 황후 폐하께서 흑마법을 사용하셨다는 증거입니까?”
“그걸 밝힐 준비……, 라고 하는 게 더 맞겠네요.”
여전히 나긋한 태도로 대답한 칼리온은 누군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시선을 마주한 건 다정하고도 단단한 보랏빛 눈동자였다.
“흑마법을 사용한 자는 빛을 버티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그 흔적을 드러내기 마련이죠.”
그의 신호에 제비꽃을 닮은 눈이 감기고, 그와 동시에 넓게 펼쳐졌던 새하얀 막이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