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9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4화(192/218)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미동도 없던 황제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초점이 흐린 동공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크로바하츠 공녀.”
듣기 싫게 갈라진 황제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니, 불렀다기보다는 저 스스로 내 존재를 확인하려 내어 본 소리 같았다.
깨어난 황제를 보자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 들어, 나는 지체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페른은 그런 내 옆을 든든히 지켰다.
“본인이 누구신지 기억하세요?”
황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에 당하셨을 때의 기억은 있으시고요?”
수척한 낯으로 피로를 감추지 못한 황제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이군요.”
“그러게요. 저번에 깨셨을 때 워낙 정신이 불안정해서 걱정 좀 했는데.”
며칠 전, 황제는 한 번 제정신을 차렸었다.
고작 몇 분에 불과했지만.
하여튼 그때 황제의 상태가 워낙 불안정했기에 깨어나서도 백치가 되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했는데, 지금 꼴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흑마법에 걸렸던 당시의 일도 모두 기억하는 모양이고.
“폐황후의 난이 있고 닷새가 지났어요. 그리고 또 닷새 후에는 폐황후와 그 일당의 재판이 있을 예정이고.”
“잠시……. 폐황후라고?”
황제가 거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게 친절하게 대하고픈 마음은 없었으므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하 옥사에 갇힘과 동시에 황후 자리에서 폐해졌어요.”
“……누가 그리했는가.”
“황자 전하 두 분이 함께요. 제 가문을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들도 그에 동의했고요.”
내 대답에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던 황제의 시선이 내게로 와 닿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눈.
“……테시스가 제 어미를 폐하는 데에 찬성했다고? 그것도 칼리온과 함께?”
황제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믿기 힘든 사실을 들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테시스가 칼리온의 편에 섰다는 걸 들었을 때는 나조차 얼이 빠졌으니까.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퍽 서운하기도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사이를 아는 모든 이들이 놀란 일이었으니 칼리온과 테시스의 싸움을 장려하고 부추긴 장본인은 더 경악스럽겠지.
‘……생각하니까 또 짜증 나네.’
이런 인간이 안쓰럽긴 무슨.
나는 황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무미건조하게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현재 폐하는 독에 당했던 후유증과 충격으로 앓아누우신 상태라고 알려져 있어요. 제국의 황제께서 흑마법에 정신이 지배됐다고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렇군.”
“그리고 아마 폐하 스스로도 어렴풋이 알고 계시겠지만, 수명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어요.”
내 말에 황제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내 예상대로 본인의 몸 상태를 이미 알아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몸속 깊은 곳까지 흑마법에 잠식되어 있던 상태였다. 지금 그가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건 나와 페른이 정교하게 짜 올린 마력이 그의 뇌와 심장을 감싸고 있는 덕이었다.
파훼법의 일부를 알고 있던 칼리온의 경우와 달리 이 경우는 완전한 파훼가 불가했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육 개월을 넘기기 힘들어요. 확신해 드릴 수 있는 건 삼 개월이고요.”
담담한 내 말에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검게 죽어 가는 수척한 사내에게서는 내가 이전에 보아 알고 있던 오만하고 꼴불견이던 황제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살려 내라고 발악하며 협박을 하거나 제 처지를 부정하며 귀찮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흑마법에 잠식되어 있던 동안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건가.
어찌 되었든 예상보다 수월한 상황에 건조한 안도를 표하며 나는 앞으로의 일정을 읊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폐하의 상태를 보러 올 거예요. 드리는 약은 너무 고통스러울 때만 드세요. 너무 자주 드시면 내성이 생겨서 효과가 없어지니까.”
“고통이라…….”
“흑마법을 완전히 파훼한 게 아니기 때문에 종종 심한 두통에 시달리실 수 있어요.”
내 말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황제가 느릿하게 물어 왔다.
“일상생활은 가능한 정도의 고통인가?”
그 물음을 들은 나는 잠시 멈칫했다.
황제가 겪을 고통보다 수배는 더 거세고 끔찍한 고통을 몇 년간 묵묵히 견뎌 낸 이가 떠오른 탓이었다.
일상생활. 당연히 가능하지.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을 거예요. 대부분은 막아 뒀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칼리온이 겪은 고통이 당신이 겪을 고통보다 몇 배는 더 심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은 앞에 있는 황제도 막 흑마법에서 깨어난 환자였다.
그리고 칼리온과 황제 사이의 일은 칼리온이 해결하게 두는 게 옳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내가 끼어드는 건 과한 오지랖이니.
“제가 말씀드릴 건 여기까지예요. 정세에 관한 이야기는 저보다 아버지와 이 황자 전하께 들으시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황제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렇군, 이라는 짧은 대답을 하고.
“……회의가 끝난 모양이군요.”
페른이 문을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들어오며 쳐 두었던 결계에 반응이 온 모양이었다.
페른이 기척을 느낀 걸음 빠른 이들은 금세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똑똑-
“끝났어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큰 소리로 외쳐 답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황자의 정복을 갖춰 입은 칼리온이었다.
“에리타.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옅은 웃음을 띠었던 그의 얼굴이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황제를 보고는 차게 굳었다.
“깨셨군요.”
“폐하를 뵙습니다.”
칼리온의 뒤를 이어 아버지와 에일런이 들어오며 황제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춘 성의 없는 인사를 건넸다.
세 사람의 등장에 나는 대충 손을 휘저어 쓰임을 다하고 깨져 버린 마력석을 한데로 모아 가루로 만들었다.
달칵-
그러고는 살짝 연 창문 틈으로 날려 보냈다.
마력석의 잔해는 식물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니까.
뒷정리를 마친 나는 마력석을 담아 왔던 가방까지 아공간에 넣은 후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세 사람의 앞으로 다가갔다.
“에…….”
“에리타, 아가. 몸은 괜찮은 게야?”
“힘들지는 않았고?”
다가선 나를 보고 웃으며 입을 연 칼리온의 말은 득달같이 끼어들어 먼저 소리를 낸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막혔다.
‘……어우, 진짜!’
민망함에 입술을 꾹 깨문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어이없어하던 칼리온은 이내 얼굴에 민망하다는 표정을 달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그 미소에 귓가가 불긋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물론 우리가 달콤한 행동을 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은 이번에도 훼방을 놓았다.
“흠흠,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먼저 집에 돌아가 있어도 괜찮단다.”
“그래, 에리타. 무리했으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같이 집에 갈까?”
……진짜 어이없어.
나는 두 사람을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필요한 설명은 전부 해 드렸고, 상황에 대한 건 정확히 말씀 안 드렸어요.”
“……그래,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더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의 아버지가 먼저 황제가 누운 침대로 걸어가고, 줄이음칼리온은 내 옆을 지키듯이 선 에일런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젓고는 내게 살풋 웃으며 말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나는 그런 칼리온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으응, 아녜요.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얘기 끝내고 나오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칼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나는 느릿하게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같이 가자.”
그리 말하며 내 곁으로 다가선 건 에일런이었다.
“오라버니는 안 남아?”
“나야 뭐, 할 얘기가 없으니까.”
“……하긴.”
아버지와 칼리온을 제외하고 우리 중에 황제와 개인적으로 대화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근데 테인은?”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간다던데.”
“……진짜?”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늑대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나와 에일런, 그리고 페른은 아버지와 칼리온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탁-
문을 닫고 나선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같이 걸음을 옮겨 작은 궁을 나섰다.
생의 끝을 받아 둔 자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질척한 공기가 맴돌던 궁을 빠져나오자 상쾌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어으, 피곤해라…….”
햇빛을 보더니 눈을 팍 찡그린 페른은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하품을 쩍 했다.
몇 시간 전 이런 고위 술식을 전개할 수 있는 건 마법사에게 행운이나 다름없다며 신나 하던 것에 비하자면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채소 같은 얼굴이랄까.
“페른, 갑자기 한 십 년쯤 나이를 더 먹은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페른의 얼굴이 구겨지고, 그걸 본 에일런이 픽 웃었다.
“나 참. 저도 어디 가면 이십 대로 보는 얼굴입니다만?”
“뭐, 그렇다고 해요. 지금은 아닐 것 같지만.”
“……하.”
장난스러운 말에 한숨을 내쉰 페른은 슬쩍 몸을 돌리더니 제 스태프에 박힌 보석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 보았다.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 페른도 나이가 꽤 있지.
“페른.”
“왜 부르십니까.”
약간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까는 완전 어른 같더니, 지금은 또 철딱서니 없는 마법사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