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10)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외전 22화(210/218)
응접실을 나선 나와 에일런은 어디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그냥 로비 홀의 계단에 기대어 섰다.
에일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응접실 쪽으로 흘끔흘끔 시선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
아버지가 나를 어화둥둥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아버지가 칼리온 역시 깊이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리온에게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허락한 것부터가 그를 선 안으로 들였다는 증거였다.
아버지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 이들은 많았으나 아버지가 직접 제자라 말한 이는 칼리온뿐이니.
“에리타.”
“……으응?”
한 박자 늦은 대답에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에일런이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기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걱정이 돼?”
“아, 아닌데.”
“아니긴. 아까부터 문에서 눈을 못 떼고 있으면서.”
나는 뻔뻔하게 부정해 보았으나 그 부정이 먹히기에는 내 신체 반응이 너무도 정직했다.
“……걱정은 아니구, 그냥 좀 신경이 쓰이는 건데…….”
웅얼거리듯 말을 뱉어 내고 보니 영 민망했다.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쓰나 싶다가도…… 아니, 근데 원래 연애하면 다 이런 거 아닌가?
나는 응접실 문을 한 번 에일런을 한 번 번갈아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칼리온과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있었으나, 그게 전부인 건 아니었다.
“오라버니.”
“응.”
“……기분이 좀 이상해.”
“기분이 어떤데?”
에일런의 다정한 물음에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구두 앞코로 바닥을 콕콕 내리찍었다.
지금 기분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설명하긴 어려운데 그냥 좀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성년식 때보다 지금이 더 어른이 된 기분이야.”
이 미묘함은 가족에게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한 데에서 오는 것 같기도 했고, 몇 달 후면 내가 집이라고 부를 곳이 바뀌는 데에서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오늘 이렇게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결혼 허락을 받다시피 하니 조금…… 실감이 난다고 해야 하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내 시선이 위로 올라간 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에일런의 손길 때문이었다.
“기분이 이상한 건 나랑 아버지도 그래.”
“오라버니도?”
“그럼. 연무장을 태워 먹던 내 동생이 어느새 이렇게 커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평소랑 같을 리가 없잖아.”
에일런이 어린 날의 언젠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레 말했다.
에일런이 굳이 그때의 이야기를 꺼낸 건 어딘가 가라앉은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함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에 묘하게 기분이 풀어진 나는 밉지 않게 에일런을 흘기며 그의 팔을 툭 쳤다.
“우리 그때 얘기는 안 꺼내기로 했잖아.”
“으음, 그럼 정원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이야기가 더 좋으려나?”
내 흑역사 아닌 흑역사를 꺼내는 에일런에 절로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그건 실수였어.”
툴툴거리며 반박하자 에일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정한 색채를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볼을 톡 두드렸다.
“네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야. 여긴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네 집일 거고.”
에일런의 다감한 말에 오르내리던 기분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잠시 달싹거리던 내 입술 사이로 결국 작은 웃음이 새어 나갔다. 에일런의 얼굴에도 나와 같은 미소가 서렸다.
“이제 기분이 좀 괜찮아진 모양이네, 내 동생.”
“오라버니 덕분에. ……그냥 결혼이라는 단어가 너무 가까워져서 조금 심란했나 봐.”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어.”
아버지가 먼저 나오고, 뒤이어 칼리온이 나왔다.
나를 발견한 두 사람의 표정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부드럽게 풀렸다.
“얘기는 끝나셨어요?”
재빨리 다가가 묻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에일런을 내보내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그것을 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서서 기다렸어요?”
“잠깐인데요, 뭘.”
내 옆으로 다가온 칼리온과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너무 늦지 않게 오려무나.”
“……네?”
생뚱맞은 말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아버지가 칼리온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같이 나갈 거 아니냐.”
“하하…….”
아버지의 눈짓을 받은 칼리온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말이 칼리온을 데려다주고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라는 뜻임을 알아챘다.
아니, 나 칼리온이랑 같이 나간다는 말 안 했는데…….
물론 말만 안 했지 같이 나갈 예정이긴 했으므로 나는 칼리온의 팔짱을 끼고 배시시 웃었다.
“금방 올게요!”
어쩌다 보니 인사를 나누는 분위기가 된 김에 나는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에리타, 겉옷 입어야죠.”
“……아.”
곧장 현관으로 나가려던 나를 붙잡은 건 못 말린다는 듯한 웃음을 머금은 칼리온의 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웃음을 참고 있는 에일런이 보였다.
……쪽팔린다.
나는 다음부터 꼭 세 번 생각하고 움직이기로 다짐하며 발을 뗐다.
“그으럼 저 위에 가서 겉옷 입고 올게요.”
그런 내 걸음을 에일런이 멈춰 세웠다.
“안 올라가도 돼. 네 겉옷 가져오라고 말해 뒀어.”
“……오라버니가?”
“응.”
때마침 후다닥 계단을 내려오는 메리가 보였다.
한겨울에 접어든 날씨에 도톰한 털옷을 가지고 오는 메리를 보자 내 민망함은 한층 더 깊어졌다.
저 옷을 걸쳐야 할 날씨에 냅다 나가려고 했으니…….
“아가씨, 여기 옷이요……!”
“으응. 고마워, 메리.”
“조심히 다녀오셔요.”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는 듯 속삭이듯 내 걱정을 한 메리가 꾸벅, 허리를 숙인 후 왔을 때처럼 후다닥 사라졌다.
이후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나와 칼리온은 현관을 나섰다.
약속했던 대로 칼리온과 나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금방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에일런이 보는 앞에서 나왔기에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데에 우리 둘 다 동의한 탓이었다.
조금 웃긴 건, 헤어지기가 아쉬워 빙빙 돌다 보니 다시 도착한 곳이 우리 집 앞이라는 거였다.
“……황궁 앞에서 헤어지자니까요.”
데려다주겠노라며 나왔는데 되레 배웅을 받은 꼴이 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절로 꿍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칼리온은 강경했다.
“오늘은 그대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아니, 강경하다기보다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다감한 미소로 나를 구슬렸다.
뭐, 내가 이 방법에 속수무책이니 강경하다고 표현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결국 패배한 건 나였다.
애초에 지금까지의 스코어를 따져 보자면 저런 얼굴을 한 칼리온에게 이긴 전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는 나였으니 웃기지도 않았다.
“……어쨌든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착하면 꼭 연락하시구요.”
그를 바래다주지 못하는 대신 걱정이 담뿍 담긴 인사를 늘어놓자 칼리온은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대도 조심히 들어가요.”
“으응, 알았어요. ……저 갈게요!”
선선히 대답한 후 깜짝 인사로 칼리온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후다닥 내달렸다.
“하…….”
열린 창문 너머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소리 없이 웃는 칼리온이 보였다.
***
며칠 후, 세이안과 잡은 약속 날이 다가왔다.
비센테 후작저는 황궁을 기준으로 우리 집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으나 딱히 멀다고 표현할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두 저택 모두 황궁에서 마차로 오 분 내외의 거리였으니.
어쨌든 본래의 계획은 우리 집에서 출발해서 중간에 황궁에 들러 칼리온과 합류한 후 비센테 후작저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우리 집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좌절되었다.
“……데리러 안 오셔도 된다니까요.”
내가 준비를 마치고 마차를 타려고 내려온 타이밍에 맞추어 칼리온이 현관 앞에 도착한 탓이었다.
“성격이 급해서 가만히 기다리는 게 힘들더라고요. 얼른 보고 싶기도 했고.”
내 주변에서 가장 인내심이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칼리온이 눈을 나붓이 휘어 웃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 참…….
더 웃긴 건, 칼리온의 그 말에 스멀스멀 밀려 올라가는 내 입꼬리였다.
“뭐어, 저도 보고 싶었어요.”
결국 나는 배시시 웃으며 칼리온의 허리를 감싸 안고 애정을 건네주었다.
연인이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가 힘들어 먼저 보러 왔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으응. 이따 봐요, 테르반.”
테르반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칼리온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탁-
마차의 문이 닫히고.
나는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빠르게 칼리온이 앉은 반대쪽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