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9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5화(193/218)
에리타와 에일런, 페른이 방을 나서고,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꼴이 우습군.”
그 정적을 깬 건 아슬란의 말이었다.
무감한 어조를 낸 아슬란이 황제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칼리온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을 줄은 몰랐는데.”
황제의 거칠고 메마른 중얼거림에 아슬란이 픽 조소했다.
“아비라는 사람이 아들을 사지로 내모는데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그렇군.”
평소라면 아슬란의 짧은 말에 역정을 냈을 황제였으나, 지금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죽다 살아나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지.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만.’
아슬란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는 칼리온을 흘긋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딸아이가 폐하를 살려 낸 건 황자 전하의 계승 절차를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아이가 마음이 여려 그 말을 했을지 모르겠어 말하는 것이니 고깝게 듣지 마시길. 다른 마음 먹지도 마시고.”
아슬란이 그리 말하자 황제가 몸을 움찔했다가 느릿하게 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래. 대공녀와 칼리온 네가 연인 사이라지.”
황제의 말에 칼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폐하께서 신경 쓰실 바가 아닙니다. 대공녀는 폐하를 살린 은인이자 나를 살린 은인이니 사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의 서늘한 어조가 병상에 누운 제 아비를 향했다.
칼리온은 황제를 믿지 않았다.
지금이야 저리 상황에 순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저게 꾸며 낸 모습이 아닐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짐을 믿지 못하는구나.”
황제가 나직하고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칼리온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가 어떻게 황제를 믿는단 말인가. 황제는 그의 모친이 황후의 괴롭힘으로 죽어 갈 때도 외면했고, 황후가 그를 사지인 전쟁터로 몰 때도 외면했다.
제 권력이 양분될까 싶어 제 자식까지 경계한 사람이 황제였다.
“다시는 믿음 운운하지 마십시오. 역겨우니.”
황제의 앞에서 이를 드러내지 않았던 이전까지와 달리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제 입지를 공고히 한 칼리온이 냉소하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그런 칼리온의 앞에서 황제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침묵했다.
이어 아슬란이 말했다.
“폐황후는 공개 처형을 당할 겁니다. 재판은 아직이지만 죄질을 보면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요.”
“……대공.”
“폐황후는 내 아내를 죽이고 내 딸을 고아원에 처박았습니다. 게다가 선황비의 목숨까지 앗아 갔고.”
아직도 죽어 가던 세르비아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피죽도 못 먹은 모습으로 잔뜩 겁먹고 주눅 들어 있던 에리타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폐하께서 그 사실에 대해 아예 몰랐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평소 나를 그리도 견제하셨으니 폐황후의 짓거리를 알고도 무시하셨겠지요.”
아슬란의 냉소에 황제는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폐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건, 폐하의 그 비루한 목숨을 내 딸이 살렸고 그게 내 하나뿐인 제자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마친 아슬란은 황제에게서 몸을 돌렸다.
“얘기하고 나오너라.”
“……예, 스승님.”
답지 않게 다정한 어조로 칼리온의 어깨를 두드린 아슬란이 저벅저벅 걸어 문밖으로 나갔다.
탁-
날카로운 소리를 낸 문이 닫히고.
“대공이 네 스승이더냐?”
침묵하던 황제가 느릿한 목소리로 칼리온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칼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사담은 나누기 싫다는 양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침대 위에 놓았다.
“폐황후의 일에 가담한 자들의 명단입니다. 그중 깊게 관여한 자들은 그 가문의 크기가 어떻든 전부 쳐 낼 예정입니다.”
황제는 움푹 꺼진 눈으로 제 옆에 놓인 서류를 쳐다보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없어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서류였다.
거기에는 칼리온이 말했던 대로 폐황후에게 가담했던 귀족들의 명단과 그들이 저질러 온 죄가 적혀 있었다.
천천히 그것들을 읽어 내리던 황제의 눈이 일순 요동쳤다.
“뷔델 후작가, 아센 백작가, 루바논 백작가…….”
거칠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몇몇 가문들을 되짚었다.
황제의 시선이 다시금 칼리온을 향했다.
“이들은 중립파가 아니더냐.”
“중립파에 폐황후와 레노센이 심어 둔 이가 없을 줄 아셨습니까.”
칼리온의 힐난에 황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황제라는 자리가 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하기보단 그 자리에서 나오는 권력을 탐했다.
그러니 어디 정무에 대해 빠삭하게 알 수가 있나. 그럴 능력도 없었고.
“황태자 즉위식은 현재 제국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아 두 달쯤 뒤로 미룰 겁니다. 죽어 가시는 와중에도 저를 견제하겠답시고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네 스스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겠다고.”
“아니요. 당연히 폐하께서 저를 황태자로 임명하시는 겁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폐하를 살린 이유는 그것뿐이니.”
에리타가 애를 써서 황제를 살린 건 오로지 칼리온을 위해서였다.
그가 조금 더 적법하게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 또한 잡음 없이 황위를 승계받았으면 해서.
작은 뒷말 하나라도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황제가 직접 칼리온을 황태자로 임명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에도 칼리온 스스로 황태자 자리에 오를 힘은 있었다. 그에 반대할 폐황후의 세력들은 흑마법이 수도를 덮쳤던 그날 이후로 와해되었다.
새로이 그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어야 했을 테시스가 칼리온에게 먼저 숙이고 들어간 탓에 남은 잔당조차 제대로 뭉치지 못했다.
아비와 아들 사이에 나누기에는 지나치리만큼 차가운 말 후로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황제였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
그 물음에 칼리온이 멈칫했다.
아무것도.
칼리온은 그 물음의 숨겨진 의미가 뭔지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으니 묻지 않는 겁니다.”
예상치 못한 답인 듯, 황제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폐하께 궁금한 것도, 답을 들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만한 관심이 없으니까요.”
“……칼리온.”
“어릴 때는 궁금도 했고 폐하를 원망도 했습니다. 우습게도 관심을 바라기도 했고.”
“…….”
“그러나 지금은 원망조차 하지 않습니다. 내 어머니의 죽음을 이유로 당신을 원망하는 건 어머니가 원하시는 바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마친 칼리온은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쉬십시오.” 하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그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
“……랑했다.”
거칠고 꽉 막힌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진정으로 아실라를 사랑했어…….”
문고리를 쥔 칼리온의 손은 미동이 없었다.
그가 입을 연 건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머니께 폐하는 그저 가해자였습니다. 감정이 있었다면 오직 증오뿐이었겠죠.”
두 마디의 말을 남긴 칼리온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
“아니, 갑자기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통금이에요!”
내 놀란 외침에 아버지가 슬그머니 딴청을 피우며 핑계를 댔다.
“요즘 수도에 범죄자가 많아졌다더구나. 밤은 위험하지 않니.”
“……저 그렇게 허술하지 않거든요?”
명색이 최연소 최상급 마법사인데!
“그래도 위험한 건 여전하니까. ……정 그러면 전하를 우리 저택에 초대하는 건 어때?”
이번에는 에일런이었다.
나는 아주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내 안위에 대한 걱정이라고 서술하고 칼리온과 내 연애를 방해하려는 수작이라고 읽는 행동은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고 시작되었다.
이제 뭘 할 거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나는 칼리온과 있다가 갈 거라고 말하자 그 후로 저 말도 안 되는 통금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저 성인이에요!”
“……그건 우리도 알지.”
“그럼 통금이 말도 안 된다는 거 아시겠죠?”
아니, 통금이라고 말한 시간이 밤 열두 시 뭐 이랬으면 어이없지라도 않지.
“도대체 다섯 시가 무슨 밤이에요, 진짜.”
성인에 최상급 마법사인 나한테 위험을 들먹이며 꺼낸 통금이 다섯 시라니.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집을 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내 강경한 반발에 아버지와 에일런은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로 본인들의 말을 철회했다.
그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온이 나왔다.
“전하!”
나는 후다닥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걸어오는 분위기에서 칼리온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칼리온은 자신을 살피는 나를 바라보며 평소와 같은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와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맑아,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칼리온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그리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게 더 슬프게 느껴졌다.
“……잘하셨어요.”
나는 별다른 위로의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저 칼리온을 꼭 안아 주었다.
그러자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칭찬해 주는 겁니까?”
“음, 그건 아니구요. ……그냥 애인을 향한 그리움의 포옹?”
내 말에 칼리온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커흠!”
못마땅하다는 듯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아주, 매우, 몹시 불편하다는 얼굴을 한 아버지와 에일런이 보였다.
그러게 먼저 가시라니까 괜히 남아서는…….
그러나 칼리온을 (내 상대로) 이토록 못마땅해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아버지와 에일런이 칼리온을 내 연인으로 인정하게 되는 건 의외로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