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19화(19/218)
통신구의 빛이 잦아들었다.
“아슬란, 이 건방진 놈이…….”
스산한 황제의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시종이 몸을 흠칫 떨었다.
“전부 나가라. 당장!”
이어진 황제의 축객령에 자리를 피하게 된 게 다행이라 여길 정도로 지금 황제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온화한 황제를 연기한다고 해도, 본래의 성정은 쉬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는 그대로 그의 심사는 상당히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무가치한 것을 보는 듯했던 그 시선!
거진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분노가 일 정도로 건방지고 무심한 태도는 여전했다.
황제는 언제나 귀족들이 제 발밑에 조아리길 바랐다.
그 1순위에는 늘 저보다 뛰어난 대공, 아슬란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황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
그게 크로바하츠가의 힘이자 공공연한 제국의 최강자인 아슬란의 힘이었다.
제가 황제가 아니고 아슬란이 대공일 적부터 가져 왔던 열등감.
지고한 자리에 올랐지만 추악한 열등감은 그 크기를 키웠을 뿐이었다.
그런 놈이 아내와 딸을 잃더니 수도에는 발도 들이지 않아서 얼마나 흡족했던가.
“……그런데 그 딸이 죽은 게 아니었다니.”
7년 전에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거늘.
황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요 며칠 전부터 황궁 안을 맴돌던 이상한 공기.
때마침 들려온 거슬리는 소식이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꼭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몰려들었다.
***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온실 안에서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식과 아첨, 그리고 칼을 숨긴 말들이 오고 가는 곳.
사교계의 축소판인 티타임이었다.
“요즘 정성을 들이신다던 온실에 이리 초대까지 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장미가 우아하게 흐드러진 게 꼭 황후 폐하를 보는 것 같네요.”
그 입에 발린 말들에 황후는 흡족하게 웃으며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붉디붉은 입술에 닿았던 찻잔이 작게 달칵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대들의 눈에도 그리 보인다니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군요.”
고혹적인 입매가 휘어지는 모습이 천박하기는커녕 고아하기만 했다.
간단한 이야기로 시작한 티파티의 화제는 시간이 갈수록 적나라한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
“앙투안 백작 부인의 정부가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어머, 저도 들었답니다. 이번에는 열다섯 살이나 어린 남작이라고 하던데…….”
부채로 입가를 가린 귀부인들이 고상하게 웃으며 남을 헐뜯었다.
본디 사교계에서는 비밀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한층 더 저급했다.
“이번에 델타 자작가에서 루비 광산을 발견했다지요? 그것도 아주 상등품이라 황실에 진상할 정도라고 하던데.”
“어머,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 가장 먼저 보실 수도 있겠군요.”
간간이 가식이 듬뿍 담긴 아첨이 흘러나왔지만, 황후는 그때마다 눈꼬리만 휘어 웃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황후는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경멸하는 쪽에 가까웠다.
귀족의 품위는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경박하게 입을 놀리는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들만큼 사교계에서 소문이 빠른 사람들이 없었기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혐오감이 들긴 했으나 불가피한 일이었다.
‘……천박하기는.’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매만지던 황후는 부채 뒤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조소했다.
그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다들 그 소문 들으셨나요?”
“어떤 소문을 말하는 거지요?”
들려오는 말이 한두 개도 아니고. 다른 귀부인들의 반응에 가장 먼저 입을 열었던 부인이 이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로바하츠의 대공녀가 돌아왔다는 소식 말이에요.”
“세상에나. 저는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죽은 게 아니라 지금껏 고아원에서 자라고 있었다나 봐요.”
어머, 세상에. 귀부인들이 저마다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다들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귀족도 아니고 무려 제국에 하나뿐인 대공이 아닌가.
적어도 지금 수도에 있는 귀족 중 7년 전 사고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 사고에서 대공비가 사망하고 대공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 역시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종되어 죽은 줄 알았던 대공녀가 지금까지 고아원에 있었다니.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흥분한 귀부인들의 말이 빨라졌다.
“대공녀가 고아원에 있었다니.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니까요. 게다가 대공녀가 있던 곳이 황도에서 말로 달려도 삼 주가 넘는 곳이라더라고요.”
“세상에. 어쩌다 그렇게 멀리까지 갔대요?”
그 주제에 푹 빠진 귀부인들이 하나둘씩 지금껏 들은 이야기들을 꺼내 들었다.
처음 물꼬를 트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트인 물길은 그 몸을 사릴 줄을 몰랐다.
“그걸 두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가 봐요.”
“네?”
“사고 당시에 젖먹이였던 대공녀가 동부 끝 쪽에 있는 고아원에서 발견된 게 조금 정상적인 일은 아니잖아요?”
“흐음. 그건 그렇죠.”
그중 한 부인이 꺼낸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음모와 수작질이 판치는 사교계에서 이런 사건은 늘 재미난 이야깃거리였으니까.
그런 그들이 제대로 건수를 잡아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말이…….”
“여봐라.”
고아한 황후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을 끊고 들어왔다.
“부인들의 차가 식은 것 같구나. 새로 내오렴.”
황후의 말에 뒤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하녀들이 식어 버린 찻잔을 교체했다.
잠시의 시간 후, 모든 귀부인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놓였다.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끊었군요. 이 차는 식기 전에 마셔야 그 진가가 드러나거든요.”
“어머, 그런가요?”
그 자연스러운 흐름에 이들의 신경은 다시 차로 쏠렸다.
저마다 차를 홀짝이더니 향과 맛을 두고 아첨이 묻은 수다를 시작했다.
어느새 주제가 바뀌어 있다는 사실은 딱히 그들이 신경 쓰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몰랐다.
“아아악!”
“황후 폐하!”
“나가! 전부 나가란 말이다!”
티타임을 마치고 돌아간 황후의 눈이 분노와 감출 수 없는 불안으로 번들거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쨍그랑-!
유명한 장인이 만든 도자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고 값비싼 보석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다.
방금 저속한 귀부인들의 입에서 나온 그 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외국의 귀족과 함께 바다로 빠졌다던 계집애가 왜!
“아아악!”
그렇게 한참 동안 감정을 쏟아 낸 황후는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침대 앞에 허물어졌다.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실크 이불조차 지금은 전부 찢어 버리고 싶었다.
있을 리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제 가문의 수장인 아비가 보낸 서신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용하기 위해 고아원에 맡겼던 크로바하츠의 계집이 입양된 게 맞는다고.
그 서신을 본 후 치미는 분노를 막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외국의 귀족이 데리고 갔다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막았다가는 외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은 어그러졌을지언정 크로바하츠의 계집이 죽어 후환이 사라졌으니까.
혹시나 해 추적도 해 보았지만 이상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 후 대공가의 움직임 역시 평소와 같았기에 공교롭게도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했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1년만, 딱 1년만 더 기다리면 그게 완성되었을 텐데.
그 전에 죽은 것도 아니고, 대공의 손에 들어가다니!
‘꼬리는 자르라 지시해 두었으니 대공이 사실을 알 방도는 없다. 그러니 이 불안은 기우일 것이야.’
황후는 밀려드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따각, 딱-
곱게 손질된 손톱이 엉망으로 변해 피가 흘렀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후는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그간 잊고 지냈던 7년 전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때 죽였어야 했다.
그 계집애가 대공가의 검은 머리를 타고났든 어쨌든 그냥 죽였어야 했단 말이다.
오래된 미신 따위를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황후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의 피에 흐른다는 마족의 피가 어쩐지 꺼림칙해 살려 두고 이용하려 했던 과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 저주가 실존한다면 분명 지금 이 상황이 저주일 것이다.
부릅뜬 눈에는 이제 핏발이 죽죽 서기 시작했다.
‘그래. 세르비아 그년이 죽은 것도 벌써 7년 전이다. ……절대 알 수 없어.’
계집애를 찾았다고는 해도 꼬리를 모두 잘랐으니 진실은 모를 것이다.
“그래. 크로바하츠라도 모를 것이야.”
산발이 된 머리 사이로 보이는 황후의 얼굴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황후는 애써 밀려드는 불안감을 무시하며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알아채기 전에 끝내면 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황후의 눈에 얼핏 광기가 스쳤다.
공기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불길한 무언가를 느낀 양.
***
살아 있는 자 특유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방.
느릿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침대 위에는 윤기를 잃은 은색 머리칼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누가 보아도 병색이 완연한 얼굴은, 죽음을 목전에 둔 병자의 그것이었다.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여인의 시선이 조금 떨어져 있던 아이에게서 멈춰 섰다.
“칼리온, 잠시, 이리 가까이…….”
아이는 어미의 손짓을 따라 제 귓가를 어미의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거렸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하게 이어지는 그 소리는 너무도 작아,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말을 마친 여인은 애써 눈물을 참는 아이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금세 끝나고.
툭-
아이의 가느다란 은발을 쓰다듬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숨소리.
그 모습에 아이의 옅은 벽안이 잘게 떨렸다.
미약하게 이어지던 숨마저 멈춘 그 시간.
“어머니, 가지 마세요…….”
아이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갔고, 죽음 역시 그러했다.
“황비마마께서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1년 후, 원작이 또 한 번 뒤틀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