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48화(48/218)
내 타박에 유르젠이 슬쩍 제 책상을 돌아보았다.
깨끗한 방과 다르게 서류가 이리저리 쌓여 있는 책상에는 내 말대로 커피 잔이 여럿 놓여 있었다.
유르젠은 깔끔한 걸 아주 좋아하지만 일이 쌓여 있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어차피 치워도 치워도 금세 일거리가 쌓여서 전부 해치운 다음 정리하는 게 낫다나.
“……그건 또 언제 보셨답니까.”
“아까. 요즘 바쁜 일이 많은 건 알겠는데 좀 쉬어 가면서 해. 서류 처리 정도는 내가 해도 되니까.”
“그 정도로 바쁜 건 아닙니다.”
유르젠이 시선을 슬쩍 돌리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물론 신빙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소리였다.
“안 바쁘기는. 나도 보고는 받고 있거든? 농땡이도 좀 부려 가면서 해. 그래야 다른 직원들도 쉬엄쉬엄할 거 아냐.”
쫑알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유르젠은 결국 내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해도 며칠 안 가서 또 커피를 물처럼 들이켤 게 뻔하긴 하지만.’
그건 그때 또 와서 말하면 되겠지, 뭐.
“그건 그렇고 정말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데뷔탕트 준비로 바쁘실 텐데요.”
“데뷔탕트 때문에 바쁘지는 않아. 준비는 진작 다 끝냈거든.”
나는 유르젠의 말에 소파에 늘어지게 앉으며 웅얼거렸다.
드레스도 이미 주문해 두었고 유력 귀족에 대해서도 다 알아 놓았으니 데뷔탕트를 위한 준비는 전부 끝낸 거나 다름없었다.
‘아티팩트를 완성하느라 바쁘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티팩트 역시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 두고 있었으니까.
“그냥 바람도 쐬고 유르젠이랑 테인 보려고 겸사겸사 왔지.”
내 말이 끝나던 때였다.
똑똑-
“유르젠 님, 밖에 찻상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두 번의 노크 소리와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발소리가 멀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져오겠습니다.”
유르젠이 길쭉한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가락에 빙글빙글 감았다.
‘그러고 보니까 테인은 어디 갔지? 의뢰라도 받았나. 편지에 그런 소리는 없었는데…….’
테인은 내가 데려온 아일라의 사람 둘 중 나머지 한 명이었다.
내가 테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동안 유르젠이 물 흐르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홍차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나는 슬그머니 몸을 바로 세웠다.
“홍차야? 향 엄청 좋네.”
“네. 어제 아리아 왕국에서 들여온 홍차인데 아직 시중에 풀지는 않았습니다.”
“흐응. 작년에 계약서 도장 찍었던 게 이제 들어왔구나. 고마워, 잘 마실게.”
나는 익숙하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홍차 재배지로 유명한 아리아 왕국의 상등품답게 향과 맛, 그리고 부드러운 목 넘김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 망할 놈이 그렇게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하더니 다행히 돈값은 하는구나? 책임자가 영 글러 먹었길래 상품도 저질일까 걱정했는데.”
비싼 값 못 하면 배상금이라도 물리려고 했거든.
“푸읍.”
혼잣말을 하듯 한 내 말에 차를 마시던 유르젠이 사레라도 들린 듯이 콜록거렸다.
제대로 사레가 걸린 듯 고개를 돌려 기침을 참아 내는 그의 모습에 괜히 미안해진 나는 슬그머니 손수건을 내밀었다.
“자, 손수건.”
하지만 그는 내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손에 꾹 쥐고만 있었다.
‘아니, 눈물이라도 좀 닦지.’
신경질적인 미남형 얼굴에서 눈가만 붉어졌을 뿐인데 그는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괜히 시선을 마주치기가 뭐해 어색한 손길로 내 볼을 문질렀다.
“……눈물 좀 닦아. 두 번 사레들렸다간 사람 잡겠네.”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다.
내 말에 그제야 유르젠이 손수건으로 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러게 그런, 큼. 그런 방정맞은 말씀은 왜 하신 겁니까.”
“아니, 방정맞다니……. 유르젠도 그때 같이 있었잖아. 원가보다 두 배는 더 쳐줘야 한다면서 빙글빙글 웃던 거 기억 안 나?”
“……기억은 납니다만. 홍차 독점권의 책임자가 왕국의 막내 왕자였지 않습니까.”
나는 유르젠의 말에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몰라. 그 왕자 놈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아리아 왕국 홍차 독점권 건은 꽤 중요했던 거래라 머리색과 눈 색을 모두 바꾼 변장 상태로 유르젠과 함께 갔었다.
정확히는 유르젠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갔던 터라 협상 자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쪽에서도 왕자의 안위 때문에 호위 두셋은 늘 데리고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며칠 동안 아리아 왕국에 머물 수는 없어서 텔레포트로 왔다 갔다 했었다.
그런데 소문에 성격 좋고 잘생겼다던 왕국의 막내 왕자는 실제로 보자 아주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생글생글 웃어대던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 자다가도 이가 갈렸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게 내가 아니라 유르젠이었어서 다행이었지.”
“예?”
“나였으면 때려치우고 나왔을 테니까. 참 나, 잘생기고 성격 좋은 막내 왕자 좋아하시네.”
짓씹는 듯한 내 말에 유르젠이 못 말린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날 계약서 도장 찍자마자 뺨에 먼지가 묻으셨다면서 한 대 날리셨지 않습니까. 다행히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지만요.”
나는 유르젠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그건 그 왕자가 자꾸 손이라도 닿게 해달라느니 뭐니 해서 소원 들어준 거잖아. 그걸로 트집 잡으면 그쪽만 손해라고.”
첫날부터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왕자는 일정 내도록 질릴 정도로 치근댔다.
내 얼굴에 먼지가 묻었다며 스리슬쩍 볼을 만지질 않나, 춥겠다며 손을 잡으려 들지를 않나.
그때는 한여름이었다.
“유르젠, 난 아직도 그놈만 떠올리면 소름이 돋아.”
“뭐, 솔직히 저도 속이 시원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무모하셨어요.”
나는 유르젠의 말에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왕자 편을 드는 게 아닙니다. 에리타 님은 정체를 숨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약 그 왕자가 따지고 들었다면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서운함도 뒤이어 나온 유르젠의 걱정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내 걱정으로 그랬다는 사람한테 투정을 부릴 만큼 생각이 없진 않으니까.
“……알았어. 앞으로는 조심할게.”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너무 아쉬워 마십시오. ……그 왕자는 지금쯤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테니까요.”
단정한 동작으로 차를 마신 유르젠이 느릿한 손짓으로 찻잔을 받침 위에 내려 두었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뭐, 계약서에 조항 하나를 추가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왕자도 직접 동의했던 조항입니다.”
“무슨…….”
“그 정도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에리타 님께서 신경 쓰실 만큼 큰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유르젠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싱긋 웃었다.
늘상 신경질적인 그답지 않게 상쾌한 미소였다.
무슨 조항을 추가했는지 물으려던 나는 그 웃음에 얌전히 질문을 다시 삼켰다.
유르젠은 하면 한다는 사람이었고, 보통 그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는 상대방에게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지.’
나는 지금쯤 유르젠을 욕하고 있을 그 호랑말코 같은 왕자에게 닿지 않을 위로를 건넸다.
당연하게도 진심 어린 위로는 아니지만.
***
“그럼 유르젠, 나 이제 가 볼게.”
“바로 저택으로 가실 겁니까?”
“음…….”
나는 유르젠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집에 가기는 조금 아쉬운데…….
‘어차피 오늘은 아티팩트 작업도 안 할 거고.’
내 마음이 슬슬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 맞다. 메리한테 뭐 살 거 있어서 나왔다고 했었지.’
금세 결정을 내린 나는 손가락을 딱, 하고 퉁겼다. 그러자 까맣던 내 머리가 순식간에 옅은 베이지색으로 물들었다.
“나온 김에 밖에 좀 돌아다니다가 갈래.”
“……평소에도 이러고 나가십니까?”
“응? 지금 내가 뭐 어때서.”
그런 내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르젠이 한숨을 내쉬며 방 한쪽에 있는 옷장으로 다가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파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거울을 집어 들었다.
‘어디 이상한 데라도 있나? 그럴 리가 없는데…….’
거울로 이리저리 비춰 보았지만 어딜 보나 평범한 내 얼굴이었다.
“멀쩡하기만 한데.”
이상한 부분을 찾지 못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거울을 내려 두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옷 말입니다. 오늘은 날이 서늘하던데 그 차림으로는 추우실 것 같아서요.”
옷장에서 까만 겉옷을 꺼내 온 유르젠은 내게 그 옷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나는 무심한 듯 다정한 그의 말에 배시시 웃으며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톰한 원피스를 입고 나오긴 했는데, 옷 하나 더 입어서 나쁠 건 없지.
까만 겉옷을 꿰어 입자 유르젠 특유의 짙은 풀 내음이 훅 끼쳤다.
내게는 조금 긴 소매를 두 번 접자 길이가 적당해졌다.
“옷은 깔끔하게 세탁해서 다음에 올 때 돌려줄게.”
“그냥 주셔도 됩니다.”
나는 유르젠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유르젠은 결벽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깔끔한 걸 좋아했다.
그 사실을 아는 나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고는 장난스레 웃으며 거절했다.
“내가 어떻게 그래. 걱정하지 마. 뽀송뽀송한 상태로 가져다줄 테니까.”
“……정말인데요.”
“에이, 됐어. 내가 유르젠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구두 앞코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던 나는 왜인지 찝찝한 기분에 떠나려던 걸음을 멈칫했다.
‘뭔가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 테인!”
잠시 고민하던 나는 순식간에 떠오른 얼굴에 소리쳤다.
어떻게 테인을 잊고 있을 수가 있지? 나는 울상이 된 얼굴로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유르젠, 테인은 어디 갔어? 의뢰라도 받은 거야? 편지에 그런 말은 없었는데.”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면서 일주일 전에 나갔습니다. 의뢰는 아니니 개인적인 용무인 듯싶습니다.”
“그럼 언제 오는지는 들었어?”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했으니 오늘이나 내일쯤 오지 않을까요. 저는 테인이 편지를 보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내 갑작스럽고 빠른 말에도 유르젠은 차분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대답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테인이 돌아오면 내가 걱정했다고 전해 줘. 주려고 가져온 게 있는데 오늘은 못 주겠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고마워, 유르젠. 그럼 나 갈게. 다음에는 테인이랑 같이 봐.”
유르젠의 대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늦게 들어가지는 마십시오.”
“응, 알았어.”
인사를 남긴 나는 이곳에 올 때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손가락을 딱, 튕겼다.
곧바로 익숙한 빛이 내 몸을 감싸고, 순식간에 유르젠의 모습이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