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31화(31/218)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탓에 눌러썼던 후드가 벗겨졌지만 그것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분명히 구분하는 방법이라고 쓰여 있었어.’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책 여러 권을 함께 집어 든 나는 서둘러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은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할아버지.”
“으응……?”
다행히 그는 내가 여러 번 부르기 전에 눈을 떴다.
나는 손에 든 책 대여섯 권을 내밀었다.
“이 책들을 사려고 하는데요.”
“……30페니만 줘.”
노인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내가 가져온 책들을 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30페니요?”
내 되물음에 노인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페니면 아까 먹은 꼬치 두 개랑 주스보다도 더 싼 가격이다.
하지만 더 묻기에는 그가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지금 내 마음이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여기요.”
“30페니 맞네. 이제 얼른 가. 다시 자야 해.”
“……안녕히 계세요.”
노인에게 값을 지불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책방을 빠져나왔다.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체한 건지 사위가 조금 저물어 있었다.
“얼른 집에 가야겠어.”
나는 성큼성큼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마법을 쓸 작정이었다.
당장 집으로 가서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게 내 계획이었다.
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대여섯이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나 불량아요 하는 모양새라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괜히 소란 피우면 귀찮으니까.’
내가 몸을 돌려 얼마 안 걸었을 때였다.
“이봐. 아가씨.”
타닥-. 발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내 어깨를 턱 짚었다.
“어이. 부르는데 무시하면 섭섭하다고.”
고개를 돌리자 느끼하게 웃고 있는 웬 남자가 보였다.
……뭐야, 이 버터같이 생긴 놈은.
“어이, 비터! 거칠게 굴지 말라고.”
“곱게 모셔 와야지! 예쁜 아가씨가 무서워하잖아.”
뒤에서 그와 한패거리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낄낄대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아니, 근데 이름도 비터야? 느끼한 표정이랑 찰떡이네.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당연스럽게도 겁이 난다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내 어깨에 올려진 손을 툭 쳐서 떨쳐 냈다.
“제가 지금 좀 급하거든요. 비켜 주실래요?”
“아이고, 이걸 어쩌나. 우리도 좀 급한데. 좋은 말로 할 때 같이 가는 게 좋을 거야, 아가씨.”
불량배가 이를 드러내며 킬킬 웃었다.
그 꼴을 보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에 직방인 해결 방법이 있지.
딱- 내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허공에 불덩이가 생겨났다.
“으아악!”
바로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본 비터라는 불량배가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마, 마법사!”
흘끗 그의 뒤를 바라보자 패거리들 역시 얼어붙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비켜 줄 마음이 드나요?”
“비, 비키겠습니다. 당장 갈게요! 마법사신 줄 몰랐어요!”
넘어진 비터를 향해 묻자 그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마법사인 줄 몰라서 그랬으면 마법사가 아닌 사람한테는 그랬을 거라는 뜻인가.
“잠깐만.”
나는 당장 달아나려던 불량배들의 몸을 띄워 비터의 옆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지금 그들은 손끝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도 건드리지 마세요. ……걸리는 날엔 정말 재미있어질 거예요.”
“…….”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이세요.”
싱긋 웃으며 불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자 다섯 명의 남자들이 동시에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여 댔다.
“제 말 명심하셔야 할 거예요.”
그 말과 함께 몸을 붙잡았던 마법을 풀자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도망치던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나는 불덩이를 거둬들였다.
“에휴. 모처럼 기분 좋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단서로 좋아졌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마법 실력이 뛰어나시군요.”
“……!”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 몸이 파드득 튀었다.
삐걱거리며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온몸을 덮는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 한 명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까지 후드로 가린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키도 오라버니만큼 큰 것 같은데.’
놀란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런 내 반응에 잠시 멈칫한 남자가 후드를 벗으며 양손을 들었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이런 뒷골목에서 보일 만한 얼굴이 아닌데.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 앳되었고,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저 때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낮은 저음이 선명하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제야 바짝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뜨리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누구신지……?”
내 말에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자유 기사라 대답했다.
그런 그의 허리춤에는 칼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자유 기사요?”
“예. 지나가다가 곤란하신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 했는데…….”
“아.”
“끼어들 틈이 없더군요.”
남자가 멋쩍은 듯이 살풋 웃었다.
만약 나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없었다면 도와줬으리라.
착한 사람임을 알게 되자 나는 꾹 쥐었던 주먹을 살며시 풀었다.
“그러셨구나…….”
어색하게 웃는 나와 그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먼저 자리를 뜨기도 애매한 상황.
……이제 서로 갈 길 가면 될 것 같은데.
어색하게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니 자연히 완벽한 균형이 잡힌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에일런을 보고 자라 미남에 면역이 되어 있는 나조차 고개를 끄덕일 만한 미모였다.
‘근데 왜 익숙한 느낌이 들지.’
나도 모르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푸른 눈이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하지만 저런 얼굴을 알고 있었으면 잊어버릴 리가 없지 않나?
나는 앞의 남자와 초면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와 내 시선이 맞물린 것은.
“……히끅.”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나붓이 눈매를 휘었다.
그대로 굳은 내 몸이 딸꾹질을 할 때마다 움찔거렸다.
지금 내 모습은 누가 보아도 노골적으로 남자의 얼굴을 구경하는 모양새였으니까.
‘미친. 미쳤나 봐.’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더 보셔도 되는데.”
불쾌하지도 않은지 듣기 좋은 중저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아니에……, 히끅. ……죄송합니다.”
지금 내 얼굴은 토마토처럼 달아올랐을 게 뻔했다.
몰려오는 민망함에 절로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익숙하긴 개뿔. 저런 얼굴을 까먹으면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거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진짜로.
‘이 골목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한발 늦었다.
다행히 딸꾹질은 가라앉았지만 내 민망함은 여전했다.
차라리 아까의 적막이 나을 정도의 어색함에 나는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저어, 아까 기사님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내 말에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남자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 기사라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수도에 온 지는 한 달 조금 넘었네요.”
“정말요? 저도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반가운 마음이 든 나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기사님은 수도에 오기 전에 어디에 계셨어요?”
“주로 국경 지역에 있었습니다. 몇 년간 몬스터들이 기승이어서요.”
내 물음에 남자는 옅게 웃으며 친절히 대답했다.
국경이라……. 2년 전 북부에서도 몬스터 때문에 한참 고생했었는데.
“그러는 마법사님은 어쩌다 수도에 오셨습니까?”
다른 생각을 하던 나는 남자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숨기는 게 있으면 이래서 어렵다니까. 한마디 할 때마다 조심해야 하니.
‘뭐, 어차피 이 사람은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상관없겠지.’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으니까.
애초에 수도에는 나를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잠깐 망설이던 나는 이내 마음을 놓고는 대답했다.
“저는 북부에 있었어요. 여기에는 가족이 있어서 온 거구요.”
“……북부의 겨울은 매섭죠.”
내 대답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하는 투로 봐서는 북부에도 가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기사님도 북부에 가 보신 적이 있나 보네요.”
“……예. 사 년 전에 한 번 갔었습니다. 꽤 고생했던 기억이 있네요.”
남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살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간 건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 본 그와는 생각보다 잘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다른 이를 도와주려 했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내 경계심을 푸는 데에 한몫했고.
모르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메리의 당부는 잠시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아, 벌써 시간이……. 저, 기사님, 저는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느덧 주황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한 하늘에 나는 어물쩍거리며 말했다.
메리에게 저녁 식사 전까지는 간다고 했으니까. 더 늦으면 아버지랑 에일런에게 들킬 수도 있고.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군요. ……오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내 말에 남자가 하얗게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미소 위로 주홍색으로 지는 노을이 비쳐 들었다.
“저도 즐거웠어요, 기사님.”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그와 나눈 대화가 생각보다 즐거웠기에 나 역시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볼 때는 리안이라 불러 주시겠습니까?”
“……다음에요?”
갑작스레 들려온 이름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다음에라는 말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까.”
모호하게 되물은 내 말에도 부드럽게 대답하는 남자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저도 제 이름 알려 드릴게요.”
다음에 진짜 만나겠어? 수도가 얼마나 넓은데.
그런 마음으로 장난스레 대꾸하자 잠시 멈칫했던 남자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제게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눈꼬리를 사르르 접는 그를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다시 만날 걸 미리 알고 있는 사람 같아.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휘휘 저어 날려 보냈다.
그럴 리가 없지.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도와주려고 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제가 한 건 없는걸요.”
“그래도요. 도와주려 하셨던 마음만으로 감사해요.”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뿐인데 왠지 모르게 민망해졌다.
“……그럼 저는 진짜 가 볼게요. 기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 만남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법사님.”
뒤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가 보였다.
그 모습에 어쩐지 볼이 붉어져, 나는 소심하게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렇게 붉어진 볼은 조금 더 걸은 후에야 가라앉았다.
***
“……얼른 가야겠네. 진짜 늦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선 나는 마법을 외웠다.
광장에서 저택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들키지 않고 들어가려면 마법을 써야 했다.
익숙한 마력이 내 몸을 감싸고, 다시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여느 때와 같은 내 방이었다.
“휴.”
가져온 책들을 책상 위에 놓아둔 나는 힘차게 몸을 돌리고 메리를 부르려 했다.
고개를 돌린 내 눈앞에 보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한 쌍의 붉은 루비와 마주친 내 눈동자가 하릴없이 떨려 왔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