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42화(42/218)
어색하던 식사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저택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있는 온실 화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좀 바쁘게 지내긴 했지.’
팔 년 전 수도에 왔을 때도 머리가 복잡했었기에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여유가 없었고.
나는 심란함이 담긴 눈빛으로 내 앞에서 걷는 등을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묶인 가느다란 밀빛 머리카락이 세이안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였다.
“미련한 녀석. 그리 네 잘못이라 생각하지 말라 이르지 않았느냐.”
“대공 전하…….”
“예전에는 형님 형님 하며 쫓아다니더니. 너도 나이가 들은 게로군.”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세이안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말로 보아 예전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부터 그가 내게 말을 걸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세이안은 감정을 숨기는 방법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자꾸만 내 눈치를 보는 것만 봐도 뻔하지.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었음에도 구태여 먼저 나서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보다 열댓 살 많은 외숙부를 대하는 방법은 아직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어제만 해도 잘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내 자신감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내 심정을 모르는 걸음은 금세 투명한 유리 건축물에 도착했다.
각진 돔 모양의 온실은 직접 앞에 서서 보니 생각보다 그 크기가 더 컸다.
“와아.”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고민도 잊고 탄성을 내뱉었다.
겨울임에도 따뜻한 실내와 향긋한 꽃 내음, 그리고 그 향기의 주인인 색색의 꽃들이 나를 반겼다.
나는 내 옆에서 걷던 에일런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말한 대로네요. 겨울에도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게 너무 예뻐요.”
에일런은 수도로 향한 후 종종 편지를 보냈다.
어떨 땐 짤막한 안부 인사였고 어떨 땐 소소한 선물과 함께 한두 장의 편지가 오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는 마법으로 보존된 꽃 몇 송이와 함께 편지가 온 적도 있었다.
그 편지는 수도 저택의 온실은 겨울에도 꽃을 틔운다는 내용이었지.
“북부에서는 꽃이 없어서 아쉬웠겠네.”
신이 난 기색으로 온실을 살피는 내 모습에 에일런이 낮게 웃었다.
뭐, 여기에 비하면 확실히 그렇긴 하지. 북부는 일 년의 반 이상이 겨울이었으니까.
꽃이 피는 계절이라 해 봐야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에는 눈꽃이 피더라구요. 북부에서만 자라는 겨울 열매도 있구요.”
먹으면 안 되는지는 몰랐지만요.
내가 덧붙인 말에 에일런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먹은 건 아니지?”
“에이, 오라버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당연히 아니죠.”
물론 먹지는 않았다. 먹을 뻔하긴 했지만.
“호기심 많은 내 동생이 웬일이야? 내가 아는 에리타가 그럴 리 없는데.”
하지만 에일런은 내 말을 쥐뿔도 믿지 않는 듯했다.
어릴 적 대공령에 있는 숲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던 나를 잘 아는 탓이다.
정확히는 마법 재료로 쓸 만한 게 있나 찾으러 다녔던 거지만, 어쨌든.
“……사실은 먹어 보려고 하긴 했는데 엘리랑 베티가 겨울에 나는 열매는 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 줬어요. 배탈이 심하게 난다고 했었나?”
은근한 웃음이 어린 에일런의 말투에 나는 결국 민망해하는 얼굴로 사실을 실토했다.
“아, 엘리랑 베티는 북부 성에 있던 하녀예요.”
내가 덧붙인 말에 에일런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랬어? 다행이네. 잘못 먹으면 이삼일은 앓을 정도거든.”
“으, 생각만 해도 싫네요.”
나는 몸서리를 치며 에일런의 팔을 잡곤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각양각색의 꽃과 식물을 둘러보느라 어느새 아버지와 세이안과의 거리가 조금 벌어져 있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 신나게 하느냐.”
아버지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문질렀다. 너무 에일런과 둘이서만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북부에서 있었던 얘기요. 오라버니가 여기 온실이 예쁘다고 편지 보냈었거든요.”
나는 아까 했던 얘기를 짧게 다시 읊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차와 다과를 얼른 준비하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말이 들려왔다.
“기가 막히는군. 저 녀석이 에리타 네게 편지도 보냈어?”
“으음,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보냈어요. 오라버니, 맞죠?”
“보통은 그렇게 보냈던 거 같은데.”
들려온 에일런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표정은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가출한 것에 가까웠다.
수려한 미간을 좁힌 아버지가 에일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안부 편지라도 보내라고 했을 때 에일런 네가 무어라 했느냐.”
“그때는 바빴습니다.”
아버지의 못마땅함이 묻어나는 말투에도 에일런은 뭐가 문제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아버지의 눈썹이 위로 휙 들렸다.
“네가 바빠도 이 아비보다 바쁘더냐? 하여간 정나미 없는 놈 같으니라고. 어릴 때는 귀여운 면이라도 있었거늘.”
에일런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억울한데요. 꼬박꼬박 안부 편지는 보내지 않았습니까.”
“오냐. 그 두 줄짜리 편지를 말하는 게로구나. 세이안, 너도 이 녀석이 무뚝뚝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버지의 강요에 가까운 물음에 세이안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또 시작이다. 떨어져 있는 동안은 괜찮다 싶더니.
아버지와 에일런의 저 유치한 대립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무심한 성격이긴 하지만 따지자면 에일런이 더 무신경한 쪽에 가까워서 그런지 아버지가 가끔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다.
에일런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히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물론 오늘은 그런 이유뿐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러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편지도 세 줄이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어지는 쓸모없는 언쟁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을 흘끗 보자 아니나 다를까 세이안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버지도 참. 손님도 계신데…….’
다시 아버지와 에일런을 보았지만 둘은 이쪽을 신경 쓸 새가 없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후작님.”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금 어색하게도 들렸다.
“어, 어? 나 말이니?”
그건 나보다 세이안이 더 선명하게 느끼는 듯했다.
나는 당황한 감정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그의 되물음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저랑 걷다 오시겠어요?”
그러고는 살짝 아버지와 에일런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돌렸다.
하지만 세이안은 쉬이 대답하지 않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싫은가?’
하긴. 지금까지 거리를 두던 내가 갑자기 같이 걷겠냐고 하면 꺼려질 수도 있겠네.
그에게는 내 제안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물론 후작님이 괜찮으시면요. 부담스러우시면…….”
“아, 아니야! 같이 가자.”
덧붙이는 말에 지금껏 답을 망설이던 세이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빠르게 대답했다.
내 말을 끊고 들어온 그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에 흠칫 놀랐던 나는 이내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잠깐 갈까요?”
내 권유에 세이안이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몸을 떼어 냈다.
나이도 덩치도 나보다 훨씬 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딘가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아마 느슨히 묶은 색소 옅은 머리칼과 매끄럽게 처진 눈꼬리도 한몫을 할 테지.
나와 세이안이 동시에 일어나자 아버지와 에일런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았다.
“저 잠깐 후작님이랑 같이 걷고 올게요.”
내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세이안과 말이냐?”
나는 아버지의 물음에 옆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작님이랑 온실 좀 둘러보고 오려구요. 오랜만에 두 분이서 담소라도 나누고 계세요.”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지나 세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래. 네가 구경이라도 시켜 주려무나.”
의외로 아버지의 대답은 흔쾌히 흘러나왔다.
나는 그 모습에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눌러 삼키고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슬란 님.”
그런 내 옆으로 세이안이 따라붙었다. 그는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를 두고 나와 방향을 같이했다.
두 개의 구두 소리가 단정히 귀를 울렸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희미하게 들리던 아버지와 에일런의 목소리마저 사라졌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내 옆에서 걷는 세이안에 신중히 말을 골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가족이라 당황했던 거지 세이안이 싫은 건 절대 아니니까.’
구 년이나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도 서투른 것투성이였다.
내 한심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꽃에 관해 설명하듯 말을 꺼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낼 수는 있을 테지. 하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나조차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오늘 내가 세이안을 대했던 태도는 살갑지 못했으니까.
“에리타.”
하지만 그런 나보다 세이안이 입을 여는 게 먼저였다.
그에게 불린 내 이름은 꽤 생소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묘한 그 울림에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조금 놀란 기색으로 그를 향해 몸을 돌리자 한두 걸음 뒤에 멈춰 서 있는 세이안이 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우선 세이안이 하는 말을 먼저 듣고, 그다음에 사과하면 되겠지.
“……미안해.”
하지만 뒤이어 나온 세이안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