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2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29화(29/218)
가게를 나선 후, 에일런이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상자를 가져갔다.
적당히 큼직했던 상자는 그가 들자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
“내가 대신 들어 주고 싶어서 그래.”
“……오라버니는 뭐든지 다 대신 해 주고 싶대.”
“하하. 그럼 대신 어디 좀 같이 가 줄래?”
“그런 건 안 물어봐도 괜찮아요.”
내 대꾸에 에일런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저 얼굴은 언제 봐도 반칙이란 말이지.’
결국 나는 웃음 서린 한숨을 내쉬며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눈매가 나붓이 휘었다.
“얼른 가요.”
“영광이야.”
“가야 할 데가 있는 줄 알았으면 거기 먼저 들를 걸 그랬나 봐요.”
아버지 선물은 다음에 샀어도 되는데.
나온 지 오래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건물 지붕에 걸칠 정도로 저물어 있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서 그런지 낮이 짧았다.
“괜찮아. 미리 주문해 둔 거라서 받아 오기만 하면 돼.”
“그럼 다행이지만요…….”
“원래는 저녁까지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건 아버지한테 뺏겨서. 이번엔 내가 양보하기로 했어.”
에일런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나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그게 뭐라고 양보까지 해요.”
“……아버지도 의외로 뒤끝이 있으시거든.”
그렇게 말하는 에일런의 말투에 실소가 묻어났다.
에일런과 아버지는 이상한 걸 두고 점잖게 다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작년에 내가 처음으로 춤을 배우고 난 후, 누가 먼저 나와 춤을 추는가로 온종일 신경전을 벌였던 일이 있다.
마침 에일런도 북부로 왔을 때였거든.
결국 오랜만에 본 동생의 연습을 도와준다며 선수를 친 에일런이 이겼지만.
그 뒤에 아버지는 오랜만에 에일런과 대련을 했다.
움푹 파이고 여기저기 망가진 연무장을 복구한 페른이 투덜거린 건 두말하면 입 아프고.
“아하하, 오라버니는 아버지 선물 준비하셨어요?”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반년 만에 보는 거라 이제는 안 그럴 줄 알았더니 여전했다.
“저번에는 만년필 드렸었잖아요. 아버지 서류에 사인하실 때 맨날 그걸로 하세요.”
내 말이 조금 빨라졌다.
나는 우리 가족이 화목한 게 좋거든.
“그래?”
“그럼요. 제가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에일런이 웃는 얼굴 그대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자아 반성이 잘되는 눈빛이군.
“하하. 벌써 해가 다 져 가네. 얼른 가요.”
나는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에일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쪽 아니야.”
“……먼저 가세요.”
그 말에 도로 멈추어 섰지만.
***
미리 주문까지 했다길래 대장간 같은 곳으로 가려나 싶던 내 생각과 달리, 우리의 걸음이 멈춘 것은 전혀 다른 곳 앞이었다.
물론 못 올 곳은 아닌데…….
아버지 선물을 여기서 주문한 건가?
“……여기예요?”
“여기 맞아.”
떨떠름하게 묻자 에일런이 낮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익숙하게 들어서는 폼이 한두 번 와 본 게 아닌 듯했다.
“오라버니가 미리 주문까지 맡기셨다길래 무기 종류인 줄 알았어요.”
……이런 곳에 익숙하다니, 사실 연애 경험 없다는 거 다 거짓말 아냐?
나는 합당한 의심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보석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도 난잡하지 않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비싸겠네.’
저 번쩍거리는 목걸이 좀 보라지. 물론 예쁘긴 하지만.
나는 가게 안을 흘끗 둘러보다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근데 오라버니, 조금 이따가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주인분이 자리를 비우신 것 같은데…….”
“아. 아마 안에서 작업하고 있을 거야. 금방 나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그럼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걸까요?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해요.”
주인 없는 보석 가게. 나쁜 놈들의 표적이 되기 딱 좋지 않나.
내 말에 에일런이 잠시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의 반응이랄까.
“아니, 종업원도 없길래…….”
그 반응에 괜히 머쓱해진 나는 작게 우물거리며 폭신한 소파에 앉았다.
“하하. 그런 걸 걱정했어? 착하기도 하지.”
“……저 이제 열여덟이에요.”
불퉁하게 말해 보았지만 에일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내가 스물여덟이 되어도 똑같이 저럴 거야.
물론 그런 오라버니의 태도가 싫다기보다는 민망한 것에 가까웠다.
“듣던 대로 다정한 분이시군요.”
그때,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기척을 내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서.”
온화한 얼굴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괜찮아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자 그가 눈매를 살포시 휘었다.
누가 보아도 선한 얼굴의 온미남을 보자 절로 허허로운 미소가 나왔다.
그런데 듣던 대로라면……? 저 남자는 나를 아는 듯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나에 대해 들어본 것이겠지.
“케이든, 오늘따라 말이 많네.”
“하하. 뭘 새삼스레 그러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에일런과 아는 사이인 게 분명했다.
‘친한 사람 없다더니 거짓말이었구만.’
칼리온도 그렇고 케이든이라는 이 남자도 그렇고.
“소개가 조금 늦었군요. 저는 케이든 앰브론이라 합니다. 소소하지만 가게를 하나 운영하고 있지요.”
“……에리타 크로바하츠예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에일런 님의 눈초리가 무서우니 오늘은 이만해야겠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어색하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케이든이 먼저 등을 돌려 매대로 다가갔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그가 건넨 건 고급스러운 가죽 상자였다.
아버지의 넥타이핀이나 커프스단추라기에는 상자가 상당히 컸다.
“다른 건 다음에 찾으러 오도록 하지.”
“그러시지요.”
“에리타, 그만 갈까?”
열어서 확인해 보리라는 예상과 달리 에일런은 담백한 손길로 상자를 들었다.
“확인 안 해 보셔도 괜찮아요?”
“괜찮아. 실력은 믿을 만해.”
“하하. 당사자 앞에서 그리 칭찬을 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말은 그렇지만 케이든의 얼굴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따뜻하고 차분해 보이는 사람이긴 한데 괜히 이상한 이 기분은 뭐지.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마나가 서늘하기 때문인가.
“오늘은 이만 가지.”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언제 한번 들러 주세요.”
“그럴게요.”
나는 이질적인 느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에일런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이제 슬슬 저택으로 가야겠다. 더 지체하면 저녁 식사에 늦겠어.”
“네. 그럼 마차가 있는 데로 가요.”
나는 에일런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마차가 있는 데까지는 거리가 있는 터라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해가 지고 있어서 그런지 거리는 아까보다 한산했다.
그때였다.
“앗!”
가벼운 바람에 모자가 날아갔다. 나는 급히 뒤로 돌았다.
‘아버지가 주신 모잔데……!’
잠시 바람을 타고 날아가던 모자는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어떤 이의 몸에 부딪혀 툭, 떨어졌다.
내가 도착하기 전, 로브를 입은 사람이 먼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깊게 눌러쓴 후드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쩐지 나를 보고는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모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낸 후 내게 내밀었다.
“아, 감사해요.”
“별말씀을.”
후드 안에서 들려온 중저음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기다리는 분이 있는 것 같은데 얼른 가 보십시오.”
남자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리자 조금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에일런이 보였다.
“감사합……, 응?”
다시금 인사를 건네려 몸을 돌렸지만 방금까지 앞에 있던 사람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뭐지?”
내가 고개를 돌렸던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의아하긴 했으나 깊게 생각을 할 정도로 큰일은 아니었다.
저쪽에서 나를 부르는 에일런의 부름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왔다.
“아, 배불러.”
역시 에반이야. 매콤한 닭고기 최고.
의외로 아버지는 에일런과 함께 나갔다 온 사실에 대해 별말 하지 않으셨다.
“……페른이 제일 불쌍한 것 같아.”
그저 그 시간에 서류 더미로 아버지를 붙잡아 두고 있던 페른만 안타깝게 되었을 뿐.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나는 크게 대답하며 소파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에일런이었다.
“쉬고 있었어?”
“네에.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줄 게 있어서.”
에일런과 함께 소파에 앉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한테요?”
“응. 네 거야.”
그 말과 함께 에일런은 익숙한 가죽 상자를 내밀었다.
아까 케이든의 가게에서 받아 왔던 것이었다.
“이건…… 미리 주문해 두셨다던 그거 아니에요?”
“맞아. 원래 새해에 맞춰서 주려고 했는데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에일런은 말을 흐리며 싱긋 웃었다.
원래 두 달 전 북부에 오기로 했는데 일이 생겨서 못 왔었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아버지 선물인 줄 알았어요.”
“아버지께 드릴 건 따로 있어. 이건 네 거니까 얼른 열어 봐.”
나는 검은색 가죽 상자를 바라보다 탁자 위에 놓았다.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 상자 안에는 목걸이 하나와 귀걸이 한 쌍이 있었다.
“이건…….”
“마음에 들어?”
나는 에일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플한 은색 체인에 보라색 보석이 달려 있는 목걸이와 물방울 모양의 새파란 사파이어 귀걸이.
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와 한 세트라고 해도 될 법했다.
9년 전 아버지가 주셨던 팔찌는 내가 항상 차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에 맞춰서 주문한 것이리라.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네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고.”
에일런이 단정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채워 줘도 될까?”
“그럼요.”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한쪽으로 넘겨지고, 차가운 금속이 목에 닿는 게 느껴졌다.
“다 됐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새끼손톱만 한 보석이 차분히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디자인이 아니라서 평소에도 늘 착용할 수 있을 듯했다.
이어서 에일런의 곧은 손가락이 푸른색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약간의 간지러움도 잠시, 에일런의 손이 귀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묘하게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마나가…….”
정확히는 늘 나를 감싸고 있는 마나가 한결 더 가벼워졌다는 게 맞겠다.
“어때? 효과가 좀 있는 것 같아?”
나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에 에일런이 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흘리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다행이네.”
밀려오는 감동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는 에일런을 꼭 끌어안았다.
약간 서늘한 품은 어릴 때와 똑같이 포근했다.
“늦었지만 성인이 된 걸 축하해, 내 동생.”
두 달이 늦은 축하였지만, 내게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