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0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16화(204/218)
일 분 정도 아무런 말 없이 꼭 끌어안고 있던 우리는 손을 맞잡고 느린 속도로 황태자궁의 넓은 정원을 걸었다.
“지금 옷은 아까 입고 있던 거랑 조금 다르네요.”
“흐흥, 알아보시네요. 이건 좀 더 도톰한 거예요! 따뜻하게 입고 오라시기에 갈아입었죠.”
“……예쁩니다. 직접 보니 더욱요.”
칼리온의 손을 잠시 놓고 제자리에서 치맛자락을 팔락이자 그런 나를 다감한 눈으로 바라본 칼리온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러고는 잠시라도 손을 놓고 있기 싫다는 듯, 다시금 내 손을 잡아 왔다.
“오늘은 뭐 하고 지냈습니까?”
“으음, 일단 오전에는 외숙부가 준 선물을 풀어 봤어요.”
“그 마차 세 대 분량이라던 선물 말이군요.”
“어우, 말도 마세요. 옷을 얼마나 많이 사 오셨는지 옷장이 터지려고 해서 다른 방에 뒀어요.”
내 말에 칼리온이 낮게 웃으며 맞잡은 손의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금 애매했다.
“고생했네요. 그대는 정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거 내 편 들어 주는 거 맞아? 내 연구실이 그다지 정돈된 편은 아니긴 하지만…….
“……연구실만 좀 그런 거거든요? 방은 깨끗하다구요.”
연구실은 치워 봤자 어차피 한 시간이면 난장판이 되는데, 그럼 치우는 의미가 없잖아.
물론 이렇게 말했다가 약한 결벽증이 있는 유르젠에게서 경멸의 눈초리를 받은 기억이 있었기에 그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 점까지 귀여운 거니까 괜찮습니다.”
칼리온은 미묘하게 내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이건 그냥 칼리온이 무슨 말만 하면 헤벌쭉해지는 내 책임이 컸다. 근데 좋은 걸 어쩌라고…….
“어쨌든요! 옷도 옷인데 마법 재료나 타국에서만 나는 약초 같은 것도 엄청 사 오셨거든요. 그래서 제 연구실에 딸린 창고가 지금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에요…….”
“그런 것치고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데요.”
“……흠흠. 재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칼리온의 예리한 지적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전하는 뭐 하셨어요?”
이번에는 상대가 바뀐 질문에 칼리온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자신의 하루를 말해 주었다.
“아침에 회의하고 검 좀 잡다가 그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후에는 서류를 검토하다가 한 장 넘길 때마다 그대 생각이 나서 집중 못 한다고 바론한테 한 소리 들었고요.”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건 칼리온인데,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자꾸 그러시면 제가 바론 경을 어떻게 봐요.”
“안 보면 되죠. 지금까지 말 안 했는데, 사실 제가 굉장히 속 좁고 질투가 심한 남자거든요.”
내심 기분 좋은 마음을 꾹꾹 삼킨 내 타박에 칼리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나 참…….
‘……귀엽네.’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으며 내 눈에 낀 콩깍지를 다시 한번 인정했다. 오만 모습이 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걸 보니 아주 중증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 콩깍지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칼리온 역시 내가 뭘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니까. 이건 말로 듣지 않아도 나를 보는 표정, 눈빛, 그리고 조심히 닿아 오는 손길에서 알 수 있었다.
“에리타,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는데, 함께 가 주겠습니까?”
칼리온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부드러이 내게 물어 왔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다정한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안 알려 주실 거죠?”
“……그건 좀 뻔한가요.”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한 칼리온이 헛기침을 했다. 가만 보면 칼리온도 서프라이즈를 퍽 좋아한단 말이지.
“원래 뻔한 것도 누구랑 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거 아시죠? 전 좋아요.”
우리는 느긋하게 황태자궁을 벗어났다. 황궁을 여러 번 드나들긴 했지만 이런저런 지리까지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나는 얌전히 칼리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런데…….
‘……엄청 으슥한데?’
궁인들이 돌아다니던 황태자궁과 달리 걸음을 더하면 더할수록 사람이 없어졌다.
비단 인기척이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분위기 자체도 으스스해졌다.
물론 칼리온이 나를 이상한 데로 데려가지는 않겠지만…….
스윽-
나는 슬그머니 칼리온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무서워요?”
칼리온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아닌데, 그냥 분위기가 좀 그래서요. 황궁에도 이렇게 사람 없는 데가 있네요…….”
“하하. 그야 당연히 있죠. 하루에 사람 하나 지나갈까 말까 한 곳도 있는데.”
칼리온의 말투는 가벼웠으나 묘하게 짙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그를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보다 칼리온이 감정을 갈무리하는 게 더 빨랐다.
그렇게 걷다 보니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다 왔네요. 여기만 지나면 바로입니다.”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나는 칼리온이 가리킨 대로 앞을 보았다.
“……막다른 길인데요?”
눈을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보이는 건 높은 담장으로 가로막힌 길뿐이었다.
여기를 어떻게 지나가?
“잠시.”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칼리온을 바라보자, 살짝 웃은 칼리온이 우리 앞을 가로막은 벽의 한 군데를 꾹 눌렀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
견고하던 벽이 순식간에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소리도 없이 갈라진 벽은 어느덧 일자의 통로를 우리에게 열어 주었다.
좁지만 사람 하나가 넉넉히 들어갈 정도의 틈.
“세상에…….”
해가 숨고 달이 고개를 내민 밤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통로의 끝은 멀어 보였다.
“신기하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칼리온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 왔다.
신기하고말고.
“마법도 아닌데……. 그리고 이렇게 긴 통로가 있을 정도의 공간도 없잖아요, 이 뒤에는.”
칼리온의 키보다 훌쩍 높은 담장이지만 그 담장 바로 너머에 솟아 있는 나무는 충분히 보였다.
그런데 이 통로는 어떻게…….
“저도 신기해서 알아봤는데 지금은 사라진 기술이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설명은 조금 후에 해 줄게요.”
“네에…….”
궁금했지만 내게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칼리온을 재촉할 정도로 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좁고 어두운 통로 앞에 서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로 지나가는 거예요?”
“다른 입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발견한 건 여기가 전부거든요.”
“흠…….”
그의 말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통로를 노려보다시피 했지만, 일반인의 시력과 비슷한 내 눈에 적어도 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통로 끝에 뭐가 있는지 보일 리 만무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안 보고 가면 더 예쁠 겁니다.”
이내 미리 알기를 포기한 내 중얼거림에 칼리온이 낮게 웃으며 나를 통로 앞으로 이끌었다.
통로 양옆의 담장은 이 미터를 훌쩍 넘을 듯 높았지만 저 끝에서 비쳐 들어오는 빛 덕분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저 먼저 가요?”
“음……. 혹시 모르니까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조심히 따라와요.”
나는 칼리온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칼리온이 앞서가면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빛이 있긴 해도 일단 어둡고 좁은 곳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자박-
칼리온이 앞서 발을 디뎠다.
그가 맞잡은 손을 등 뒤로 돌렸기에 나는 칼리온과 손을 잡은 그대로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칼리온의 너른 등을 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나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가 못 보는데 그렇게 예쁘게 웃는 건 반칙 아닌가요.”
내 웃음을 들은 듯 칼리온이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말해 왔다.
그 말에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좋아서 웃는 거예요.”
“제가 좋아서 웃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하여튼 이 능글맞은 남자 같으니.
“흐음, 정답에 가깝네요.”
“이런. 백 프로 정답을 기대했는데.”
“아쉽네요. 다음에는 조금 더 분발하시는 게 좋겠어요.”
나는 칼리온의 장단에 맞추어 살짝 맞잡은 그의 손 등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잠시 움찔거리더니 이내 애교를 부려 오듯 내 손을 두어 번 힘주어 잡고는 다시 살짝 힘을 뺐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이 깔렸지만 칼리온은 왜 웃냐고 묻지 않았다. 그도 같이 웃고 있는 탓이었다.
“얼마나 남았어요?”
“열 걸음 정도?”
떠들다 보니 긴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딱 아홉 걸음을 걸었을 때, 칼리온이 멈춰 섰다.
“음, 막상 보여 주려니 별거 아니라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대에게 언젠가 한 번은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남은 한 걸음을 마저 옮겼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너른 등이 옆으로 비켜서고, 나는 한 발짝 남은 걸음을 디뎠다.
그러자 좁은 통로를 은은하게 비추던 빛줄기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 빛은, 그리 넓지 않은 연못에 반사된 달빛이었다.
“와…….”
겨울임에도 생기를 뽐내며 소담스레 피어 있는 색색의 꽃과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거목.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어쩐지 동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사박사박-
겨울에는 볼 수 없는 푸릇한 잔디의 촉감과 볼에 닿아 오는 선득한 공기의 느낌이 상반됐다.
“……너무 예뻐요.”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솔직하디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이 안은 묘하게 아늑하고 몽환적이었다.
이 세상에 오직 우리 둘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
“에리타.”
그때, 칼리온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