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23화(23/218)
장례식이 끝난 후,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무엇도 아닌 황제의 부름 때문에.
“대공 전하.”
“……하켄 백작. 오랜만에 보는군.”
“그리 가문 이름까지 붙여 불러 주시는 건 여전하시군요.”
아버지를 부른 사람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슬쩍 에일런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머리 위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뻔뻔하게 모른 체했다.
아버지와 얘기하는 거로 봐서는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사이 같은데.
그런데 저 할아버지의 가문 이름이 묘하게 익숙했다. 하켄, 하켄…….
“예. 저야 늘 황궁에 있으니까요. 대공께서 수도에 오시지 않으면 뵐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
곰곰이 떠올려 보던 나는 황실 관련 공부를 하며 배웠던 그의 직책을 기억해 냈다.
‘황궁의 시종장……!’
하켄 가문은 대대로 황궁의 시종장을 역임했다.
제이슨 하켄. 그 역시 선황제부터 지금의 황제까지 2대에 걸쳐 시종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로열패밀리의 비서실장인 셈이지.
‘후후. 배운 보람이 있네.’
힌트를 받아 알아챈 거지만 어쨌든 뿌듯한 건 뿌듯한 거니까.
근데 그런 사람이 아버지를 불렀다는 건…….
“뭐, 오랜만에 인사나 나누러 온 건 아닐 테고. 폐하께서 보자시나?”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된다는 제 말은 다 까먹으신 게지요.”
아버지의 삐딱한 말에 노인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은 생각보다 더 친밀한 관계인 듯싶었다.
시종장이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지만…….
‘왠지 허술한 원작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정말이지 원작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댔다.
“……흠흠. 황제 폐하께서 잠시 뵙길 원하십니다.”
“별로 달갑지 않은 말이군.”
시종장의 말에 아버지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대공자님과 대공녀님은 따로 모시고 있겠습니다.”
“쯧.”
미간을 찌푸린 아버지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모습에서 아버지가 황제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음. 저 사람은 황제의 시종장인데 다 일러바치진 않겠지?
에이, 아버지랑도 아는 사이 같았는데. ……설마.
그 이후 오 분여 동안 불안해했다는 건 비밀이다.
***
결과적으로 나와 에일런은 정원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시종장 할아버지와 함께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우리 역시 안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했지만, 답답할 것 같아서 그냥 정원이나 구경하겠다고 했다.
왠지 궁에 들어가는 건 좀 꺼려지기도 했고.
‘꼭 저런 데 들어갔다가 누군가를 만난단 말이지.’
흔한 소설의 클리셰가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탁 트인 바깥에 있을 거란 말씀.
‘……근데 이 황궁 정원은 도대체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지?’
분수를 보석으로 장식해 놓은 건 다 털려도 좋다는, 뭐 그런 뜻인가?
“에리타, 무슨 생각 해?”
“저 분수를 팔면 얼마가 나올……, 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황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죽을까.
아무리 열심히 어린애인 척을 하면 뭐 하냐고. 이런 말 한마디로 다 까먹게 생겼는데.
잠시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는 것 같던 에일런은 체념한 내가 한숨을 내쉬자 이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망할 입.’
아무래도 내 입은 뇌를 거칠 필요가 좀 있다. 속에 있는 생각을 너무 잘 뱉어.
“그냥 분수가 너무 화려해서……. 음. 그러니까 이런 트인 공간에 보석으로 장식된 분수는 위험할 것 같다는 뜻이랄까요…….”
애써 쥐어 짜낸 변명은 내가 생각해도 참 웃겼다. 안 좋은 쪽으로.
점점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는 끝에 가자 거의 모기만 해졌다.
……그냥 변명하지 말걸.
“저 분수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저택 정원에도 하나 놔 줄까?”
“오라버니…….”
“응, 에리타.”
“……놀리지 마세요.”
원망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해사한 웃음뿐이었다.
그렇게 웃으면 다 되는 줄 알지.
쪽팔린 마음에 괜히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에일런은 자기 얼굴이 어떤지나 제대로 알고 웃는 걸까. 저렇게 웃으니까 대공령 하녀들이 죄다 반하는 거 아니야.
나는 어쩌다 듣게 된 하녀들의 잡담을 떠올렸다.
‘차가우신 줄로만 알았는데 아가씨 앞에서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거 있지!’
‘맞아. 그리고 좀 차가우시면 어때? 사람이 반전 매력이라는 게 있어야지.’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들은 그 뒤로도 십 분 동안이나 에일런의 외모를 찬양했다.
‘그게 다 저렇게 웃는 얼굴 때문이란 말이지.’
내가 뚱한 표정으로 에일런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기사 한 명이 나타났다.
거의 허공에서 나타난 것과 다름이 없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이라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다.
“소대공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에리타, 잠시만 기다려 줘.”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에일런이 기사와 함께 몇 걸음 떨어졌다.
무표정으로 기사의 말을 듣는 에일런은 나와 이야기하며 웃고 있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저렇게 티가 나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착각이라고 생각했지.’
원래 에일런이 잘 웃는 성격이 아니라는 메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나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일런은 내 앞에서만 잘 웃고 다정한 오라버니라는 걸.
같이 지낸 시간이 1년을 넘어가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나와 있을 때는 항상 웃고 있는 그라, 내가 에일런의 무표정을 보는 일은 딱히 없었다.
내 앞에서 에일런이 차가운 표정일 때가 있던가?
‘가끔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나……, 내가 아플 때 정도인가?’
에일런의 무표정을 보는 것도 나름 좋은 점이 있긴 했다.
하녀들이 말한 반전 매력이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근데 아무래도 대공가의 기사들은 전부 은신술의 대가들 같단 말이야.
이제는 익숙해졌다지만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기사들이 신기한 건 여전했다.
‘특히 카일 경은 거의 닌자 수준이던데.’
검술이 수준급에 오르면 그렇게 되는 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 보면 가끔 카일 경을 볼 때가 있었다.
카일 경은 호위대의 대장인데, 내가 저택에서 유일하게 친해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음, 그러니까 나와 접점이 있는 사람 중에서.
보기는 자주 보는데 항상 휙 나타났다가 휙 사라지니까 말을 걸 틈도 없단 말이야.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사와 무어라 얘기를 나누던 에일런이 난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에리타, 확인할 게 있어서 잠시 가 봐야 할 것 같아…….”
“확인할 거요?”
“응. 지금이 아니면 곤란한 일이라……. 미안해. 잠시 궁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에일런의 성격상 저렇게 말한다면 백 퍼센트 중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재수 없어 보이겠지만 에일런은 보통 다른 일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니까.
“음. 그러면 그냥 정원 구경이나 마저 하고 있을게요.”
“혼자서 괜찮겠어?”
내 말에 에일런의 표정이 금세 걱정으로 물들었다.
1년 동안 제일 안 변한 건 아버지와 에일런의 과보호였다.
“괜찮아요. 아버지가 주신 반지도 있고, 그리고 여기는 황궁이잖아요.”
설마 황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그리고 안에서 기다려 봤자 답답하기만 할 텐데.
“그럼 금방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반지 문지르고. 알았지?”
“네. 다녀오세요!”
나는 멀어지는 에일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내 검은 흑발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적당한 데 찾아서 연습이나 하고 있어야지.”
오늘은 정원이 개방된 상태라 아직 떠나지 않은 귀족들도 몇몇 보였다.
‘사람들 없는 데로 가야지.’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가려던 내 걸음은 그 순간 들려온 단어에 붙잡혔다.
촘촘한 풀 사이로 바라보자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보였다.
아마 황궁의 시종들인 듯싶었다.
“2황자 전하는 이제 어찌 되려나.”
“딱 보면 모르겠어?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으니 얌전히 살아야지, 뭐.”
“하긴. 금발도 아니고, 거기다 황비마마까지 떠나셨으니.”
덤불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은 적나라했다.
저들끼리는 목소리를 죽인다고 죽인 모양이지만, 그럴 거면 집에 가서 하든가.
아무리 당사자가 없는 데서는 상사도 욕한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 이런 탁 트인 곳에서 저런 말을 해? 그것도 방금 장례식을 치른 사람을 주제로?’
사람이 도리라는 게 있지. 마음 같아서는 죄다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와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나는 여전히 나불대는 그들을 향해 작은 심술을 부린 후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들 위로 내가 흘려보낸 마력이 도착하자 곧이어 결과가 나타났다.
“아악! 이게 뭐야!”
“으아악! 갑자기 무슨 벌레가……!”
잠시 후 들려온 비명이 통쾌했다.
이러려고 배운 마법은 아닌데, 어쨌든 좋은 일에 썼으니 뿌듯하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러게 마음을 좀 곱게 쓰지 그랬어요.’
가는 말이 고와야 봉변 안 당하지.
안 그래?
***
잠시 더 걷다 보니 어느새 인적이 드문 안까지 들어온 뒤였다.
“음. 조금만 있다가 다시 나갈까?”
에일런은 금방 온다고 했지만, 중요한 일이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적당히 덤불이 우거진 곳을 찾은 나는 잔디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메리가 알면 또 뭐라고 하겠지.”
갑자기 연무장이나 숲에서 그냥 주저앉을 때마다 호들갑을 떨던 메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근데 이게 편한 걸 어째.”
어디 앉을 때마다 손수건이며 천이며 깔고 앉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지금은 귀족으로 살고 있다고는 해도 내게는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십 년 가까이 평범하게 살아오면서 든 습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겠어?
나는 떠나기 전에 클린 마법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고 팔을 뒤로 뻗어 잔디를 짚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소설에 나오는 장례식에서는 항상 비가 오던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
비가 오는 날과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날.
그 어느 날이라도 소중한 이를 잃어 슬픈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는 못할 테지.
그럼 눈물을 가려 줄 수 있는 비가 더 나은 걸까.
내가 불러낸 빛 무리들이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심란하다, 심란해.”
차라리 여기가 원작 속 세계라는 걸 몰랐으면 속이라도 편했을 텐데.
평범하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은 틀린 거 하나 없었다.
인생 한번 평탄하게 살아 보려고 했더니 복잡한 게 왜 이리 많은지.
그때였다.
자박자박-
순식간에 가까워진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
나는 적막을 깨트린 주인공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벽안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