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0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18화(206/218)
되돌아온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겠는가.
“당연히 기억하죠. ……그때 저 때문에 들킬까 봐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모른다구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저를 찾는 기사들을 피해 숨어 있던 칼리온과 우연히 마주친 나.
여기까지는 다 좋은데, 내가 밟은 나뭇가지가 하필이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동강이 난 바람에 그 기사들에게 들킬 뻔했지.
“하하.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던 어린 그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흠흠. 어쨌든 그날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를 종용하자 칼리온은 조금 웃더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여긴 그날 발견했습니다.”
“……저랑 처음 만났던 그날에요?”
“네. 그대가 제 손에 쥐여 준 작은 고리만 들고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발견했죠.”
“아…….”
그 작은 고리.
행운을 가져다주는 고리가 한창 유행할 때라 메리와 함께 만들었는데, 열 살의 손으로 조각을 하기는 어려웠던 탓에 투박한 모양새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걸 황자인 칼리온에게 떡하니 내밀 수 있었는지.
“마침 저 입구 앞에서 그 고리를 떨어뜨렸거든요.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면서 벽을 짚었는데, 여기가 열렸습니다. 놀라서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들어와서 발견했죠.”
“와아…….”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우리 이야기가 되니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칼리온이 통로를 여는 모습을 봤을 때도 신기했는데, 그 방법을 발견한 게 내가 주었던 고리 덕분이라니.
“그 뒤로 가끔 지칠 때면 혼자 이곳에 오곤 했습니다. 내 궁이 있긴 했지만 거긴 온전한 내 공간이 아니어서, 뭐랄까…… 좀 답답했거든요.”
그 답답함의 원인은 분명했다.
안심할 수 없는 내 공간이란 내 공간이 아닌 법이니까.
나는 칼리온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쳐 살살 문질렀다. 지나 버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위로이자 지금의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자 칼리온이 낮게 웃으며 얌전히 놓여 있던 손을 뒤집더니 내 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어쨌든 여기는 겨울에도 자연적으로 꽃이 피는 곳이라 그대에게도 꼭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음, 예쁘기도 하고.”
그 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며 애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는 예쁜 곳만 보면 제가 떠올라요?”
“어디 그뿐일까요. 일상이 온통 그대인데.”
칼리온은 즉답으로도 모자라 달콤하기 짝이 없는 완벽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평소였다면 시선을 피했을 테지만, 청혼을 받아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의 역치가 높아진 나는 다시금 맑게 웃었다.
***
침대에 누운 나는 슬쩍 왼손을 위로 쭉 뻗었다. 그러자 약지에 딱 맞게 끼워진 은색 반지가 보였다.
“…….”
그 예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야밤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흐물흐물하게 풀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헤어지기 직전, 직접 끼워 준 반지 위에 입을 맞추던 칼리온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칼리온에게 청혼을 받았다.
그 사실을 다시금 속으로 되뇌자 얌전하지는 않지만 조금 잠잠해졌던 심장이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다.
“……이러다 심장 터지겠네.”
나는 얼른 잠들기 위해 눈을 꾹 감고 머리를 비웠다. 그러나 오라는 잠은 안 오고 칼리온의 얼굴만 까만 배경 위를 둥둥 떠다녔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을 홱, 내리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이 안 와…….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두었던 노트를 슥 끌어당겼다.
잠도 안 오고 하니 칼리온에게 굿 나잇 인사라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내가 문장을 마치는 온점을 찍고 노트를 덮은 직후 울린 통신구가 아니었다면.
눈을 깜빡이다가 얼른 통신을 수락하자 편한 셔츠 차림의 칼리온이 통신구에 비쳤다.
-에리타.
그 역시 내 모습을 본 듯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불렀다.
“……칼리온.”
-갑자기 미안합니다. ……연락을 받으니 보고 싶어져서.
솔직한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흐흐 웃으며 방에 사일런스 마법을 둘렀다.
“아직 안 자고 뭐 하셨어요?”
-잠이 안 와서 그냥 있었습니다. 그대 생각을 하던 도중에 연락이 와서 조금 놀라기도 했고요.
놀랍도록 내 상황과 똑같았다.
나는 소리 죽여 웃으며 침대 헤드에 기대어 무릎을 끌어안았다.
마법으로 통신구를 눈높이에 맞춰 띄워 놓자 누구 남자인지 자기 직전의 풀어진 모습도 사랑스러운 칼리온이 잘 보였다.
“저도 잠이 안 와서 전하 생각하고 있었어요. 음, 손가락에 없던 반지가 있어서 잠이 안 오나?”
부러 왼손을 살랑이며 고개를 기울이자 통신구 너머 말끔한 칼리온의 귓가가 발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네요.
거기다 그는 아주 귀엽게도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 참. 결정적일 때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티를 안 내더니, 이렇게 일상 속 사소한 부분에서 귀를 붉혀 대다니.
‘……너무 귀엽잖아.’
나는 속으로 주접 아닌 주접을 떨어 대며 배시시 웃었다.
“언제 주무실 거예요?”
-그대가 자면요.
“그럼 빨리 자야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고, 마주한 칼리온의 눈에도 잠기운은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각자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자세는 어느새 비스듬해졌고, 종내에는 머리가 베개에 닿았다.
옆으로 누워 통신구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있자니 마치 한 침대 위에 누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암…….”
-졸리면 자요.
“아니에요, 안 자요. 안 잘래…….”
그렇게 자세를 바꿔 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됐을 무렵, 나는 감기는 눈꺼풀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잘 자요, 에리타. ……사랑합니다.
잠결에 그런 말을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고 일어난 나는 세이안과 함께 광장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하께서 잘해 주시니?”
“그럼요. 놓치면 큰일 나겠다 싶을 만큼 잘해 주세요.”
내 말에 세이안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다행이라는 듯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 네가 좋다니 나도 좋구나.”
“다음에 전하랑 같이 식사라도 해요. 외숙부한테도 제 약혼자 소개해 드릴게요.”
아직 칼리온한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세이안이 돌아오면 같이 인사하자고 먼저 말한 건 칼리온이었으니까.
“……뭐?”
그때 내 말을 들은 세이안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야, 약혼자라니…….”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수줍게 웃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젯밤, 자신의 남은 평생을 내게 주고 싶다고 고백하던 칼리온의 진중한 목소리가 달콤한 행복감과 함께 떠오른 탓이었다.
“어제 프러포즈받았거든요.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아직 모르니까 외숙부도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나는 제복을 차려입은 칼리온이 떨리는 손길로 끼워 주었던 프러포즈 반지를 매만지며 세이안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프러포즈를 받았고, 수락했다고.
“허…….”
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듯 세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칼리온과 연애 중이라는 사실도 어제 안 그였으니 그 놀람도 충분히 이해되는 바였다.
“음, 놀라셨죠?”
“……놀라다마다. 연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어젠데, 이제는 약혼이라니…….”
세이안은 정말 놀란 모양인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 웃음에 세이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음, 그래. 우선 축하해 줘야겠구나. 나중에 언제든지 괜찮으니 두 사람 시간 괜찮을 때 찾아오렴. 성대히 대접할게.”
“하하, 그냥 편하게 대해 주시는 게 제일 좋아요.”
아버지랑 에일런이 워낙 눈에 불을 켜고 대하니까 말이지. 그러다가도 잘 지내긴 하지만.
어쨌거나 마음 여린 세이안은 칼리온을 따뜻하게 맞아 줄 거라는 굳은 믿음이 내게는 있었다.
***
세이안과 함께했던 나들이를 끝낸 나는 바로 집으로 가는 대신 라그라스 상단 건물로 향했다.
“유르젠!”
“에리타 님.”
“바쁘다더니 진짜 얼굴이 반쪽이네……. 좀 쉬엄쉬엄하라니까.”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그보다 마실 건 뭘로 드릴까요.”
“음, 이번에 신제품 들어왔다는 걸로 마셔 보자. 아직 출시 안 했잖아.”
내 말에 유르젠은 집무실 한쪽에 늘어선 장식장 안에서 통 하나를 가져왔다.
“그거야?”
“예.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아서 여기 두고 종종 마시고 있습니다.”
“어, 진짜?”
그러고 보니 열 번 방문하면 열 번 모두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던 커피 잔 무덤이 오늘은 조금 낮았다.
게다가 그 말이 사실인 듯, 고급스러운 통을 열어 차를 우려내는 유르젠의 손길이 익숙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차도 많이 마시면 그리 좋지 않다지만 어디 커피만 할까.
“요즘 커피 좀 덜 마시나 보네! 잘됐다.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다구 맨날 말하는데 새겨들어야 말이지.”
“……제 건강은 저도 열심히 챙기고 있습니다.”
“거짓말. 유르젠, 이번 주에 운동 몇 번 했어?”
그 말에 유르젠의 입이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다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