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46화(46/218)
에일런이 내려온 건 세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그는 엠마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소대공님을 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엠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우아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역시 엠마는 표정 관리를 잘하는구나. 아니면 지금은 괜찮은 건가?’
잠시 엠마에게 닿았던 내 시선이 다시 앞쪽으로 향했다.
“에리타.”
이쪽으로 걸어오는 에일런을 본 내 얼굴에 절로 헤실헤실한 웃음이 떠올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에일런이 내 앞에 섰다.
아까 내가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편안한 셔츠 차림을 하고 있던 에일런이었는데, 지금은 단정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연회에 갈 때처럼 작정하고 꾸민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기분은 충분히 낼 수 있는 복장이었다.
“오라버니, 일부러 이렇게 입고 오신 거예요?”
“성인이 된 내 동생이랑은 처음 추는 춤이니까.”
내 물음에 에일런이 눈매를 유려히 접으며 대답했다.
‘아까 내가 다 컸다고 해서 그런가 보네.’
그렇게 생각하자 내 오라버니지만 참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본래 성격이 어떻든 내게는 한없이 상냥했으니.
“레이디를 빛나게 해 드리는 건 기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에일런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살짝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돈해 주었다.
‘아, 오라버니는 기사 서임도 받았었지.’
정말이지 다정하고 멋진 기사님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역시 오라버니가 최고예요!”
그런 심정을 담은 내 말에 에일런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때, 엠마가 작게 목을 가다듬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흠흠. 우선 두 분은 저쪽 중앙으로 가 주시겠어요?”
“아, 맞다.”
에일런의 다정다감한 면에 정신이 팔려 잠시 목적을 잊었던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좋아요.”
내밀어진 단단한 손 위로 예법에 맞추어 살포시 내 손을 올렸다.
에일런의 에스코트를 받아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내가 춤을 추게 될 줄이야. 전생에는 몸치에 가까웠는데.’
춤을 배우기 전 전생에서의 뻣뻣함이 여전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춤에 꽤 소질이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이 몸이 춤에 재능이 있는 거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의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귀족으로 살아가려면 춤은 출 줄 알아야 했으니까.
중앙에 선 우리는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려요, 오라버니.”
“나야말로.”
***
엠마와의 수업이 끝나고, 에일런과 나는 산책도 할 겸 정원으로 나왔다.
이월이 지나간 삼월의 바람은 서늘한 듯 따스했다.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던 도중 에일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동생 춤 실력이 많이 늘었네.”
“후후. 아버지랑 오라버니를 닮았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 말에 뿌듯한 마음을 감추며 새초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화자찬인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춤에는 꽤 재능이 있는 것 같거든.
‘이것도 유전의 힘이겠지?’
아버지와 에일런 둘 모두 몸을 잘 쓰니까. 역시 우월한 유전자는 존재하는 거였어.
‘처음 췄을 때는 발을 몇 번씩 밟았지만.’
그때 내 어깨 위로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닿아 왔다.
에일런의 제복 재킷이었다.
“별로 안 추운데…….”
“그래도 아직 바람이 차니까 걸치고 있어.”
에일런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내가 움직이느라 조금 삐뚤어진 재킷을 여며 주었다.
왜인지 이런 배려는 받을 때마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가끔 누군가 나를 생각해 준다는 걸 실감할 때면 정말 생경한 기분이 들곤 했다.
처음 아버지와 에일런을 만났을 때는 이런 배려가 못내 부끄러워 일부러 거절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졌지만.
“감사해요, 오라버니.”
나는 조그맣게 인사하며 온기가 남은 재킷 자락을 꾹 잡았다.
그 후, 나와 에일런은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2년 전 에일런과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자주 산책을 했었는데.
잠시 대공령에 있던 때를 떠올리며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벤치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쉬어 갈 겸 벤치에 앉은 나는 구두 앞코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만들고 있다던 아티팩트는 잘되고 있어?”
“어? 오라버니도 알고 계셨어요?”
나는 에일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한테 말한 적은 없는데.’
그런 내 물음에 에일런이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택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내 동생이 아티팩트를 만드느라 잠도 안 잔다고.”
그리고 뒤이어 나온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무슨 그런 게 소문이 나냐…….’
제일 유력한 범인은 입이 싼 마법사 케빈이다.
내 작업실이자 연구실로 가는 길에 마법사들과 자주 마주치니까.
“잠을 안 자는 건 아니에요…….”
나는 겉으로는 멋쩍게 웃으며 속으로 케빈을 향해 이를 득득 갈았다.
에일런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예전에 마법 연습을 한답시고 밤을 새우다가 에일런 앞에서 비틀거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에일런은 내가 밤을 새우면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루에 네 시간도 안 잘 때가 많다던데.”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에일런은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방금까지는 안 추웠는데 갑자기 겨울이 다시 온 느낌이다.’
결국 나는 에일런에게 앞으로는 절대 밤을 새우지 않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고 말았다.
“또 밤새우다가 저번처럼 쓰러질까 봐 그래.”
“……진짜 앞으로는 푹 잘게요.”
내 약속을 들은 후에야 에일런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웃었다.
밤을 새우지 못한다는 제한이 생기긴 했지만, 굳이 에일런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으므로 나는 얌전히 수긍했다.
‘에일런이 알고 있다는 건 아버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
“아가씨, 저녁 식사 하실 시간이에요!”
문밖에서 저녁을 알리는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나갈게!”
크게 소리친 나는 보고 있던 편지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리, 오늘 메뉴는 뭐래?”
“으음, 오늘은 에반 님에게 물어보지 못해서…….”
“그럼 가서 보면 되지, 뭐.”
메리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을 흐리자 옆에 있던 마릴린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 저녁은 매운 닭고기가 메인 메뉴래요.”
“정말? 에반 원래 매운 건 속에 안 좋다면서 자주 안 해 주는데!”
“정말. 아가씨는 매운 게 그렇게 좋으세요?”
마릴린의 말에 내가 화색을 띠자 메리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당연하지. 나는 매운 음식이 제일 좋은걸.”
“아가씨는 단것도 좋아하시잖아요.”
“……단건 디저트니까 이거랑은 다르다고 치자.”
매운 거랑 단건 환상 조합이니까.
좋아하는 메뉴에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던 아버지와 에일런이 보였다.
“좋은 저녁이에요, 아버지, 오라버니!”
“그래. 어서 앉거라.”
“안녕, 에리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간 나는 에일런과 마주 보는 내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아버지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금세 에반이 트레이를 끌고 나왔다.
“에반!”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를 부르자 에반이 장난스레 씩 웃고는 은색 뚜껑으로 덮어 둔 접시를 내 앞에 올려 두었다.
아직 뚜껑을 열기도 전인데 벌써 매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착각이 아닌가?’
살포시 찌푸려진 아버지의 미간을 보자 정말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에일런은 의외로 매운 걸 잘 못 먹으니까.’
나는 슬그머니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에반이 접시 위를 가리고 있던 뚜껑을 열었다.
“오늘은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걸로 준비했습니다.”
에반의 말과 함께 순식간에 매운 냄새가 훅 퍼져 나왔다.
더불어 아버지의 미간에 파인 골도 한층 더 깊어졌다.
“…….”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서늘한 시선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내가 매운 걸 좋아하니 말없이 시선으로만 에반을 질책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눈빛에 에반은 껄껄 웃으며 또 다른 접시를 아버지 앞에 놓았다.
“주인님과 도련님 식사는 따로 준비했으니 걱정 마시지요.”
“흠.”
그제야 아버지의 미간이 다시 풀어졌다.
‘아버지도 가만 보면 의외인 모습이 많단 말이야.’
매운 걸 못 먹는 것도 그렇고, 귀찮은 걸 싫어하면서도 작은 동물에게는 너그러운 것도 그렇고.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에반.”
“별말씀을요. 하면 늙은이는 물러가 있을 터이니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내 인사에 한쪽 눈을 찡긋거린 에반이 허허 웃으며 자리를 떴다.
다행스럽게도 식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역시 에반은 최고야.’
오늘은 아주 작정하고 맵게 만들었는지, 아직도 입술이 화끈거렸다.
나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시원한 차를 홀짝거렸다.
“……아가, 매운 게 그리도 좋으냐?”
그런 나를 본 아버지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슬쩍 눈치를 보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거참. 먹고 나면 매워서 입술이 퉁퉁 부으면서도 그리 좋아하는구나.”
내 긍정에 아버지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슬쩍 내 앞으로 디저트 접시를 놓아 주는 손길은 말과 달리 다정했다.
“에일런, 너도 매운 게 좋으냐?”
“……저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매운 음식에 대해 얘기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