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32화(32/218)
에일런은 “저녁 시간 다 돼 가니까 준비하고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 두 마디를 남긴 후 방을 나섰다.
“……망했다.”
그제야 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달칵-
멍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으니 메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탈하게 웃으며 바라본 메리 역시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메리가 더 고생했겠지.
그 사실을 자각하자 죄책감이 무럭무럭 솟았다.
“……메리, 미안해.”
“아니에요. 얼른 준비하셔요. 저녁 드셔야죠.”
혼이 나간 듯 허허롭게 웃은 메리의 도움을 받아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아…… 그냥 말하고 나갈걸.’
문고리에 손을 얹은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역시 오늘 나간 건 너무 충동적이었어.’
물론 나간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덕분에 중요한 단서를 건졌으니까.
“메리, 나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아가씨.”
메리의 인사를 끝으로 나는 방을 나섰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미치겠네.’
옆을 흘끔 바라보자 평소와 같은 표정의 에일런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기분이 좋은 건 절대 아니었다.
이대로 밥을 먹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게 뻔했다.
그래도 에일런 혼자인 게 다행이지.
“죄송해요.”
“뭐가?”
“몰래 나간 거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슬쩍 에일런의 눈치를 보다가 마주친 시선에 황급히 땅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척이라도 해야 덜 혼나지. 조금 약은 생각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에리타.”
그러자 한숨을 내쉰 에일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에는 메리한테 거짓말시키지 마. 연구실에 있다고 해서 가 봤더니 없어서 걱정했잖아.”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간다고 해서 뭐라고 안 해. 대신 거짓말은 하지 말고.”
그 후 에일런은 내 걱정 몇 마디 외에는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화 푼 거죠?”
내가 힐끗 눈치를 보며 묻자 픽 웃은 에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화난 거 아니었어. 걱정돼서 그런 거야.”
“헤헤.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물론 안 나갈 생각은 절대 없었다.
다음에는 메리한테 나갔다고 얘기해 달라고 하면 되지.
***
가볍게 목욕을 마친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책상 앞에 앉았다.
눕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먼저 봐야 할 책이 있으니까.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을 집어 들었다.
“방법…….”
손가락 끝으로 한 줄 한 줄 짚으며 내려가자 금세 내가 찾던 부분이 나왔다.
[흑마법사를 구분하는 방법에 앞서 필요한 물건이 있다. 그건 ……]순식간에 그 문단을 끝까지 읽어 내린 나는 편지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아니기만 해 봐. 책 다 찢어 버릴 거야.”
편지를 쓰는 내 손이 잠시 떨린 것 같지만 착각이다. 정말.
완성된 편지를 잠시 옆으로 밀어 둔 후 이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 그게 준비되었다면 이후는 상급 이상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새겨야 하는 술식의 수준 때문이다. 새겨야 할 마법은 한 가지이지만, 그것을 총 다섯 번 중첩해 새겨야 한다. 횟수가 틀리면 효과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그 밑으로 적힌 하나의 마법을 본 내 표정이 저절로 구겨졌다.
여기 나와 있는 대로라면 아티팩트를 이용해 구분할 수 있다는 건데.
책에는 그 아티팩트를 만드는 방법과 순서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었다.
“……이 방법은 어떻게 발견해 낸 거야.”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대체 이 극악의 난이도는 뭐란 말인가.
애초에 준비물부터가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보석. 그것도 보석 중에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다.
마법을 새기려면 어지간한 크기로는 안 될 터.
“돈 없는 사람은 만들지도 못하겠네.”
게다가 돈이 있어도 마법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시도조차 못 할 테고.
갑자기 이 책에 대한 불신이 무럭무럭 솟았다.
작은 단서라도 허투루 흘려버릴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시도해 볼 생각조차 않았을 테지.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이건 내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
“그나마 과정이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망정이지.”
보석을 가공하고 마법진을 중첩해서 새기는 방법이 자세히 서술된 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헷갈릴 일은 없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안 틀리고 따라 하는 게 제일 힘들어 보이지만.”
앞으로 한 달 안에 완성하려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난이도였다.
“으, 내일부터 부지런히 살아야겠네.”
데뷔탕트 무도회 준비를 북부에서부터 해 둔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한 달간 좀비 같은 몰골로 살아야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쭉쭉 폈다.
“밖에 누구 있어?”
“아가씨, 부르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선 건 마릴린이었다.
“마릴린, 내일 이 편지 좀 라그라스 상단에 전해 줄래?”
“라그라스 상단요?”
“응. 편지를 전해 주면 거기서 상자를 줄 거거든. 그거 좀 받아 와 주면 고마울 것 같아.”
“그럴게요.”
“고마워!”
내 편지를 받아 든 마릴린이 방을 나서자, 나는 곧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으으, 피곤해.”
내 목표는 가족들의 결말 바꾸기 딱 하나인데, 그걸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가장 좋은 결말은 아무런 다툼 없이 칼리온이 황태자가 되는 건데…….
“……근데 그게 되겠냐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황제가 칼리온을 황태자로 임명한다. 그럼 1황자 측에서 가만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원작대로라면 황제는 황자들 사이의 다툼을 묵인한다.
최선책은 실행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럼 다음 방법.
최대한 들키지 않게 칼리온이 황태자가 되는 걸 돕는다.
내가 지금껏 준비해 온 것 중 다수는 이걸 위한 것이다.
모로 가더라도 칼리온이 다음 황제가 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여기서는 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황후 눈에 띄면 다 망하는 거야…….”
나는 이걸 위해서 원작의 지식을 조금 빌렸다.
정확히는 여주인 아일라의 업적을 빌렸다는 게 맞겠지.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살려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작중에서 아일라는 무슨 운이 그렇게 좋은지, 무심코 구해 준 사람이 소드 마스터가 될 재목이었다든가 실수로 사 버린 골동품이 과거의 유물이라든가. 하여튼 그녀에게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역시 아일라를 위한 세계관이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행운이 그녀에게는 수도 없이 주어졌다.
‘내가 가로챈 건 수많은 것들 중 고작 몇 개니까.’
인재 두 명과 대박 칠 사업 몇 개.
아일라를 위해 안배된 수십 가지 중 그것들을 빼더라도 그녀에게는 수많은 것들이 남아 있을 테지.
결과적으로 칼리온을 돕는 건 나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 말아 줘.
나는 애써 그렇게 합리화하며 폭신한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차피 원작은 이미 망할 대로 망했다.
8년 전에 황비가 죽은 거로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칼리온이 1년이나 빨리 수도로 돌아왔잖아.
전체적인 틀 중에 벌써 두 가지나 틀어졌다.
이게 망한 게 아니면 뭐냔 말이다.
“원작에 자세한 사정만 나왔어도 이 개고생은 안 해도 되는 건데!”
원작을 떠올리다 보니 괜히 분통이 치밀었다.
내 가족이 왜 1황자의 편에 서게 되었는지, 그것만 알면 되는데.
“아일라 말고 다른 등장인물도 좀 신경 써 줬으면 얼마나 좋아. 어? 진짜 정나미 없게.”
그렇게 한참을 성내던 나는 제풀에 지쳐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꺼풀이 깜빡이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화를 냈더니 기력이 빠진 모양이다.
아직 수도에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천장이 익숙했다.
“……어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지만 내 선택이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내일부터는 몰두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그럼 드레스는 이 다섯 가지로 진행할까요?”
양장사의 말에 아버지가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십 벌도 괜찮…….”
“네! 그 다섯 개로 할게요!”
나는 황급히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어색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여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마담 데린, 다섯 벌로 부탁드려요.”
“호호. 알겠습니다. 파티 일주일 전까지는 완성해서 가져다 드리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내 말에 아버지가 불만스럽다는 얼굴을 했지만 당연히 나는 모른 척했다.
오십 벌은 무슨 오십 벌이야.
데뷔탕트 무도회는 길어도 일주일인데.
원래는 세 벌만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등쌀에 못 이겨 다섯 벌로 한 거란 말이야.
그리고 지금껏 하나둘씩 맞춘 드레스들이 옷장에 그득했다.
“으음. 그럼 남은 건 구두와 장신구 쪽인데. 일단 카탈로그를 한번 보시겠어요?”
“그럴까요?”
나는 마담 데린이 펼친 카탈로그를 아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딱히 보석에 관심이 있거나 한 게 아니다.
‘내가 안 보면 아버지가 고르실 거라고!’
빠르게 카탈로그를 훑어 내리는 내 행동 뒤에는 그런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일런이 황궁에 가야 하는 일이 있어 집을 비운 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에일런까지 함께 있었다면 적어도 드레스가 열 벌은 되었을 테니까.
“그럼 구두는 이거랑 이게 좋겠네요.”
“탁월한 선택이세요!”
그 후로 장신구를 고르는 과정에서도 아버지의 수많은 방해 공작을 쳐 냈다.
내가 하나를 고르는 사이 아버지는 감흥 없는 얼굴로 카탈로그에 나온 걸 전부 사려고 했으니까.
줄이고 줄였지만 결국 내 예상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사고 말았다.
“그럼 다음에 드레스 가봉 때 다시 뵐게요!”
마담 데린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돌아간 후, 나는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소파에 늘어졌다.
뭔가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옷 치수를 잴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고된 일정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버지, 너무 많이 사신 거 아니에요?”
“마음 같아서는 수도에 있는 것들을 다 사들이고 싶은데 네가 싫어하니 참은 거란다.”
힘이 빠진 내가 작게 말하자 아버지가 매끈하게 웃으며 무서운 소리를 했다.
부정했다가는 정말 당장이라도 그러라고 시킬 것 같아서 마음대로 부정도 못 하겠다.
“저는 지금 있는 걸로도 충분해요. 더 사면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을 거예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회는 다음에도 또 있으니.”
……어쩐지 나보다 아버지가 내 옷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