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9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11화(199/218)
이제는 익숙한 부유감이 몸을 감싸기를 잠시.
“…….”
칼리온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동 마법을 사용해 대공령에 올 때 도착하는 곳은 늘 같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 연무장.
“왔구나.”
그리고 보이는 무덤덤한 표정의 스승, 아슬란 크로바하츠.
“스승님.”
칼리온은 익숙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살가운 성격이 되지 못하는 두 사람은 고작 한마디씩을 내뱉고 곧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칼리온이 섬광같이 검을 뽑아 아슬란에게 달려들었다.
아슬란은 그 재빠른 공격을 고작 몸의 각도를 살짝 틀기만 해 가볍게 피했다.
“검로가 너무 정직해. 몸만 봐도 어디를 찌르고자 하는지 알겠구나.”
아슬란은 중간중간 칼리온의 흐트러진 자세를 지적하고 조언을 주었다.
훈련을 받기 시작하고 처음 반년은 오로지 기초를 배우는 데에 할애했다.
황궁에서도 황자로서 검술 수업을 듣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깊이가 얕았고, 그마저도 황비가 죽은 이후에는 열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생으로 바뀌었다.
칼리온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황후가 칼리온이 제대로 된 황자 수업을 받지 못하도록 손을 쓴 탓이었다.
“악!”
“항상 하반신을 신경 쓰라고 했을 텐데.”
아슬란의 목검에 허벅지를 가격당한 칼리온의 자세가 무너졌다. 찡그려진 표정에서 그의 고통을 엿볼 수 있었다.
아슬란의 검은 매서웠고, 가르침 역시 호되고 엄격했다.
그러나 최대한 빠르게 실력을 늘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장본인이 칼리온 자신이었으므로 칼리온은 고통을 삼키며 다시금 검을 치켜들었다.
“……다시 가겠습니다.”
아슬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칼리온이 땅을 박찼다.
앞으로 칼리온이 아슬란에게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이 년.
게다가 황제와 황후의 눈을 피해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다. 그 이상 자리를 비운다면 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
모친의 기일이 지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그런지 칼리온은 마음이 급했다.
“…….”
오늘따라 조급해 보이는 움직임을 아슬란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검 끝에서 조급함이 느껴져. 그리되면 검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한 번의 지적 후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검 끝이 흔들렸다.
“그만.”
아슬란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리고, 칼리온이 움직임을 멈췄다.
널찍한 지하 연무장에는 헉헉거리는 칼리온의 숨소리만이 울렸다.
아슬란은 평소보다 적게 움직였음에도 더 힘들어하는 칼리온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리군.’
그 역시 황비의 기일이 며칠 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일찍이 철이 들어 어른스럽다고는 하나 칼리온은 아직 고작 열셋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오늘 아침 헤실헤실 웃으며 이따 정원에 나가 꽃을 돌볼 거라 말하던 그의 딸아이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열셋.
아슬란은 아직 슬픔을 전부 떨쳐 내지 못한 아이를 배려하지 못할 정도로 몹쓸 어른이 아니었다.
“칼리온.”
“……예, 스승님.”
아슬란의 부름에 현재 제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는 칼리온이 반 박자 늦게 답했다.
칼리온의 얼굴에 얼핏 걱정이 스쳤다. 오늘 저의 상태가 좋지 않아 스승을 실망시켰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불쑥 든 탓이었다.
아슬란은 대공령을 다스리는 대공이었고 그렇기에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기껏 시간을 내어 자신을 가르치는데,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연발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오늘은 조금 쉬는 게 좋겠구나.”
이어진 아슬란의 말에 칼리온은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스승이 제게 실망했다.
칼리온은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서는 아슬란을 마주 보지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칼리온을 지나쳐 간 아슬란이 벽의 한 곳을 눌렀다.
“……!”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칼리온은 갑자기 잔디로 바뀐 제 발아래에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푸르른 호수와 녹빛 이파리를 마음껏 뽐내는 나무들이 보였다.
조금 전 그가 있던 지하 연무장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스승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칼리온이 의아하는 얼굴을 하고 저를 이리로 데려온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아슬란은 그런 칼리온에게 간단히 말했다.
“오늘 훈련은 휴식으로 대체한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하지만, 제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슬란의 말에 입술을 우물거리던 칼리온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훈련 도중에도 지적받았던 조급함이지만 칼리온은 요 며칠 신경 줄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년 후면 전쟁터로 가게 될 텐데, 그의 검술은 아직 스승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소대공인 에일런과도 승부조차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규격 외의 인물이라는 건 알지만 자꾸만 제 숨통을 조이려 드는 황제와 황후 탓에 칼리온은 마음을 편히 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런 정신머리로는 훈련해도 남는 게 없을 거다. 어차피 황궁에 가도 마음 편히 쉬기는 어려울 테니 여기서 쉬다 가거라.”
“……죄송합니다.”
딴에는 위로를 한다고 건넨 말이었는데 칼리온이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사과를 건네자 아슬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칼리온.”
“예, 스승님.”
“너는 충분히 내 가르침을 잘 따라오고 있다. 네 실력을 어떻게 키울까 하는 걱정은 스승인 내가 할 테니 너는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돼.”
“…….”
“나는 네가 전쟁터에 나가서도 죽지 않을 힘을 길러 줄 자신이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결국 너를 이해한다느니 많이 힘드냐느니 하는 다정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온에게 아슬란의 그 말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건 없었다.
믿고 따라갈 어른이 있다는 사실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던 모친을 잃은 그에게 가장 큰 위로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먼저 들어갈 테니 원하는 만큼 있다가 가려무나. 다른 이들은 잘 오지 않는 곳이니 마음 놓고 쉬기 좋겠지.”
그 말을 남긴 아슬란은 칼리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자리를 떠났다.
아슬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칼리온은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슬란이 사라진 방향에는 흐릿한 건물의 모양이 보였다.
“저게 대공성인가.”
대공성에 있는 이들은 전부 크로바하츠 대공가에 충성하는 이들뿐이지만, 아슬란은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생각해 지하 연무장에서 칼리온을 훈련시켰다.
그 덕에 칼리온이 대공성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아이도 여기 있을까.’
대공성을 본 칼리온의 생각이 일 년 전 이맘때쯤 만났던 한 여자아이에게로 미친 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며 투박한 고리 하나를 쥐여 주고 떠났던 검은 머리칼의 예쁘장한 여자아이.
그의 스승인 아슬란 크로바하츠의 딸, 에리타 크로바하츠.
칼리온은 종종 그 아이를 떠올리곤 했다.
고작 한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에리타가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던 탓일까, 칼리온은 쉬이 그 기억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싸늘한 이목구비의 스승은 종종 바보 같은 미소를 지을 때가 있었고, 칼리온은 그럴 때마다 스승이 흘리는 말에서 그 미소가 스승이 그의 딸을 떠올릴 때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헛생각이군.”
칼리온은 일 년 전보다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제 발아래에 놓여 있는 후드를 집어 들어 몸과 얼굴을 가렸다.
그의 스승은 다른 이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바로 궁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황궁은 숨이 막혔고, 이곳에서는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
결국 스승의 말대로 휴식을 취하다 가기로 마음먹은 칼리온은 천천히 제각각의 자태를 뽐내는 자연을 둘러보았다.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파랗게 물들 만큼이나 맑고 새파란 호수가 그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자박자박-
잠시 고민하던 칼리온은 느릿하게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퐁-
호수의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자그만 물고기가 헤엄을 치며 물방울을 퐁퐁 튀겼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깨끗한 호수 바닥에는 돌멩이처럼 보이는 색색의 물체가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모친도 황비궁 뒤편에 있는 자그만 연못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 넓지 않은 연못 안에 사는 물고기를 아꼈고, 칼리온과 함께 그 연못을 거닐기를 좋아했다.
“……어머니.”
칼리온은 모친의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불러 보았다.
지긋지긋한 황궁을 떠나셨으니 이제는 정말로 자유롭게 사시길.
그리 소망하며.
그때였다.
“아가씨, 아까는 정원에 가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응!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정원은 좀 그렇더라구. 거기는 떨어진 꽃잎 같은 건 정원사 아저씨가 다 치워 버리잖아.”
“으음…….”
저 멀리에서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칼리온은 빠르게 호수에서 멀어졌다.
그가 곧바로 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건, “그리고 꽃은 여기도 많으니까!”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어딘가 귀에 익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