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38화(38/218)
한껏 미모를 뽐내며 웃던 남자가 입술을 열었다.
“저번에 제가 레이디께 부탁을 하나 드렸었는데. 기억하시나요?”
“부탁요?”
그가 내게 한 부탁이라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게 무색하게 금세 떠올랐다.
“아, 그랬었죠.”
나는 짧은 단어와 함께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었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번 곱씹어 본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었다.
“리안 경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편하실 대로. 잊지 않아 주셔서 기쁩니다.”
그런 내 말에 남자는 정말로 기쁜 듯이 눈매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잊을 리가 없지.’
그와의 만남은 내 일상 중에서도 특별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남자와 한 약속은 하나가 더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다시 만날 줄 모르고 한 말이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그는 내 말을 기다리는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술을 열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제 이름은 에리타예요.”
다른 이름을 대려면 그럴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말에 리안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열렸다.
“예쁜 이름이네요.”
“……리안 경도요.”
나는 어쩐지 민망해져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매가 움칠거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버지와 에일런을 오래 봐 온 덕에 나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본인의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금세 다시 웃음을 띠는 그의 얼굴에 나는 얌전히 말을 삼켰다.
“저, 리안 경은 어쩐 일로 여기 오신 거예요?”
“으음, 사실 저는 이 가게를 꽤 좋아합니다. 생각날 때마다 가끔 오곤 하던 곳인데, 수도에 다시 오고 나서는 처음 와 보네요.”
“정말요?”
나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물론 에일런이 수도 내에서는 꽤 유명한 곳이라고 했으니 아주 있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겹치는 우연이 신기했다.
“네. 제 어머니께서 디저트를 꽤 좋아하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리안의 모습은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짐작이 가기도 하는 상황에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리안 경의 어머니 덕분에 다시 만날 수 있었네요.”
조심히 꺼낸 내 말에 그는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 이윽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네요. 어머니 덕에 에리타 양과 만났으니 감사해야겠습니다.”
나긋하면서도 웃음기 어린 그의 말투에서는 더 이상 아까의 씁쓸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말을 잘 고른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묘한 어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에리타 양.”
그의 부름은 다정했다.
아버지와 에일런이 나를 부를 때처럼.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른가?
“네, 리안 경.”
“이후에 따로 일정이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래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왔으니까.
“우선 아는 곳이 여기라서 오긴 했는데, 이후에는 잘 모르겠네요.”
“그렇습니까?”
“네. 사실 고민이 조금 있어서 기분 전환 하러 나온 거거든요.”
그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쨌든 처음 저택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게 답하자 리안이 눈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따로 가실 곳은 없으시단 말이시군요.”
“네. 수도를 잘 모르기도 하구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문질렀다.
내 답변에 리안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에리타 양.”
생각을 끝낸 건지, 시선을 들어 올린 그가 내 눈을 마주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럼 제가 잠시 에리타 양의 시간을 빌려도 될까요?”
그의 어투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산뜻한 제안이었다.
“……제 시간을요?”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요.”
“리안 경은 따로 일정 없으신 건가요?”
내 물음에 리안은 곧은 손가락으로 나무 의자의 손잡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저도 고민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여기 온 것도 기분 전환 삼아서였거든요.”
“아…….”
그가 입매를 끌어 올리며 상냥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내게 썩 괜찮은 제안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꽤 즐겁기도 했고, 그의 말마따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었다.
내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운 채였다.
“그럼 그럴까요? 대신 장소는 리안 경이 찾아 주셔야 해요. 저는 수도를 잘 모르거든요.”
내가 눈꼬리를 접으며 선뜻 수락하자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먼저 물어 놓고 내 긍정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놀란 표정이신데요.”
“……사실 이렇게 흔쾌히 수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웃음기 어린 말투로 말을 건네자 그가 조금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는 그렇게 유들유들하더니. 순진한 구석도 있네.
그런 그의 반응에 절로 장난스러운 대꾸가 튀어나왔다.
“하하, 뭐예요. 리안 경이 먼저 제안하셨잖아요.”
짓궂은 내 대꾸에 이내 그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리안은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죠. 그럼 이제 갈까요?”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날이 좋으니까.
“그럴까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켜 로브를 정돈한 나는 먼저 계산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로 훤칠한 키의 리안이 따라붙었다.
왠지 커다란 강아지 같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들러 주세요.”
종업원의 인사를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마침 시간이 정오에 가까워진 건지, 맑은 하늘 가운데에 뜬 해가 우리 머리 바로 위를 비추고 있었다.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오늘 날씨 진짜 좋네.
“다행히 오늘은 태양도 제 편인가 봅니다. 상당히 운이 좋은 날이네요.”
그의 재치 있는 말에 나는 픽 웃으며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훤칠하다는 말로도 모자라는 미남에 태도까지 젠틀하다니.
여기 에일런 같은 사람이 또 있네.
“리안 경, 인기 많겠어요.”
“예?”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잘 모르겠다는 말은 안 믿으니까.”
“그리 보이십니까?”
은근한 내 어조에 리안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꼬리 끝은 미미하게 휘어져 있었다.
“정말 솔직하게요?”
나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군요.”
그런 내 반응에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어요.”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리안이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뭐, 일단은 출발할까요. 한낮과 노을이 질 때쯤이 가장 적절한 곳이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돌린 리안이 내 앞으로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위한 손짓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기사님의 에스코트라니. 영광이에요.”
나는 장난스레 대꾸하며 그의 손 위로 살포시 내 손을 얹었다.
커다란 손은 끝나 가는 겨울 날씨에도 따뜻했다.
***
리안은 내 보폭에 맞추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내 손에는 내 사이즈보다 훨씬 큰 검은 가죽 장갑이 씌워진 채였다.
그에 반해 내 옆에서 걷는 리안의 손은 하얀 맨살 그대로였다.
“리안 경, 손이 시리지는 않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서요.”
태연하게 대꾸한 그가 조금도 발갛게 변하지 않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조금 걷다 보니 차가워진 내 손에 리안이 꺼내 든 것은 그의 장갑이었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내 말에도 그는 기어코 내게 장갑을 씌우는 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이런 부분에서는 고집이 센 듯했다.
결과적으로 내게 좋은 일이긴 했지만.
“레이디는 괜찮으신가요?”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어벙하게도 보이는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그럼요. 신사분이 건네주신 장갑 덕분에 따뜻하답니다.”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던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는 충분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물들로 가득하던 양옆은 어느새 한산하게 바뀌고 있었다.
“혹시 높은 곳을 싫어합니까?”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안 싫어해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랍니다.”
예전부터 높은 곳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말이다.
막힘없이 탁 트인 풍경을 보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서.
그 순간만큼은 내 처지를 모두 잊을 수 있었기에 더 좋아했다.
“지금 가는 곳이 높은 곳인가 보네요.”
“음, 그런 셈이죠. 좋아하신다니 다행입니다.”
내 말에 그는 산뜻하게 웃었다.
찬찬히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활기차던 번화가와는 거리가 훌쩍 멀어진 후였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을 걸은 것도 아닌데.
“도착했습니다. 마음에 드시면 좋겠네요.”
이윽고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나름 짐작하긴 했지만,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보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여기서는 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거든요. 속이 답답할 때 오기 좋은 장소 중 하나입니다.”
나는 리안의 설명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의 건물들이 점점이 펼쳐진 풍경은 생각보다 더 절경이었다.
우리가 걸어 올라온 언덕이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리안 경.”
“네, 에리타 양.”
다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활짝 웃으며 내 뒤에 서 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