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26화(26/218)
8년 후.
넓은 성안을 돌아다니는 하녀들의 걸음이 분주했다.
“도서관은 봤어?”
“제일 먼저 가 봤지. 날도 추운데 어디 계신담.”
그 이유는 누군가를 찾기 위함이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이가 귀찮을 법도 했으나, 그들의 표정은 부정적인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그중 한 명이 눈이 내리고 있는 성밖을 바라보았다.
“설마 밖에 나가시진 않으셨겠지?”
“에이. 날씨도 추운데 감기 걸리실 거 뻔히 알면서 나가셨을까.”
“하긴. 저번에 한바탕 감기로 앓아누우셨던 뒤로는 잘 안 나가시더라.”
“그때 주인님이 아가씨한테 주실 영약 재료 찾으신다고 산을 다 뒤집어엎으셨잖아.”
못 말린다는 듯한 말투에는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호의가 듬뿍 배어 있었다.
“그럼 어디 조용한 데서 연구하시거나 아니면 책 읽고 계신가 보다. 얼른 찾으러 가자.”
“그래.”
잠시 재잘거리던 그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가씨!”
“에리타 아가씨!”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하녀들의 목소리가 성을 울렸다.
***
하녀들이 애타게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는 지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낡은 책을 빨려 들어갈 듯 훑어 내리던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지렁이 같은 글씨였지만 확실했다.
<망할 흑마법>
휘갈긴 글씨체로 적힌 단어.
드디어 고대 서적에서 원하던 부분을 찾은 것이다.
“……찾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더 읽어 보아야 알겠지만, 오랜만에 찾은 흑마법의 흔적이니 기쁠 수밖에.
“휴. 한 달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
지난 한 달, 데뷔탕트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눈이 빠지게 책을 뒤진 보람이 있었다.
기쁜 마음에 절로 실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자, 그럼 어디 읽어 볼…….”
“아가씨!”
“……마릴린?”
고서를 읽으려던 찰나,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릴린이었다.
겨울에 땀이 날 정도로 뛰어온 모양이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여기 계셨어요?”
“응……. 혹시 나 찾았어?”
한번 집중하면 부르는 소리도 잘 듣지 못하는 버릇을 고쳐 보려고는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애초에 몰두하는 성격 탓이라 내가 고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
“미안……. 못 들었어.”
“……정말. 아가씨니까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림도 없죠. 멋쩍게 웃으면서 사과하자 마릴린이 새초롬한 얼굴로 답했다.
“어쨌든 얼른 가요. 준비하셔야죠.”
“준비……?”
“네.”
웬 준비람. 오늘 일정 중에 나가는 게 있던…….
“지금 몇 시야?!”
잠시 오늘 일정을 체크하던 나는 떠오르는 생각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까 봤을 때는 다섯 시 조금 안 됐었어요.”
“뭐? 파티는 여섯 시잖아!”
“그러니까요. 지금 바로 가서 준비하셔야 해요.”
나는 울상을 지으며 후다닥 일어섰다.
그런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쉰 마릴린이 시니컬하게 대답하며 흐트러진 내 옷자락을 정돈했다.
나는 아까 보던 고서와 널브러진 책 몇 권을 더 아공간에 넣은 뒤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내 방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보신 거죠.”
“하, 하하…….”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고서를 뒤지는 데 몰두한 나머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
평소에도 가끔 있던 만찬이지만, 오늘은 저택 사용인들도 모두 함께하는 날이었다.
오늘은 8년 만에 수도로 가는, 그 바로 전날이었다.
***
하녀들의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히 움직인 덕분에 제시간에 맞추어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평소와 달리 공들여 꾸민 모습이 어색하긴 했지만, 오늘은 이곳에서 있는 마지막 날이니까.
나를 꾸며 준 하녀들도 전부 저마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오늘도 고마워. 나인 줄 모르겠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맞아요! 아가씨가 제국에서 제일 예쁘신걸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떨떠름하게 반박했지만, 내 의견은 하녀들에게 처참히 묵살당했다.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나는 얼른 방을 떠나려 일어섰다.
“아버지!”
“그래.”
문을 열고 나서자, 그 앞에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약식 정복을 걸친 아버지는 과장 조금 보태어 눈이 부셨다.
‘……역시 신은 불공평해.’
우리 가문의 시초에 마족이 있다더니, 이럴 때 보면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과하게 잘생긴 것도 모자라 8년의 세월에도 바래지 않은 미모라니.
‘원래 악마는 예쁘고 잘생겼다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가가자 아버지가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에 배시시 웃으며 손을 얹으니 조금 서늘한 온도가 느껴졌다.
“아버지도 정복 입으셨네요?”
“……네가 일주일 전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여상히 대꾸했지만, 그 무심한 어투에도 배실배실 웃음이 나왔다.
“정말 들어주실 줄은 몰랐어요. 불편하다고 별로 안 좋아하셨잖아요.”
물론 내가 일주일 전 작은 송별 파티를 하기로 한 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말하긴 했지.
아버지가 정복 입은 거 보고 싶다고.
연회 같은 데라도 가면 모르겠지만 그런 데도 갈 일이 없다 보니 지금까지 아버지가 꾸민 걸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기사단장님한테 들은 얘기 때문이긴 하지만.’
뭐, 그래도 워낙 불편한 차림을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라서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비주얼을 엑스트라로 쓸 생각을 했지? 이 모습을 보면 당장 그 망할 원작을 다 뜯어고칠 텐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딱 지금 아버지 얘기였다.
하여간 이 집은 하나같이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없어. 아버지도 에일런도 국보급 미모니 말 다 했지 뭐.
“어쨌든 저는 너무 좋아요. 이렇게 입으시니까 기사단장님 말이 와닿기도 하고?”
“가힐말이냐?”
“네. 가힐 경이 아버지가 저만 할 때 얘기 해 주셨거든요.”
연회만 갔다 하면 그렇게 인기가 많으셨다고 하던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이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힐이 또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스산하게 중얼거리는 폼이 살벌했지만, 막상 기사단장님이 허허 웃으면서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러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갈 걸 알고 있었다.
8년이라는 시간은 그랬다.
가족의 사소한 습관까지도 알게 되는 그런.
파티 장소로 정한 연회장에 가까워지자,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친근한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려올 무렵. 아버지가 잠시 걸음을 멈추어 섰다.
“……원치 않으면 수도에 가지 않아도 된다.”
“네?”
의아한 듯 바라보자 잠시 망설이던 아버지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람.
“요즘 들어 잠도 못 잔다고 전해 들었다. 해가 뜬 후에야 잠들기 일쑤라지.”
“아…….”
그건 밤마다 고서를 뒤진다고 그런 건데.
나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다 알고 계셨구나.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이런 고민을 하실 줄 알았다면 티가 안 나게 할걸.
때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마침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는 괜찮아요. 그건 사정이 조금 있어서 늦게 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시선에 담긴 걱정에 나는 괜히 생긋 웃으며 답했다.
물론 모든 걸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하지만 아버지 역시 모든 걸 알 수는 없겠지.
9년 전 내가 한 다짐은 아직 유효했다.
내가 밤을 새워 가며 찾아야 했던 정보가 무엇인지,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족들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래. 대신 언제든지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말해 주렴. 알았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부탁에 가깝게 들리는 아버지의 그 말이 꼭 무언가를 알고 하는 당부 같았다.
‘뭐, 내 착각이겠지만.’
아버지가 독심술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아시겠어.
“그럴게요. ……사람들이 저희 기다리겠어요. 얼른 가요!”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에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부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랬기에, 반 발짝 뒤처진 아버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때의 나는 아버지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았어야 했다.
***
아슬란과 에리타의 입장을 마지막으로 시작된 파티는 사교계의 연회만큼 화려하진 않았으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요리사들은 마음껏 솜씨를 발휘했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이 나서 멜로디를 연주했다.
오늘만큼은 성의 모든 이들이 저마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즐겼다.
고상하거나 우아하지는 않지만 즐거운 파티.
그 중심에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에리타가 있었다.
“아가씨, 너무 어여쁘세요!”
“정말? 엘리도 정말 귀엽다! 노란색이 엄청 잘 어울리네.”
가론이 한눈에 반하겠어?
씩 웃으며 속삭이는 말에 엘리라 불린 하녀가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장면.
2년 전만 해도 고성은 전혀 이런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얼어붙은 북부에 걸맞게 냉기가 흐르는 곳이었지.
그랬던 이곳이 활기차게 변하게 된 건 아슬란과 함께 온 에리타의 공이었다.
‘에반! 오늘은 고기 어때요?’
‘말만 하십시오. 이 제가 아주 기깔 나게 해 드리지요!’
‘음, 그럼 매콤한 닭 요리로 부탁해요!’
저들의 할 일만 하던 주방이 활기차졌고…….
‘엘리, 베티! 같이 뒤뜰에 갔다 올래?’
‘뒤뜰요?’
‘응. 말려서 쓸 만한 꽃을 찾으려구.’
늘 굳어 있던 사용인들이 웃음을 달고 살게 만들었다.
아슬란은 그 사이에서 화사하게 웃는 에리타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와인을 집어 들었다.
……항상 그렇게 웃으며 살면 좋으련만.
제 아이는 여전히도 홀로 하는 고민이 많았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와인의 끝맛이 썼다.
“주군, 왜 여기 계십니까? 파티를 즐기셔야지요.”
때마침 싱글싱글 웃는 낯의 페른이 다가왔다.
“그리 웃는 걸 보니 내일 준비는 다 된 모양이군.”
“꼭 이렇게 초를 치십니다…….”
아슬란이 픽 웃으며 던진 말에 금세 구겨진 표정이지만.
“페른.”
아슬란은 여전히 제 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페른을 불렀다.
페른은 그런 그의 표정이 어딘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예, 주군.”
“무엇이 저 아이를 편히 쉴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
“…….”
“저 작은 머리 안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어.”
흑마법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리 절박하게 매달리는지.
고저 없이 뱉어진 말에 페른의 몸이 움찔거렸다.
“페른.”
나지막한 부름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위험하지 않게 도와라.”
“무얼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척하기는. 저 아이의 마법도, 아이가 알아보고 있는 것도 전부 말이다.”
역시나 발뺌이 먹힐 리가 없지.
“……하하. 그럼요. 그러겠습니다.”
겉으로 어색하게 웃는 페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가씨, 그러기에 제가 주군께서는 전부 알고 계실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죄짓고는 못 산다더니.
지금 제가 딱 그 짝이 아닌가.
애초에 8년 전 흑마법에 대해 알려 준 게 실수였다.
간단한 호기심일 줄 알았던 게 지금까지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그 역시 왜 제 아가씨가 흑마법에 대해 알아보는지는 몰랐다.
‘……거기에 대해 물으면 짓는 표정.’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보고도 더 물을 수는 없었으니까.
두 남자의 복잡한 시선 끝에는 마냥 해맑아 보이는 에리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