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0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15화(203/218)
한 시간이 일 초처럼 흐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너무 잘 알겠다.
꾸물꾸물 통신구를 바라보자 나와 비슷한 아쉬움을 애써 갈무리하던 칼리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얼른 가서 식사해요. 이따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오늘 외숙부가 오신 첫날이라 빠질 수가 없네요.”
“아가씨?”
밍기적거리는 나를 재촉하듯 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따 연락할게요. ……좋은 하루 보내요, 칼리온.”
-……그대도요.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있을 만남을 잊은 것처럼 절절한 인사를 나누었다.
칼리온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통신구의 불빛이 꺼졌다.
“……벌써 다시 보고 싶다.”
고작 일 초 만에 그리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이 정도면 분리 불안 아냐?’
연애하면 원래 다 이런가?
나는 긴가민가하다가 급하게 빽, 소리친 메리의 부름에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아가…… 앗.”
문을 열고 나서자 울상을 하고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고 있던 메리와 마주쳤다.
나는 멋쩍게 하하 웃으며 슬쩍 방에서 빠져나와 문을 탁, 닫았다.
“미안, 메리. 잠깐 연락 좀 하느라고…….”
“전 아가씨가 잠드신 줄 알았어요.”
잠들긴 무슨. 잠자는 것보다 훨씬 좋은 시간을 보냈지.
나는 피실피실 새는 웃음을 꿀꺽 삼키며 메리의 옆으로 붙어 섰다.
“지금 내려가면 돼?”
“네에. ……근데 아가씨, 이 황자 전하랑 연락하신 거예요?”
“응? 아, 뭐……. 점심 먹기 전에 잠깐.”
내 대답에 메리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서렸다. 나를 대견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흐뭇해하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메리, 표정이 왜 그래?”
“네에? 제가 뭘요? 흠흠.”
이제 와서 표정 관리 해 봤자 난 이미 다 봤거든.
“방금 되게 다 큰 애 보는 보호자의 미소 뭐 그런 거였는데…….”
내 장난스러운 추궁에 못 이긴 메리가 후후 웃으며 사실을 실토했다.
“……뭐어. 요만하던 우리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크셔서 연애도 하시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죠.”
“……흠흠. 뭐어, 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
“후후. 제 눈에는 여전히 귀여우시지만요.”
나는 메리와 실없는 잡담을 하며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다.
에반이 야심 차게 준비한 새로운 메뉴는 대부분 성공했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건 코가 찡할 정도로 매운 향이 강한 생선튀김이었는데, 이국 향신료의 새콤한 맛과 조화가 끝내줬다.
물론 매운 걸 못 먹는 세 남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평화로운 수면에 파동이 인 건 조금 후였다.
“아, 저 이따가 칼, 아니, 전하 만나러 가려구요.”
“……어제도 만났잖니.”
“어제는 오랜만에 데이트한 거구, 오늘은 그냥 잠깐 보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자, 잠깐만. 지금 뭐라고……?”
별다른 생각 없이 칼리온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직 내 연애 소식을 알지 못했던 세이안이 기겁한 것이다.
……아.
조금 뒤늦게 그 사실을 상기한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세이안을 바라보았다.
거참. 또 이렇게 내 연애 사정을 고백하려니 괜스레 민망해졌다.
“음, 편지로 말하기가 좀 그래서 직접 보고 말하려고 했는데, 저 연애해요.”
볼을 문지르다가 멋쩍게 웃으며 칼리온과 연애한다는 사실을 말하자 세이안의 다정한 라일락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가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에일런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몇 초 후, 드디어 놀람을 갈무리한 세이안이 그럼에도 여전히 놀란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조금 놀라서 그만.”
“이해해요. 아버지랑 오라버니 반응보다는 백배 나은걸요.”
내 너스레에 세이안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고, 아버지와 에일런은 헛기침을 했다.
온 가족에게 알린 내 연애는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
점심을 먹은 후, 세이안은 그를 찾아온 보좌관의 손에 이끌려 후작저로 돌아갔다.
세이안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종이라고 착각했던 제이슨이라는 이름의 보좌관은 귀국하자마자 냅다 대공저부터 들른 세이안을 질책하며 그를 홀라당 데리고 갔다.
그 와중에도 세이안은 나와 내일 점심 약속을 잡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외숙부네 보좌관도 성격이 평범하지는 않네요.”
“어렸을 때부터 세이안과 함께 자라다시피 했으니 익숙하겠지.”
오, 그런 사정이.
내가 궁금해하는 얼굴을 하자 아버지는 흔쾌히 세이안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건, 어린 에일런이었다.
“세이안은 운동 신경이 없어서 네 살인 에일런보다도 검술에 젬병이었다.”
“정말요?”
“목검을 허술하게 쥐고 휘두르다가 제 다리를 때려 멍 드는 일이 부지기수였지. 그 꼴을 보고 세르비아는 웃다가 사레까지 들렸어.”
세르비아. 내 엄마.
내가 나라는 사실을 몰랐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세르비아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내가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염치가 없는 것 같아 말을 꺼내지 못했고,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냥, 왜인지 모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들을 준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엄마 얘기 더 해 주시면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먼저 세르비아의 이야기를 청했다.
그런 내 말에 아버지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앞으로는 더 많이 해 주마.”
***
나는 밤이 되길 기다리며 지하 연구실에 처박혀 이것저것 만들었다.
미묘한 색의 녹빛 액체를 특수 제작 한 용지에 떨어뜨려 보자 하얀 용지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아, 애매한데.”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며칠째 막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는 연구 결과 탓이었다.
분명히 거의 다 된 느낌이 들긴 하는데, 뭔가 하나가 모자랐다. 그 모자란 하나를 잡으면 이 미묘한 성과가 딱 괜찮아질 것 같은데 말이지.
“으으, 짜증 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나는 이내 손을 탁탁 털고는 소파 위에 늘어지듯 누웠다.
일단 오늘은 텄으니 더 붙잡지 말고 시원하게 포기할 생각이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봐야 해결책이 보이는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조금만 쉬다가 주문 들어온 아티팩트나 만들어야지…….”
라그라스 상단에서는 여러 마법 아티팩트를 팔고 있는데, 내가 만드는 건 가장 고가에 팔렸다.
보통은 선주문을 하면 후제작을 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가끔 기분 전환 겸 많이 만들어서 남는 수량이 있으면 선착순으로 팔기도 했다.
삼십 분쯤 쉰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뚜둑-
“…….”
허리에서 엄청난 소리가 나서 잠시 당황했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조만간 다시 운동 시작해야겠다.’
날이 추워서 내일 해야지, 다음 주에 해야지, 하고 미루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 마음먹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티팩트 제작에 돌입했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리온과 한 약속 시간까지는 세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준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대략 한 시간이라고 가정하면,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은 셈이었다.
내 한숨이 무색하게도, 다행히 남은 시간은 금방 흘렀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히 준비까지 마친 나는 메리에게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너무 늦게 오시지는 말구요.”
“응, 알았어. 아버지랑 오라버니한테는 물어보는 거 아니면 말하지 말구.”
“후후, 그거야 당연하죠.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칼리온을 만나러 가는 거라고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메리를 보니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싶었다.
하긴. 여덟 시가 다 된 밤에 옷을 차려입고 나가는 걸 보고도 내 목적지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럼 저는 먼저 나가 볼게요!”
“으응, 좋은 밤 보내.”
“아가씨도요.”
나는 문을 닫고 나서는 메리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는 곧바로 이동 마법을 펼쳤다.
이제는 익숙해진 좌표를 지정한 술식을 고요히 읊자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곧.
“에리타.”
온종일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칼리온이 근사한 미소를 띠고 나를 맞아 주었다.
“전하!”
나는 절로 새는 웃음을 굳이 막지 않고 살짝 팔을 벌린 내 남자 친구의 품에 쏙 안겼다.
그 품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차분하고도 청량한 향기가 났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