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27화(27/218)
“아가씨, 더 챙기실 건 없으신가요?”
“어차피 저택으로 가는 건 똑같은데, 뭘.”
나는 메리의 물음에 여상히 대답하며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미 한차례 짐을 정리한 뒤라 생활감이 사라진 방은 휑한 구석이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들은 이미 아공간에 넣었지.’
내 또 다른 신분에 관련된 서류나, 지금껏 모아 온 단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럼 가실까요? 주인님은 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응. 얼른 가자.”
지난 이 년간 있었던 북부를 떠나려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본래는 겨울마다 아버지나 에일런 둘 중 한 명만 북부에 왔었는데, 이 년 전 몬스터의 출현이 급격히 많아진 나머지 아버지가 1년 정도는 북부에 머물러야 했다.
마침 에일런은 수도로 가야 했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함께 북부로 왔다.
혼자 대공령에 남아 있는 건 아버지가 절대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이 년 전에 대공령에서 이쪽으로 올 때는 별생각 안 들었던 거 같은데.
그런 감상을 마지막으로 나는 북부를 떠나 수도로 향했다.
누군가의 1년 이른 귀환으로 인해 더 빨라진 원작을 따라서.
***
북부에서 수도까지 가는 일정은 총 이틀에 걸쳤다.
북부에서 대공령까지 마법으로 이동. 하루를 쉰 후에 다시 대공령에서 수도 저택까지 마법으로 이동.
수도로 연결된 마법진 앞, 내 귀에 투덜거리는 페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도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단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페른이 조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물론 먼 거리의 이동 마법이 힘들긴 하지만, 그 역시 대마법사였다.
“페른……. 아직 삼십 대 중반도 안 됐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저는 마법사라니까요! 주군같이 강철 체력이신 분은 괜찮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아니라구요.”
웃으며 타박하자 페른은 지금껏 백번은 더 강조한 마법사의 체력에 대해 또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 훈훈하고 믿음직스럽던 페른은 애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체력이 문제인 거라면 가힐에게 말해 두지.”
“……다물겠습니다.”
언제였는지 체력을 핑계로 농땡이를 치던 페른이 기사단장님께 잡혀갔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날 페른의 몰골이 좀비 같았다는 건 확실히 기억난다.
‘그 후로는 단장님이라면 학을 뗐지.’
페른이 엄살을 떨어 댔으나 결국에는 불만을 중얼거리며 마법을 펼쳤다.
대마법사가 되었어도 그는 여전했다.
이동 마법 특유의 하얀 빛이 발하고, 몇 초 후.
감았던 눈을 뜨자 서서히 드러나는 풍경은 내 기억에 있는 곳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아버지. 에리타.”
그 누구보다도 반가운 사람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미남이 서 있었다.
내 하나뿐인 오라버니, 에일런이었다.
언제 봐도 훤칠하게 잘 자랐다.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이던 얼굴이 금세 부드럽게 풀렸다.
“오셨습니까.”
“그래.”
아버지와 에일런 사이에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다정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오라버니!”
반년 만에 보는 터라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가 안기자 익숙한 향이 훅 끼쳤다.
아버지처럼 서늘한 품의 온도.
아이처럼 안긴 것에 부끄러울 틈도 없었다.
“에리타, 잘 지냈어?”
“네에. 오라버니는요?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아요…….”
사실 잘난 얼굴은 여전했으나 조금 날카로워진 것도 같은 턱선에 마음이 아팠다.
2년 전 내가 아버지와 북부로 갈 때, 오라버니는 홀로 황도로 향했다.
“내 동생은 여전히 예쁘네.”
에일런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자 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전부 수도 저택에만 있던 사용인들이었다.
‘……이제 이 놀람도 익숙하단 말이지.’
처음 북부에 갔을 때도 딱 이런 반응이었다. 상대가 에일런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물론 한 일주일만 지나면 전부 익숙해질 걸 알고 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니까.
“둘 다 그쯤 하고 우선 들어가자꾸나.”
“그래. 날이 서늘하니까 안에 가서 얘기하자.”
내가 코를 훌쩍이자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한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월의 수도는 서늘했다.
그제까지 있던 북부의 눈 내리는 겨울에 비하면 따뜻한 날씨였지만, 어쨌든.
저택으로 들어선 우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가볍게 차만 마시기로 했다.
8년 전이긴 하지만 한 번 와 봤다고 아주 어색하지는 않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모마일차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머금었다.
“에일런,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었느냐.”
“예. 북부는 괜찮습니까?”
“늘 같지. 그래도 최근에는 눈에 띄게 몬스터 웨이브가 줄었더구나.”
아버지와 에일런은 간단한 안부를 건네고 있었다.
둘 다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그런지 딱딱한 말이 오가긴 했으나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예전에는 아무 말도 없거나, 아니면 단답형 대화가 주로 이루어지는 탓에 빈말로도 화목하다고 할 수 없었거든.
“예. 괜찮았습니다. 거슬리는 게 몇 있긴 하지만.”
부자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귀만 쫑긋 세우고 있던 나는 에일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슬리는 부분이라니.”
아, 뭔지 알겠다.
누가 아버지 아들 아니랄까 봐 에일런도 귀찮은 거라면 질색했다.
그런 그가 가식이 판치는 사교계, 그것도 그 절정인 수도를 좋아할 리가 없지.
“아버지가 수도를 싫어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에일런의 한마디에 아버지는 곧바로 이해한 듯했다.
역시 그거일 줄 알았어.
“그런 부분이 있긴 하지.”
이런 부분에서 통하는 부자 사이에서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수도에서 사교계에 데뷔하려니 아주 속이 바짝바짝 타는구나.
빨라진 원작만 아니었어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더 있었을 텐데.
“에리타.”
“네.”
“수도에는 이상한 놈들도 많다. 더군다나 이 시기가 되면 더 많아지지.”
나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놈이 많다니. 너무 뜬금없는 말인데.
“이상한 사람들요?”
“그래. 데뷔탕트가 다가오지 않느냐. 저들 집에 박혀 있던 머저리들이 죄다 몰려드는 시기란다.”
다정한 어투에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내용이었다.
“음. 그러니까 한 달 남은 데뷔탕트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곧 있으면 그런 놈들이 다 수도로 오겠지.”
“그건 아버지 말씀이 맞아.”
어느덧 아버지와 에일런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과보호라 여기기에는 나도 들은 게 있긴 했다.
매년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북부에 있다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지역을 넘어서 들려왔다.
하녀들이 전해 준 얘기나 몰래 보던 소설 같은 데서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에리타, 데뷔탕트 때 누가 춤을 신청하거나 다가오면 바로 얼굴을 후려치렴. 몹쓸 놈이다.”
“……네?”
“손을 대기 싫으면 발로 차도 된다. 뒤처리는 걱정하지 말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데뷔탕트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신문에 대서특필될 거다.
하지만 차마 진지한 둘에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나는 그저 애매한 웃음만 흘렸다.
재회의 반가움으로 시작된 티타임은 수도에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몹쓸 놈들로 끝났다.
***
“자, 오늘 수업은 끝이랍니다.”
“고마워요, 부인.”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인사하자 엠마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뭘요. 아가씨께서 잘 따라와 주신 덕에 예상보다 더 빨리 끝났네요.”
바로 사교계 데뷔하셔도 되겠어요.
나는 장난스러운 엠마의 말에 배시시 웃었다.
엠마 케이론.
대공가의 가신 중 하나인 케이론 백작의 부인이자 북부에서부터 내 사교계 데뷔를 도맡은 이였다.
“그런데 엠마까지 수도로 와도 괜찮아요?”
엠마의 수도행이 결정 나자 케이론 백작이 눈물 바람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건 유명한 얘기였다.
‘두 사람 금실이 워낙 좋아야지.’
하여튼 그런 이유 탓에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엠마가 같이 와 줬기에 마지막까지 준비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호호, 괜찮아요. 원래 가끔 떨어져 있기도 해 봐야 소중함이 더 커지는 법이랍니다”
엠마는 장난스레 말하며 우아하게 부채를 살랑였다.
“연애하실 때는 밀고 당기기가 필수예요. 아셨죠?”
“아하하. 제가 연애를요?”
“그럼요. 우리 아가씨도 이제 다 크셨으니까요. 물론 대공 전하나 소대공님의 반대를 뚫어야 하니 최대한 참한 영식이어야겠지만요.”
짓궂게 한쪽 눈을 찡긋거린 그녀의 말에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연애…….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 연애를 한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고등학교 때였나? 사실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아버지랑 에일런은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반대일 게 분명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을 데리고 와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을걸.
“아니면 제 아들놈도 괜찮아요.”
“……엠마 아들은 이제 열두 살이잖아요.”
“어머? 연하는 싫으세요?”
내가 열여덟인데 열두 살은 너무하잖아.
내가 난처하게 웃자 엠마가 농담이라며 깔깔 웃었다.
어차피 내 처지에 연애는 사치지만.
똑똑-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문을 열어 놨을 텐데?’
고개를 돌리자 벽에 기대어 선 에일런이 보였다.
어디를 다녀오던 참인지 외출복 차림이었다.
“소대공님, 아가씨,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내일 봐요, 엠마!”
인사를 건넨 엠마가 먼저 자리를 떴다.
이건 내 생각인데 엠마는 아버지보다 에일런을 더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에일런은 점심때 일정이 있었던 탓에 아침에 본 게 전부였던 터라 반가웠다.
수도에 온 지 사흘이 지나긴 했지만, 지난 반년간 못 봤더니 계속 보고 싶더라고.
“수업은 끝났어?”
“네. 안 그래도 좀 전에 끝났어요.”
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다른 일정은 없고?”
음. 당분간 연구는 안 할 거고. 책은 이따가 밤에 볼 거니까.
“없어요.”
“그럼 같이 나들이라도 갈까?”
에일런의 말에 나는 벌떡 일어섰다.
“얼른 가요, 오라버니.”
후다닥 다가가 팔짱을 끼고 재촉하자 에일런이 낮게 웃었다.
마침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우리 오라버니.
“준비는 해야지.”
“저 지금 외출복 입고 있어요. 메리한테 모자랑 외투만 받아 오면 돼요.”
“응. 그럼 같이 가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 이런 다정한 남자 같으니.
“오라버니.”
“응?”
“저한텐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아요.”
에일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본 뒤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애 몇 번이나 했어요?”
“뭐?”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드릴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도 안 했을 리가 없다.
대공령에서도 십 대 시절부터 인기 폭발이었던 에일런이 아닌가.
그런데 수도에서는 정식으로 사교계에도 나갈 수 있잖아. 귀족 영애들이 저 얼굴을 가만두겠어?
내 말에 에일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던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일단 금방 가지고 나올게요. 제가 나오면 답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
“알았어. 솔직하게 말해 줄게.”
그제야 에일런이 알았다며 여전히 웃음이 가득 매달린 얼굴로 대답했다.
‘헐. 진짜 있나 봐.’
단장해 주던 메리가 무슨 신나는 일이 있냐고 물었을 때는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 준댔으니 비밀로 해 줘야지.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암.
……장담하는데 무조건 한 번 이상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