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22화(22/218)
다그닥- 다그닥-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힘차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본래 작위가 높은 귀족들은 사두마차를 주로 타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였다.
나는 창문 너머로 점점 가까워지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대륙에 하나뿐인 제국의 성은 한눈에 보아도 그 화려함의 궤가 달랐다.
“에리타.”
“네?”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거라. 알았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가 작은 보석이 달린 반지를 내 앞에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반지는 내 작은 손에도 꼭 들어맞았다.
“이게 뭔가요?”
“호출용 반지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보석을 문지르면 신호가 오게 되어 있지.”
“아…….”
이 작은 반지에 그런 기능이 있다니. 역시 판타지 세계.
나도 마법을 계속 배우면 이런 것도 만들 수 있으려나?
그런데 제국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황궁 아닌가? 그런 곳에 가는데 이런 게 왜 필요하지?
“아버지, 황궁은 안전하지 않나요?”
내 말에 아버지가 잠시 멈칫했다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거란다. 원래 주려던 거기도 하고.”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이 없네.
“……감사해요.”
손가락을 감싼 느낌이 제법 어색해 나는 물끄러미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실수로 안 문지르게 조심해야겠다.
***
황궁의 입구를 통과한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 섰다.
“내리자꾸나.”
“자. 조심해서 내려.”
에일런의 에스코트를 받아 땅을 딛고 서자 둥근 지붕의 하얀 건물이 보였다.
건물 외벽에 태양이 조각된 걸 보니 여기가 장례식이 진행될 신전이겠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에일런, 에리타와 함께 먼저 들어가 있거라. 금방 따라가겠다.”
아버지는 내 볼을 한 번 매만지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에일런과 함께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의 국교답게 태양신의 신전은 내부 역시 우아한 듯 화려했다.
태양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라 그런지 이곳이고 저곳이고 전부 하얀 게, 먼지 한 톨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신경이 쓰이던 건데 말이다.
“……오라버니.”
“응, 에리타.”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면 옷이 이상하다든가…….”
나는 짙은 남색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옷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처음 마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쪽을 힐끔대던 시선은 신전에 들어와 앉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었다.
대놓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아닌 척 흘끔흘끔. 이토록 적나라할 수가 없었다.
그 부담스러운 관심에 나는 슬쩍 에일런의 옆으로 조금 더 달라붙었다.
“왜?”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요.”
그들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놀라움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주를 이루었다.
‘무슨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것 같네.’
나중에서야 들은 거지만 8년 만에 수도를 찾은 가족들을 향한 관심이 아주 열렬했다더라.
그와 더불어 소문만 무성하던 내 존재에도.
그때, 불편할 정도로 힐끔거리던 시선들이 순식간에 전부 사라졌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아버지가 돌아옴과 동시였다.
“무슨 일 있었나? 표정이 좋지 않구나.”
“음……, 이제 괜찮아요.”
아버지가 오면서 다 해결됐거든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왠지 아버지한테 말하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몇 분여의 시간을 더 기다렸을까.
“황후 폐하와 1황자 전하 드십니다!”
드디어 원작의 본격적인 등장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황족을 마주하면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귀족들은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나 역시 페른에게 배운 대로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들이…….’
새까만 드레스를 차려입고 수척한 얼굴을 한 황후와 오만한 분위기의 1황자.
처음 보는 얼굴에도 낯익은 기분이 드는 건 분명 소설에서 묘사된 그대로의 모습 때문이겠지.
‘……연기 진짜 잘하네.’
중간중간 비틀거리는 황후의 모습은 황비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사흘 밤낮을 통곡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황후와 황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이라도 황후를 애처롭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수척한 낯.
정치의 일면을 보자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황비의 죽음의 배후로 황후를 생각하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그저 소름 돋는 모습일 뿐이었다.
계단 위 단상, 황족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은 황후가 혈색 없는 입술을 열려던 찰나였다.
“2황자 전하 드십니다!”
다시 한번 육중한 신전 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은발의 소년이 들어섰다.
그게 내가 칼리온을 본 처음의 기억이었다.
황족의 상징인 금발을 물려받지 못한 2황자, 칼리온 루인 엘베르.
하지만 그의 은발은 금발보다 더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자, 뒤틀린 원작으로 엄마를 잃은 아이.
……그리고 미래에 내 가족을 죽이게 될 사람.
‘……지금은 완전 애구나.’
그는 아직 젖살도 전부 빠지지 않은 열한 살짜리 아이였다.
칼리온은 단정한 걸음으로 고개를 숙인 귀족들 사이를 걸었다.
고작 열한 살인 아이의 표정에서는 한 톨의 감정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걸음은 새하얀 꽃에 둘러싸인 황비의 관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덤덤한 표정과 달리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을.
작위가 높을수록 앞에 배치된 자리 때문에 황비의 관과 가까웠던 탓이었다.
생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황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리온은 이내 준비된 자리에 도달했다.
황후와 1황자가 자리한 그곳에.
“황후 폐하.”
칼리온은 황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괜찮은 게냐?”
어떤 감정도 띄우지 않은 칼리온의 인사와 안쓰러움이 묻은 목소리로 걱정하는 황후.
칼리온은 알고 있을까?
황비의 죽음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어떤 원인으로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절대 자연적인 일은 아니리라.
뒤이어 황제가 입장했지만, 다른 생각에 몰두한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시작하게.”
황제의 목소리가 시작을 알렸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장례식이 시작된 후였다.
대신관이 직접 주관하는 장례식은 고요하고 엄숙했다.
[…… ήλιος …… αιώνιος]황비의 관에 손을 얹은 대신관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말.
대신관의 손에서 시작된 은은한 빛이 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죽은 자의 안녕을 빌고 그 영혼이 무사히 신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축복하는 안식의 기도.
칼리온은 그 모습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저 겉으로 보이는 표정만큼 속도 아무렇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지.’
황궁 안에서 유일하게 제 편인 황비를 잃었는데 괜찮을 리가.
앞으로 칼리온이 자라 갈 길에는 더 이상 황비가 함께하지 못할 테지.
나는 슬쩍 시선을 올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족의 상징인 금발과 벽안의 중년.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황비의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어느덧 장례식은 마지막 순서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생전 고인과 친밀했던 자들의 마지막 인사.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황비는 생전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
수척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모습.
“……아실라.”
황제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황비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무심한 것 같기도, 어딘가 절절한 것 같기도 했다.
순간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황제는 황비를 사랑했을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원작. 그 안에서 주연을 제외한 조연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지금 나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들은, 더는 그저 활자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저마다의 감정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인격체였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아무 말 없이 황비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황제가 몸을 돌렸다.
그 후로 황비에게 다가간 건 황후였다.
채도 낮은 은발에 하얀 드레스 차림의 황비는 붉은 적발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황후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황후는 황제와 같이 그저 황비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말 없던 황후가 이내 몸을 돌렸다.
‘……칼리온.’
칼리온이 그런 황후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잠시 멈칫했지만, 이상하다 여기기에는 아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관 앞에 도착한 칼리온의 표정은 이전처럼 무심하지 못했다.
세게 쥔 주먹과 미약하게 떨리는 눈꺼풀에서 차마 전부 숨기지 못한 슬픔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음껏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졌다.
나는 그제야 황비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
그저 원작이 바뀌었다고 표현하는 건, 이들을 여전히 활자 속 인물로 여길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단순히 표현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칼리온은 곱게 포개진 황비의 손 위로 느릿하게 제 손끝을 가져다 대려다가, 이내 조금의 거리를 남겨 두고 떼어 냈다.
그건 차마 온기 잃은 손을 만질 용기가 없어 거둔 것처럼 보였다.
내 착각에 불과할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저 밑으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원작이 뒤틀린 이유가 나라면.
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나 때문에 칼리온이 하나뿐인 자기편을 잃은 거면 어떡하지.’
고의가 아닐지라도 나비 효과의 시작이 나인 건 반쯤 확실했다.
죄책감과 동시에 책임감이 같이 몰려들었다.
지금 당장 내가 칼리온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황비의 죽음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의 힘이 되어 줄 수도 없다. 지금 당장은.
‘내가 도울 거야.’
하지만 나아갈 미래에서 그를 돕는 건 가능하리라.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에리타, 괜찮아?”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느껴졌는지 에일런이 소곤거리며 물었다.
나는 애써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조금만 참으면 금방 끝날 거야.”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대답한 나는 자꾸만 밀려드는 생각을 털어 낸 채 앞을 응시했다.
죽은 어머니를 뒤로한 채 걷는 칼리온을 보자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미안, 칼리온.’
어찌 되었든 그야말로 그저 피해자일 뿐이니까.
내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순서가 마쳤다.
신전 문을 나서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새하얀 공간의 가장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장례식을 마침과 동시에 뚜껑이 덮인 황비의 관이 자리해 있었다.
그 관 앞에서 울고 있는 칼리온의 모습은, 그저 내 생각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내가 도울게요.’
나는 속으로 닿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