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24화(24/218)
투명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벽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은발의 남자아이. 하얗게 질린 얼굴은 한 번 보았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남주였으니까.
너무 놀라면 소리도 못 지른다던가.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이게 뭔 일이야.’
아니, 누가 여기서 남자 주인공을 만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고.
얼마나 놀랐는지 따져 보자면, 내 주위를 날아다니는 중인 빛 무리를 없앨 생각도 못 할 만큼 놀랐다.
멍하니 흩날리는 은발을 바라보던 나는 몇 초가 흐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잠깐. 칼리온은 황자잖아.’
황자를 봤음에도 넋을 놓고 인사도 안 한다?
신분제가 확연한 이곳에서는 심하면 황족 모독죄까지도 갈 수 있는 문제였다.
이제껏 봤던 소설에서 황족 모독죄로 목이 댕강 날아간 사람들만 몇이던가.
‘……망했다.’
나는 쩌적 굳어 있던 몸을 후다닥 일으켰다.
“황자 전…….”
“쉿.”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인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칼리온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동그랗게 떠진 눈만 끔뻑였다.
“잠시만 조용히.”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미성이 자그맣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가까이서 남주의 목소리를 듣게 되다니.
정신이 혼미하다 못해 가출할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이 멈춘 머리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 자 전하!”
“어디 계십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칼리온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온 님! 이 황자 전하!”
아, 이래서 조용히 하라고 했구나.
아무래도 사람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들다가 나와 마주친 듯했다.
나는 왜 하필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까. 조금 더 깊이 들어갔어야지.
때늦은 후회가 불쑥 솟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언제나 일이 벌어진 후였다.
누군가를 피해 숨은 모양새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돼서 그런가, 다리가 후들거……
부스럭-
……렸네.
‘망할.’
왜 많고 많은 공간 중에 딱 내 발 뒤에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는지.
왜 하필이면 그 나뭇가지가 부서지기 쉽게 말라 있었는지 백 자 이내로 서술하시오.
“이봐.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나는 모르겠는데.”
“아니, 저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고.”
그를 찾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오면 바로 들킬 것 같은 상황.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슬쩍 올려다본 칼리온의 표정은 낭패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긴장을 눌렀다.
안 그래도 미안한 일투성이인 마당에. 아직 건재한 양심이 쿡쿡 쑤셨다.
‘……아버지랑 페른이 다른 데서는 마법 쓰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칼리온에게 곤란한 일이 더 생기는 건 싫었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이건 내 탓이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칼리온이 들킬 일은 없었겠지.
마침 이럴 때 딱 좋은 마법이 있었다.
어차피 잠깐만 쓰면 될 것이었다. 내가 저택에서 종종 사용하던 거라 익숙하기도 하고.
나는 슬며시 손을 휘저었다.
내 손끝에서 촘촘히 빠져나간 마력은, 반투명한 막이 되어 칼리온과 나를 감쌌다.
갑자기 눈앞에 생겨난 흐릿한 막에 칼리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주 쓰던 마법이라 다행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칼리온의 팔을 톡톡 두드리자 덤불 너머를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말해도 괜찮아요.”
“…….”
“저쪽에서 이쪽 못 보고 못 듣는 마법 썼으니까 크게 움직이거나 말하지만 않으면 돼요.”
내 말에 칼리온은 우리를 감싼 막을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미묘한 표정을 보니 영 믿기 힘들어 하는 눈치였다.
하긴. 나 같아도 웬 꼬맹이가 마법 썼으니 말해도 된다고 하면 미심쩍긴 하겠다.
게다가 하급 마법은 아니니까.
그때, 때마침 내 마법을 증명해 줄 사람이 도착했다.
“황자 전하!”
풀숲 너머에서 황실 기사단의 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나타났다.
어차피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긴 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이쪽에서 소리가 났다고.”
“참나. 눈은 장식이냐? 네놈 눈에는 황자 전하가 보여?”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기사들의 눈에 비치는 이곳은 평범한 정원의 모습일 테지.
한 기사가 썩은 표정으로 다른 기사를 타박하고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분명 들었는데…….”
부스럭 소리를 들은 기사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심쩍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다른 기사를 따라 몸을 돌렸다.
말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충분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펼쳐 두었던 마법을 거둬들였다.
“갔다…….”
긴장이 풀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택에서 가끔 사용인들을 피해 숨으려고 사용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피로감이었다.
두 사람 이상을 대상으로 사용한 적이 처음이라 그런가.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칼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네?”
뭘 비밀로 한다는 말이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마법.” 하고 짧게 말했다.
“아.”
“…….”
“……감사해요, 황자님.”
느릿하게 뱉어 낸 감사 인사 이후로 다시 정적이 흘렀다.
칼리온은 말이 없었고, 나 역시 어두운 표정의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쉬이 무어라 말을 할 수도, 주제넘게 나설 수도 없었다.
정체에 국한된 것뿐이 아니라 이 상황 전체에서 나는 칼리온을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른다.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기를 몇 분.
“에리타, 어디 있어?”
저 멀리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일런이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온 건지, 아니면 느낀 것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흐른 건지.
우연한 만남의 끝이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가도 될지 잠시 망설이던 그때, 타이밍 좋게도 칼리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저…….”
“……공녀를 찾는 것 같습니다.”
무어라 양해를 구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칼리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네.”
“고마웠습니다. 숨겨 줘서.”
인사까지 들었으니 가면 될 텐데. 가슴 한구석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왜 하필 떠나려던 찰나에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게 생각났는지는 모른다.
어제 온종일 멍해 있던 내가 걱정된 건지 메리가 만드는 법을 알려 줬던 행운의 고리.
하얗게 질려 있던 칼리온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뿐이라 그런가.
직접 만들어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
“황자님, 이 고리를 가지고 있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대요.”
“…….”
“행복하셔야 해요. 꼭요.”
딱히 미신을 믿고 만든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했다.
칼리온의 손에 고리를 쥐여 준 나는 이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였기에 이 상황이 마음 아파서 그랬을지도.
원작에서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니까.
칼리온이 내 가족의 죽음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다. 분명히 원작에서 그들은 적대 관계였으니까.
스쳐지나 듯 서술된 내 가족들의 죽음.
아슬란은 전투 도중 이유 모를 폭주로 인해 죽었고, 에일런은 아슬란의 죽음으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자결했다.
‘하지만 자세한 원인은 몰라. 아버지가 왜 폭주했는지도, 에일런이 왜 자결했는지도.’
정확한 사정은 원작의 그들만이 알고 있을 터.
나는 복잡한 머리를 저으며 걸음을 내딛으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대공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야.’
눈앞이 하얗게 물들며 어떤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직격했다.
이 목소리는 누구지?
생각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릿하게 보이는 피투성이의 남자.
‘……확실히 대공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어. 분명 대공이 형님의 편에 서게 만든 이유가 있다.’
뭐야. 이건 도대체 뭐냐고.
점점 머리가 아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인 장면.
그건 깨진 거울로 보는 것처럼,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마, 법이 …… 주라니……! 미, …… 게 틀림 ……!’
처음부터 희미하던 장면과 달리 목소리만은 선명했었는데.
지금은 장면은 물론 목소리마저 노이즈라도 낀 듯 지직거렸다.
“윽!”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고통이 엄습했다.
마치 수많은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느낌.
힘이 풀린 몸이 아주 느린 속도로 넘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에리타!”
폭-
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바닥을 향하던 내 몸이 당겨졌다.
익숙한 품이었다.
“……오라버니?”
그것을 자각하자 머리가 깨질 것 같던 고통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에는 나와 에일런 둘뿐이었다.
“……괜찮아?”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건 뭐였지.
내가 영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느껴졌는지, 에일런이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에리타, 정말 괜찮아?”
“……네. 잠깐 발을 헛디뎠나 봐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니야. 안 다쳤으면 다행이지.”
아까 넋을 놓았던 탓인지 에일런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우선 지금은 집에 가는 게 먼저야.’
나는 애써 방금 있었던 일을 잠시 밀어 두었다.
“으응. 이제 집에 가는 거예요?”
“응. 아버지도 곧 오실 거야. ……그런데 정말 별일 없었던 거 맞지?”
“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걸어서 그래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목소리를 들었어요. 흐릿한 장면 속에 있던 사람은 ……였어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피곤한 탓에 헛것을 봤을 가능성은?
‘……그럴 리가.’
그 장면과 목소리, 그리고 끔찍했던 그 고통은 절대 착각일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은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기이한 것이었다.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
칼리온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 아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이 끝난 이후, 치미는 토기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무작정 궁을 뛰쳐나왔다.
‘얌전히 사세요, 황자.’
뻔뻔하게 슬픈 얼굴을 하고서는 옆을 스쳐 지나가며 제게 속삭이던 황후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던 게 분했고, 제 어머니가 죽어 감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능함이 혐오스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는 것 역시 버겁고 두려웠다.
그런 그가 무엇인지 모를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걸음에서 맞닥뜨린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마법을 쓰던 작은 여자아이.
이름 한 자 듣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황족의 금발만큼이나 뚜렷한 흑발은 그 자체로 가문을 상징했으니까.
그 아이가 사라진 풀숲 사이를 응시하던 칼리온은 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투박한 모양새의 작은 고리가 놓여 있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듣기로는 칠 년 동안이나 가족들의 존재도 모른 채 살아왔다던데.
그런 사정을 가졌다는 아이는 남을 위로할 정도로 다정했다.
처음 만난 이에게도 소중한 물건을 쥐여 줄 만큼이나.
복잡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칼리온은 이윽고 제 궁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칼리온의 손에는 작은 고리가 꼭 쥐여 있었다.
나풀나풀 날아온 나비는 잠시 그 주변을 맴돌다, 이내 하늘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의 만남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