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0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21화(209/218)
나는 세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천천히 유르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나와 칼리온의 약혼을 기념하는 의미로 새로 개발한 포션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출시하겠다는 내 말에 가장 당황한 건 칼리온이었다.
“에리타, 꼭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지 말아요.”
……음, 손해 아닌데.
나는 볼을 매만지며 오래전부터 해 왔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원래도 비싸게 받을 생각 없었어요. 옛날부터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포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처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삼 년쯤 전이었다.
십 년간 제국의 사망자 통계를 낸 자료를 보던 도중, 병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망자를 만들어 낸 건 과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들은 누적된 피로를 해소할 틈도 없이 일을 했다.
나나 라그라스 상단이 돈을 풀어 그들을 돕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신전과 병원은 너무도 비싼 값을 요구했고, 상품으로 나오는 포션과 약 역시 비쌌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만 하던 일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마침 붙이기 적절한 명분도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환기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구요.”
폐황후의 난도 벌써 몇 주가 지난 일이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이전과 같지는 않았다.
흑마법은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날에 끔찍한 외관의 생체 병기를 본 백성들이 많은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칼리온은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이었지만 이유를 들어서 그런지 쉬이 그러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나라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니까. 나는 그런 칼리온을 사랑하고.
이쯤에서 칼리온의 근심을 덜어 주기로 한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어, 그리고 그 포션을 만드는 데에 전하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라 홍보 조건으로도 딱 맞아요.”
“……제가 말입니까?”
내 말에 칼리온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짐작 가는 게 없는 듯한 얼굴에 나는 작게 웃었다.
“저번에 트란 열매 이야기하다가 버려지는 껍데기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해 주셨잖아요. 트란 열매 껍데기가 포션의 주재료거든요.”
그랬다.
트란 열매 껍데기를 포션 재료로 사용하려는 생각은 칼리온의 그 말에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칼리온에게 더 말하는 대신 아버지와 에일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가 이미 예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확실히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겠지. 민심도 좀 안정될 테고.”
아버지는 가볍게 내 의견에 동조했고, 에일런은 현실적인 부분을 짚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칼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사고 친 고양이를 보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들어가는 재료라도 제가 대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트란 열매는 내 소유고, 나머지 재료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저렴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 것들이니 칼리온에게 부탁해도 무리가 없었다.
그 후 우리는 잠시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칼리온의 황태자 즉위식에서 약혼 사실을 알리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온전히 칼리온이 주인공이어야 할 날에 밝히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생각했지만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의견이 굳건했다.
“……진짜 그날 알려요? 진짜로?”
“음, 그대가 싫다면 다른 날로 잡아도 괜찮지만, 그날만큼 이목이 쏠리는 날이 없을 것 같아서요. 저는 그대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널리 알리고 싶은 사람이라…….”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지만 당사자인 칼리온은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이목이 원래는 전부 칼리온한테 집중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내 물음은 당사자의 의견을 십분 반영한 결론으로 끝을 내렸다. 결코 칼리온의 웃음과 사근사근한 말에 넘어간 게…… 맞긴 하지만, 어쨌든.
칼리온이 그러고 싶다는데 뭐라고 하겠어.
오늘 꼭 나눠야 할 이야기가 전부 끝났을 때였다.
“에리타, 먼저 나가서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지금껏 별말 없던 아버지가 그리 물었다.
아니, 갑자기 먼저 나가 있으라니…….
이 상황에서 내게 저렇게 말한 건 칼리온을 두고 먼저 나가 있으라는 소리였다.
또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나는 아버지를 믿지만 내 연애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의 신뢰도는 아주 조금 낮았다. 아버지랑 에일런이 오죽 내 연애에 유난이었어야지.
“……뭐 하시려구요?”
“잠시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다.”
가느다란 눈으로 그리 묻자 아버지는 안심하라는 듯 옅게 웃으며 칼리온을 눈짓했다.
“으음…….”
“스승님이랑 얘기 좀 하고 나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미적거리던 나를 칼리온이 달랬다. 그는 다감한 목소리로 내 걱정을 토닥였다. 그 달램을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내 손을 맞잡은 칼리온의 손등을 살살 문지르고는 느릿하게 손을 빼냈다. 온기가 사라지자 영 아쉬웠다.
“알았어요. 나가서 기다릴 테니까 얘기 나누고 나오세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폭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일런도 함께 일어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칼리온을 번갈아 보고는 이내 문으로 걸어갔다. 그런 내 옆으로 에일런이 다가섰다.
“오라버니는 안 남으려고?”
“뭐, 나는 됐어.”
“그럼 혼자 안 기다려도 되겠네.”
“좋아?”
“흐흥, 오라버닌 싫구?”
“그럴 리가 없잖아.”
***
에리타와 에일런이 응접실을 나서고, 묵직한 문이 닫혔다.
넓은 응접실에는 조금 전과 달리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맑은 목소리로 조잘거리던 에리타가 없어진 탓이었다.
애초에 아슬란과 칼리온이 그리 수다스러운 사제 관계는 아니었으니 이 분위기도 두 사람에게는 익숙했다.
“우선 이리 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단조롭게 흘러나온 아슬란의 존대에 칼리온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어쩔 수 없이 존대를 듣는다지만 역시 제 은인이나 다름없는 스승의 존대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편히 말해 주십시오, 스승님.”
멋쩍게 웃은 칼리온이 그리 부탁하듯 말하자 아슬란은 의미 모를 눈으로 하나뿐인 제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곧 황태자의 위에 오르시고 조금 더 있으면 황제가 되실 텐데 어찌 그리 쉬이 하대를 허하십니까.”
잠시 후 아슬란이 꺼낸 건 아주 딱딱한 원칙주의자 같은 말이었다.
물론 상대에게는 하나도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황제가 되어도 제가 스승님을 존경하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먼저 신분을 떠나 스승으로만 대하라고 하신 건 스승님이 아니십니까.”
“……나 참.”
결국 아슬란이 먼저 손을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하나뿐인 제자를 아꼈다. 저 되바라진 제자가 덧붙인 뒷말도 사실이었고.
“스승을 존경한다면서 그 스승의 딸을 꾀어낸 제자가 말이 많구나.”
“……흠흠.”
아슬란이 픽 웃으며 찌른 말에 칼리온은 시선을 슬쩍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그가 스승의 앞에서 당당하기가 조금 그랬다.
멋쩍은 얼굴을 한 칼리온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슬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칼리온.”
그 부름은 어딘가 다정한 온도를 머금고 있었다.
“……예, 스승님.”
고개를 들자 마주친 아슬란의 온기 도는 적안에, 칼리온이 반 박자 늦게 답했다.
아슬란은 그 늦음에 개의치 않고 물었다.
“너는 지금 행복한 게냐.”
그건 칼리온이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자 따뜻한 반응이었다.
“내가 네게 한 소리 하려고 남긴 줄 알았더냐?”
“으음…….”
“쯧.”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긍정이나 다름없는 침묵에 아슬란이 혀를 찼다.
분명 그의 하나뿐인 딸의 연애와 결혼이 아주 반가운 건 아니었다.
아슬란의 눈에 에리타는 여전히 작고 여린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에리타가 아슬란 그보다 더 강했다. 에리타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굳건한 심지를 가진 아이였다.
비록 부족한 아비였지만 상냥한 딸아이는 그런 아비의 밑에서도 강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에리타가 자리를 잡고 잘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사랑을 부어 주는 것. 아비로서 아슬란 그가 할 일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은 칼리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내 하나뿐인 제자다. 내가 살가운 스승은 아닐지언정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지도 않는 냉혈한은 아니야.”
“……스승님.”
“그래도 이거 하나는 다시 물어보마.”
아슬란의 그 말에 칼리온이 자세를 바로 했다.
잠시의 침묵 후, 나직한 질문이 떨어졌다.
“이 길이 진정으로 네가 행복한 길이 맞더냐?”
질문을 들은 칼리온은 조금 전과 달리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이 길이어야만 행복합니다.”
단언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잠시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아슬란이 이내 픽 웃었다.
“그거면 됐다. 에리타도 네가 좋다는데 내가 뭘 어찌하겠어.”
“……감사합니다.”
“네가 감사할 게 뭐가 있어? 되었으니 이제 나가는 게 좋겠구나. 내가 무슨 안 좋은 소리라도 할까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칼리온의 인사에 헛기침을 한 아슬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걱정을 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밖에서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을 사람은 에리타뿐이었다.
그를 따라 일어선 칼리온이 무어라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아슬란은 “낯간지러운 소리라면 하지 마라.” 하며 먼저 몸을 돌렸다.
그에 작게 웃은 칼리온은 그의 스승이 질색할 만한 낯간지러운 말을 속으로 삼키고는 스승을 따라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