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0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20화(208/218)
“……약혼 선물이요.”
유르젠의 반 박자 늦은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줍게 슬쩍 손을 펼쳐 보였다.
“나 프러포즈받았거든.”
벌써 사흘째 함께하고 있는 반지이건만 볼 때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한 달 내내 봐도 기분이 좋지 않을까.
“허…….”
그런 나를 보던 유르젠이 한숨 같은 감탄을 뱉었다.
“흠흠. 어쨌든 약혼 기념으로 저렴하게 푼다는 명목을 붙이면 좋을 것 같아서. 요즘 제국 분위기가 좀 어두우니까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좋지 않겠어?”
“……좋기야 좋겠죠.”
유르젠은 앓듯이 동의하며 골이 아프다는 표정으로 제 골을 꾹꾹 눌렀다.
“일단 알겠습니다. 홍보 방식이나 명목은 제가 궁리해보고 조만간 보고드릴게요. 일단 시제품부터 만들어 봐야 하니까.”
“응. 시제품 만들어 보고 물량 확보되면 그때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아.”
조합과 비율, 제조법이 전부 있으면 영양제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 일주일 안에는 성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유르젠이 조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언젠가는 하시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빨라서 조금 놀랐네요.”
“……뭐어, 굳이 늦게 할 이유도 없으니까. 고마워, 유르젠.”
유르젠의 축하에 괜히 민망해진 나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조금 더 유르젠과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가지고 온 영양제 제조법이 적힌 서류를 유르젠에게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이제 가 볼게. 이따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조심해서 가세요.”
곧장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던 나는 뒤로 돌아 유르젠에게 부탁을 하나 더 남겼다.
“아, 그리고 테인이랑 연락되면 나 보러 오라고 좀 해 줄래? 조만간 약혼 관련 이야기를 풀 건데 그 전에 내가 직접 말해 주고 싶어서.”
“아…….”
“잠깐 바델산맥에 갔다는 소리는 들었어. 그 정도는 말해 주더라고.”
테인이 나를 피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내 결혼 소식 정도는 직접 전해 주고 싶었다.
“어쨌든 부탁할게.”
내 말에 잠시 멈칫했던 유르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이 닿으면 그리 전하겠습니다.”
유르젠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에게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이고는 잠시 멈춰 두었던 마법을 다시 전개했다.
***
나는 마침 타이밍 좋게도 동시에 퇴근한 아버지와 에일런을 이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의아해하는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나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에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청혼받았어요.”
몹시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음, 그렇다고 당장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구요. 조만간 황태자 즉위식이 있을 테니까 그 후에 간소하게 약혼식부터 치르려구요.”
“…….”
“……하.”
내 조곤조곤한 말에 에일런은 얼어붙었고 아버지는 착잡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바였기에 놀랍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침묵을 견디는 건 생각보다 뻘쭘한 일이었다.
“……흠흠. 저기, 뭐라고 말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두 사람을 채근했다.
일전에 칼리온과 함께 두 사람 앞에서 연애 사실을 밝혔을 때보다 더 묵직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그냥 연애한다는 거랑 프러포즈받았다는 건 좀 다르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미리 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 저녁에 칼리온이 왔을 때 같이 말했다면 이 침묵이 싸늘한 시선이 되어 칼리온을 향했을 게 뻔했다.
“……에리타.”
그때, 아버지의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네.”
“행복할 것 같으냐?”
그렇게 묻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는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예요. 그럴 수 있을 거구요.”
“……그래. 그거면 됐다.”
활짝 웃으며 한 대답에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고, 이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내 행복만을 바라는 아버지의 사랑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뭉클함이 솟았다.
“이리 오렴.”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벙긋거리는 나를 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곧장 벌떡 일어났고, 어릴 적과 변함없이 크고 너른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잠시 아버지의 토닥임을 받던 나는 옆에서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에일런에게도 팔을 뻗었다.
돌아온 건 따뜻한 포옹이었다.
***
칼리온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 그를 맞으러 나간 건 나 혼자였다.
본래는 아버지와 에일런도 함께 나오려고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에 두 사람은 다이닝 룸 안에서 칼리온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가씨.”
“테르반?”
현관 앞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내 옆에 테르반이 다가와 섰다.
고개를 돌리자 내가 좋아하는 인자한 미소를 띤 테르반이 보였다.
“안에서 기다리시지 않고요.”
그는 그리 말하며 단정한 손길로 내 어깨에 도톰한 숄을 둘러 주었다.
나는 살짝 발긋해진 손가락으로 숄 모서리를 겹쳐 잡았다.
“고마워요, 테르반.”
“별말씀을요.”
부드럽게 웃은 테르반은 단정한 태도로 내 곁에 서 함께 대공저 정문을 바라보았다.
“황궁에 가시면 이제 이리 뵙는 일도 어려워지겠군요.”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나긋한 테르반의 목소리가 약간의 아쉬움을 품고 들려왔다.
황궁.
칼리온과 결혼하게 되면 황궁으로 들어가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 그는 황제가 될 테고, 그럼 나는 황후가 되겠지.
“……뭐어, 당장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요.”
“후후, 그건 그렇지요.”
내 얼버무림에 테르반이 잔주름이 진 눈가를 휘어 웃으며 동의했다.
처음 봤을 때는 짙던 테르반의 머리에는 어느새 희끗함이 더해져 있었다.
아버지와 에일런만큼이나 나를 오래 봐 온 테르반은 또 다른 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자주 올게요. ……여기는 내 집이니까.”
“오, 그럼요. 연락 없이 찾아오셔도 이곳은 늘 아가씨를 모실 준비가 된 상태일 겁니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들과 그들이 머무는 내 집. 내 행복은 이곳에도 있었다.
“에리타.”
“칼리온!”
나와 테르반의 대화는 칼리온이 도착하며 자연스레 끊어졌다.
***
“드시지요, 전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어진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의외로 꽤 좋았다.
칼리온이야 항상 단정하고 깔끔한 태도를 보였지만, 아버지와 에일런 역시 칼리온에게 별 사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에리타에게 청혼을 하셨다고.”
“……예.”
중간에 살짝 긴장감이 돌긴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질문은 순수한 질문이었다.
나는 화기애애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대화를 이어 가는 세 사람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뭐, 원래 친하던 세 사람이니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조금 민망한 거라면…….
“……전하.”
“예, 에리타.”
“접시가 너무 다 제 앞에 있어요. ……그만 옮겨 주셔도 돼요.”
내가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바라본 요리가 담긴 접시가 죄 내 앞에 몰려 있다는 점이었다.
“……아.”
칼리온은 이야기 중간중간 아주 매끄러운 손길로 내가 쳐다본 요리들을 내 앞으로 끌어다 주었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나 역시 조금 전 새로 접시 하나를 옮겨 주던 칼리온의 손을 인식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접시로 꽉 찬 내 앞을 본 칼리온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 많이 옮겼는지 몰랐네요.”
“저도 방금 알았어요…….”
다시 말해 민망하기 짝이 없게도 지금까지는 얌전히 냠냠 잘만 먹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때,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에일런이 약간의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에리타를 데려가기 전에 솜씨 좋은 요리사를 구해 놓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
“그것도 그렇구나. 기왕이면 매운 요리도 잘하는 요리사가 좋겠어.”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뭐지?
잘 나가다가 갑자기 내 음식 취향과 향후 황궁 주방장 이야기가 왜 나오냐고요.
“갑자기 주제가 좀 이상해졌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본래 주거지를 바꿀 때는 고려할 점이 많은 법이란다.”
아버지는 투덜거리는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리 답했다.
“물론 네가 아쉬움을 느낀다면 언제든 이곳으로 와도 되지만 말이다.”
“그때는 저도 함께 오겠습니다.”
“……굳이?”
“예.”
칼리온의 너스레에 아버지가 쯧, 혀를 찼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유리온실로 향했다.
“약혼식은 생략한다는 말입니까?”
“아, 그건 제 의견이에요. 어차피 결혼식을 할 텐데 굳이 약혼식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서면으로 약혼서를 나누고 알리는 정도는 하려구. 음, 그리고 제가 생각해 둔 게 하나 더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