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9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9화(197/218)
폐황후와 그 세력의 재판은 고요히 치러졌다.
그러나 폐황후의 사형일이 밖으로 번져 나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공개 처형으로 바꿔라!”
“옳소! 그 여자가 죽인 이들의 넋을 기릴 수 있도록 공개 처형으로 바꾸어라!”
폐황후의 사형일이 정해진 뒤의 황궁 앞에는 목이 터져라 공개 처형을 외쳐 대는 이들이 가득했다.
폐황후가 지금껏 저질러 왔던 패악을 알게 된 민중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느 날 사라진 내 아이, 내 가족이 흑마법의 제물로 바쳐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서린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
흑마법의 잔혹성에 분노하는 사람.
과거 흑마법의 끔찍함을 겪어 본 이의 후손.
수많은 사람이 폐황후의 공개 처형을 주장했다.
그 시위 아닌 시위 끝에, 폐황후 아이샤 레노센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돌팔매질을 당하고 참수형에 처해진 폐황후의 목은 사흘 동안 성벽에 매달려 있었다.
뒤를 이어 사형이 구형된 귀족들이 줄줄이 참형에 처해졌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야 제국에는 슬픈 고요가 흘렀다.
추모의 주간이었다.
“……그곳에서는 평안하길.”
나는 흠 하나 없는 깨끗한 국화를 국화 더미 위에 놓아두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나와 같이 온 칼리온 역시 똑같은 꽃을 분수대 위에 놓고 명복을 빌었다.
폐황후의 처형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수도 광장의 중앙 분수대에는 국화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흑마법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누군가의 행동으로 시작되어 지금은 수도 전체가 동참하는 일이었다.
황궁과 귀족들 역시 그에 참여했다.
오늘은 광장 중앙에서 정식으로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그 마지막 날이었고.
나와 칼리온은 잠시 분수대를 둘러보다가 느릿하게 인파 사이를 빠져나왔다.
칼리온은 짙은 갈색 머리를, 나는 밀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광장 중앙을 벗어나자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쌉니다, 싸요!”
“우리 가게 원단만큼 좋은 천 없어! 오늘은 내가 특별히 반값에 줄게. 어때?”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커다란 슬픔과 경악이 제국을 덮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힘껏 살아갔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희생된 이를 기리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다가온 하루를 살아갔다.
그건 나와 칼리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며칠 전보다는 확실히 분위기가 좀 살아난 것 같네요.”
“아무래도요. 언제까지나 우울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 힘들더라도 마음에 묻어 두는 거겠죠.”
나는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특별하게 정해 둔 목적지 없이 그저 발 닿는 대로 걷는 중이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건 오랜만인 것 같네.’
내 연인은 제국의 황자였고 현재는 황제 대리로 정무를 봤다.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니 이렇게 마음까지 여유로운 데이트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맞잡은 그의 손을 꾹꾹 쥐어 보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꼭 나를 귀여워하듯이 웃는 칼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즉위식 날짜는 아직 정확히 안 정해진 거죠?”
어쩐지 거센 민망함이 몰려와 나는 큼, 헛기침을 하고는 냅다 질문을 던졌다.
그런 나를 보며 나직하게 웃은 칼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은 한 달쯤 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곧 나올 거고. 아마 해가 넘어가는 날쯤이 될 겁니다.”
길어 봐야 반년인 시한부 삶이었지만, 황제는 순조롭게 건강을 회복 중이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황제는 칼리온에게 황위를 넘기는 것에 대해 꽤 적극적이었다.
며칠 전 황제의 건강 체크를 위해 찾아간 나를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에 대해 칼리온에게 슬쩍 물어보았으나 그는 그저 가볍게 웃기만 할 뿐 별다른 설명을 해 주지는 않았다.
뭐, 황제의 마음을 칼리온이 어떻게 알겠냐 싶긴 하다마는.
“전……. 음. 칼리온.”
나는 평소처럼 칼리온을 부르려다가 현재 우리가 모습을 바꾼 상태라는 걸 자각하고는 항상 속으로만 부르던 그의 이름을 꺼냈다.
“네, 에리타.”
그러자 잠시 멈칫했던 칼리온이 환하게 웃으며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 답했다.
“저희 오늘 데이트하기로 했잖아요.”
나는 느리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칼리온이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주 애타게 기다린 날이죠.”
……나만큼 애타게 기다렸을라고.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으나 칼리온이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속으로 삼켰다.
그도 나만큼이나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말이 달콤하게 들리기도 했고.
“우리 데이트 가는 장소는 제가 정해도 돼요? 아직 예약한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조르듯이 제안했다.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난 탓이었다.
“음, 어딘지 알려 줄 생각은 없나 보군요.”
“흐흥, 이런 건 원래 서프라이즈로 해야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어쨌든 제가 가고 싶은 데로 가도 돼요?”
내 되물음에 칼리온은 내 이마에 입술을 꾹 찍고는 그럼요, 답했다.
아까에 이어 또 기습 뽀뽀를 당한 나는 볼에 불긋하게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칼리온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거리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스킨십을 하는 건 아직도 익숙지 않았다.
“……자꾸 이런 반칙 쓰실 거예요?”
“무슨 반칙이요.”
“미남계…….”
칼리온이 미남계를 써서 내게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냥 내 심장이 위험했다.
게다가 오늘은 평소 같은 은발도 아니고, 무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갈색 머리칼이라고.
이러다가 결혼해서도 맨날 심장이 떨리면 어떡하지.
‘……그럼 좋은 건가?’
나의 실없는 생각을 끊은 건 잘게 떨리는 칼리온의 가슴팍이었다.
“…….”
고개를 들어 올리자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칼리온이 보였다.
“……왜 웃으세요?”
내 물음에 소리를 죽여 웃던 칼리온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뭔데, 왜 웃는데.
내 지긋한 시선이 길어지자, 그제야 칼리온이 여전히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법 민망하긴 한데, 그대가 여전히 제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아 기뻐서요.”
그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무슨.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내가 칼리온의 얼굴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전하 얼굴만 좋아하는 사람 같잖아요.”
어버버하던 나는 간신히 그 말을 꺼냈다. 물론 칼리온의 얼굴을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칼리온이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뭐어, 처음 정체를 모르고 칼리온과 재회했을 때 아버지와 에일런의 얼굴에 단련된 내 눈에도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잘생겨 보이긴 했지만…….
“흠흠. 어쨌든요! 그런 기습 뽀뽀는 제 심장에 좋지 않으니 하루에 다섯 번 이하로 해 주세요.”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가 정말 안 하면 되레 내가 서운할 것 같으니.
그런 내 말에 칼리온은 또다시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
웃고 떠드느라 시간을 조금 지체한 우리는 내가 떠올린 곳으로 가기에 앞서 시장을 돌아다니며 점심으로 먹을 식사거리를 이것저것 샀다.
내 아공간에도 간식거리가 있긴 했으나 그냥 기분도 낼 겸 사탕과 초콜릿, 과일꼬치 여럿을 사자 어느새 손이 묵직해졌다.
“……음. 너무 많이 산 걸까요?”
“그대가 다 먹지 못하면 내가 먹을 테니 걱정 말아요.”
내가 눈가를 찡긋거리며 중얼거리자 칼리온이 그리 말했다.
하긴.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기초 대사량이 높아서 그런지 많이 먹더라.
아버지와 에일런, 그리고 칼리온 역시 우아한 식사 예절에 가려서 그렇지 먹는 양만 두고 보면 엄청난 대식가였다.
뭐, 그 정도는 먹어야 그렇게 훈련을 하고도 커다란 몸을 유지하겠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손에 쥔 묵직한 무게가 가볍게도 느껴졌다.
“좋아요. 그럼 이제 가 볼까요.”
나는 칼리온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굽이굽이 들어가자 어느새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 다다랐다.
“꽤 먼 곳인가 보군요.”
칼리온은 말하지 않아도 내 의도를 눈치챈 듯 빙긋 웃었다.
하여튼 눈치 진짜 빠르다니까.
“흠흠. 이제 눈 감아 주세요.”
“기대되네요.”
살짝 접혔던 칼리온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불쑥 올라왔다.
“절대 눈 뜨시면 안 돼요!”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칼리온에게 말했다.
그러자 칼리온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뜨지 않겠습니다.”
그의 다짐을 들은 후에야 나는 조심스레 뒤꿈치를 들고 끝이 살짝 올라간 그의 모양새 좋은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것만으로도 보지 않고도 맞닿은 칼리온의 입술이 더 깊숙한 호선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삼 초쯤, 입술을 꾹 눌렀다 떼어 내자 조금 전보다 더 부드럽게 웃고 있는 칼리온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대한 놀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