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8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88화(完)(188/218)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자지도 않고 어디를 나가겠다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그게 우리 집이란다.
고작 내 투정 한마디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나와 달리 칼리온은 어느새 겉옷을 챙겨 입고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서류마저 대충 정리를 마친 후였다.
가만히 두면 정말 십 분 후에는 내 방 발코니에서 칼리온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제가 갈게요……!”
결국 나는 내놓지 않으려던 차선책을 내놓고야 말았다.
-……지금 황궁으로 오겠다는 말입니까?
내 말에 칼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칼리온이 보고 싶은 마음에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우리 둘 중에 움직이기 쉬운 것도 나였고.
그러니 누군가 상대방을 만나러 가야 한다면 내가 가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제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먼저 보고 싶다고 했고……, 그리고 저는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요!”
-흐음…….
“제가 마음만 먹으면 십 초 안에 전하 곁으로 갈 수 있답니다.”
내 장난스러운 말에 칼리온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저는 얌전히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까?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를 매단 칼리온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가고자 마음을 먹은 후였기에 자꾸만 예쁜 짓을 해 대는 칼리온을 보자 기분이 붕붕 들떴다.
“흐흥, 좋아요. 그럼 저 통신 끊고 얼른 갈게요!”
-빨리 오는 건 좋지만 위에 뭐라도 걸치고 조심해서 와요. 새벽바람이 꽤 찹니다.
“네에, 그럴게요. 오 분 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칼리온의 다정한 말에 나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인 후 통신을 끊었다.
후다닥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 거울을 들여다보자 다행스럽게도 멀쩡한 얼굴과 머리 상태가 보였다.
“겉옷…….”
지금 입고 있는 상아색 원피스는 잘 때 입는 옷이기는 했으나 아예 잠옷은 아니었다.
그 위에 뭘 걸치면 좋을지 생각하던 내 눈에 아까 저녁을 먹고 산책하며 둘렀던 짙은 녹색 숄이 들어왔다.
“이거면 되겠다.”
얼른 소파 팔걸이에 걸린 숄을 집어 든 나는 자꾸만 실실 풀어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술식을 외웠다.
따악-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에리타.”
나긋한 부름과 함께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 보고 싶어 하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전하!”
사흘 만에 보는 그가 반가워, 나는 주위에 누가 있는가를 살필 정신도 없이 곧바로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칼리온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단단하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뛰어들면 다친다니까요.”
다정한 타박은 그 후에 찾아왔다.
그의 말은 분명 타박이었지만 내 기분은 여전히 좋았다.
“오늘처럼 이렇게 전하께서 받아 주실 거잖아요.”
“……허.”
“설마 안 받아 주실 건 아니죠? 아닐 거라고 믿어요.”
부러 새초롬한 목소리로 물으며 그의 가슴께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칼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사고뭉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보자 나도 모르게 꿍얼꿍얼 변명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던 걸 어떡해요. 저희 사흘 만에 봤잖아요. 좀 반가워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내가 먼저 보고 싶다고 했잖아.
물론 먼저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한 건 칼리온이지만…….
내가 보고 싶다고 안 했으면 보러 오겠다는 소리도 안 했을 거 아냐.
괜스레 서운해져 그의 시선을 피하며 툴툴거리자 머리 위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지금 한숨을 쉬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입술을 비죽거리며 다시 칼리온을 바라본 나는 그의 가라앉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가끔 그대가 짓궂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네?”
내가 짓궂긴 뭐가 짓궂다는 거야.
내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칼리온을 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촉-
짙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이마 위에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붙잡고, 이번에는 이마가 아닌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은 짧게 맞닿았다 떨어졌지만, 한번 가까워진 그의 얼굴은 아주 조금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내 얼굴이 화다닥 달아올랐다.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칼리온이 옅은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에 가볍게 이마를 기댔다.
“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보러 가지 못해 미안해요.”
뽀뽀로 내 정신을 온통 빼놓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다냐? 다냐고!
‘……다네.’
꽁했던 마음은 사르르 녹는 것으로도 모자라 화르륵 불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히 성공한 미남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튼 어쩜 저렇게 잘난 얼굴을 적재적소에 써먹는지 모르겠어.
“……됐어요. 바쁘신 거 다 아는데 그냥 투정 한번 부려 본 거예요.”
그 미남계에 홀딱 넘어가 버린 나는 아주 관대해진 마음으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황제를 재워 둔 현 상황에서 칼리온은 제국의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었다.
“……이 살면 좋겠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나는 칼리온의 말을 놓쳤다.
“뭘 하면 좋겠다구요?”
눈을 깜빡거리며 되묻자 칼리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살짝 부끄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내 눈을 곧게 바라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대와 같은 곳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 하루의 시작과 끝에 그대가 존재하기를 늘 바라고 있습니다.”
“……저랑 같이 살고 싶으시다고요?”
내 올라간 말꼬리에 칼리온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한 달 동안 매일 그대를 보다 보니 거기에 적응이 됐나 봅니다……. 오늘 이렇게 그대를 봤으니 내일도 보지 않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무슨 이런 사랑스러운 남자가 다 있지.
칼리온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매일같이 나를 보는 게 좋아서, 그래서 나와 같은 곳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
오늘 나를 보았으니 내일도 나를 보고 싶다고, 그렇게 덤덤하고도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칼리온 루인 엘베르.
“물론 당장은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불가능하겠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면 잠시 황궁에 와서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낮게 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쩐지 신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제 어머니가 쓰시던 궁은 지금 시기에 가장 예쁘거든요. 예전부터 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음, 혹시 황궁이 마음에 안 들면 제가 대공저로 가서 지내는 방법도…….”
나는 칼리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대신 뒤꿈치를 살짝 올려 아까 전 칼리온이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초옥-
조금 길게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눈을 떠 바라본 칼리온은 당황한 듯이 굳어 있었다.
자기가 할 때는 능글맞게 잘도 하더니.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하면 누군가는 내가 유난이라고 할 테지.
“전하.”
“……네, 에리타.”
내 부름에 칼리온이 목을 긁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내 허리를 감싼 그의 손에는 조금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방금 그의 것에 닿았던 내 입술을 바라보는 칼리온의 눈빛은 굉장히 짙고 어두웠다.
나는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더 뒤꿈치를 들었다.
어여쁜 말을 쏟아 내던 그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나는 연달아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그의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은 상태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전하.”
내 말이 끝난 후, 일순 그의 얼굴이 멍해졌다.
좋아한다는 말은 종종 주고받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나와 같은 곳에 살고 싶다는 칼리온의 말은 그 내용만 놓고 보자면 연인 사이에 하기에 그다지 특별한 말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칼리온이 얼마나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는지 너무도 잘 아는 나에게 그 말은 그가 어여쁘게도 포장해 건넨 사랑 고백으로 와닿았다.
그랬기에 그 다정한 사랑을 돌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칼리온.”
나는 그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내 고백을 들은 칼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요동쳤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모습은 마치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처음 그를 좋아하노라 고백했을 때도 이랬었는데.
‘여러 의미로 변함이 없는 사람이라니까.’
의도하지 않은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러니까 저 되게 민망해요.”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툭, 맞대며 속삭이자 칼리온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찬찬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는 항상 제가 현실에 감사하도록 만듭니다.”
“제가요?”
간지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눈가를 찡긋거리며 묻자 그가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사랑합니다, 에리타.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우리의 고백은 유려한 미사여구를 덧붙인 시적인 고백도 아니었고, 거창한 이벤트도 없었다.
그저 커지고 커져서 더는 마음속에 홀로 담아 둘 수 없게 되어 버린, 건네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진 감정의 토로였다.
나는 그가 다시금 되돌려준 사랑을 온몸에 두르고 행복하게 웃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그의 물음은 더없이 정중했고, 더없이 간지러웠다.
“……당연하죠.”
아주 느릿하게 가까워지는 칼리온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맞닿았다.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여러 번 닿았다 떨어진 칼리온의 입술이 이번에는 길게 맞물렸다.
말캉한 살덩이가 어색하게 굳어 있는 내 입술을 간지럽게 문질렀다.
꾸욱-
난생처음 겪어 보는 감각에 나는 칼리온의 목을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어쩐지 맞닿은 칼리온의 입술 끄트머리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가 맞닿은 입술을 아주 살짝 떼어내고 낮게 속삭였다.
“입술, 벌려 주세요.”
조금 전의 부드러운 입맞춤에 멍해진 내가 잠시 숨만 쌕쌕 내쉬고 있자 칼리온이 재촉하듯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
그의 부탁과 그를 종용하는 몸짓에 다물려 있던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또다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한 번 더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천천히 침범한 온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굳어 있는 내 혀를 느릿하게 얽어 왔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이, 그리고 자신도 떨린다는 듯이.
서툴지는 않지만 능숙하지도 않은 움직임은 조급하지 않았다.
그 느릿한 입맞춤이 우리의 첫 키스였다.
첫 키스는 더없이 부드러웠고, 더없이 다정했으며, 더없이 따뜻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많았지만, 언젠가 그 일들이 전부 마무리가 된다면…….
‘……그때는 같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다정한 입맞춤 사이에서 그려 본,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미래는 더 이상 암울하지도 않았고 걱정되지도 않았다.
그저 내일이 되면 사랑한다는 고백마저 내가 선수를 쳤다고 칼리온이 또 속상해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하고 일상적인 고민만이 존재했다.
우리가 바꾼 현재이자 우리가 살아갈 미래.
나는 그 출발선을 휘영청 뜬 달이 어여쁜 오늘로 정했다.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