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52화(52/218)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유르젠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자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대거나 협박을 하더라도 지켜만 보라는 소리야.”
나는 다시 한번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짚어 주었다.
내 여상스러운 대답에 잠시 황당한 얼굴을 하던 유르젠은 이내 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이런 곳을 운영하는 놈에게 제대로 된 정신머리가 박혀 있을 리 없는데요. 저급한 말을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유르젠은 나직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 걱정이 담긴 말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더러운 뒷세계에서 한몫 잡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그리고 그런 자들은 여자를 무시하는 성향이 짙다는 것도.
“뭐, 그건 그렇겠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물론 나 역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토록 호언장담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 유르젠에게서 받아 놓은 마물의 핵.
그건 이곳의 주인이 애타게 찾던 물건이니까.
쿵-!
나와 유르젠의 대화가 잠시 멈추었던 그때, 육중한 소리가 넓은 지하 공간 내부를 크게 울렸다.
테인이 쓰러트린 오우거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우거를 쓰러트리며 테인 역시 상처를 많이 입은 건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양새였다.
“유르젠, 우리가 가져온 치료 포션이 몇 개지?”
“중급 열 개, 상급 다섯 개입니다.”
나는 유르젠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테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리라.
“잘 챙겨 둬. 이 망할 놈들은 치료도 해 주지 않을 테니까.”
본래 수인은 사람보다 재생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빌어먹을 격투장에서는 상처 입은 수인을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하고 방치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나을 테니까.
그때, 오늘의 끝을 알리기 위해 다시금 사회자가 등장했다.
어느덧 피와 움푹 파인 자국이 낭자했던 무대는 말끔하게 치워진 후였다.
“역시 저희 격투장의 자랑인 늑대 수인답게 오우거도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어떠셨습니까? 오늘도 재미있는 볼거리에 만족하셨다면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에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짓을 고작 재미있는 볼거리에 치부하는 저 사회자도, 이런 것을 즐기려 이곳에 온 사람들도.
전부 토악질이 나올 만큼 역겨운 종자들이었다.
‘나중에 언젠가는 이런 곳이 다 사라지게 만들 거야.’
물론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깝겠지.
‘하지만 가문의 힘을 살짝 빌리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나는 몇 년 뒤의 미래를 기약하며 조용히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럼 오늘도 이곳을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또다시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가씨, 그런데 이곳의 주인은 어떻게 만나실 생각입니까? 쉽게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점점 비워지는 관객석에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유르젠이 나직하게 물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만날 수 있어. 물론 어느 정도 도박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예? 그런 건……!”
내 여상한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하려던 유르젠은 주변을 힐끗 보고는 소리를 죽였다.
“……그런 건 진작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게다가 도박이 필요하다는 건 또 뭡니까.”
슬쩍 옆을 보자 아니나 다를까 유르젠의 미간이 꾸깃꾸깃하게 구겨져 있었다.
어째 유르젠의 미간은 곧게 펴질 날이 없는 것 같네.
나는 조금만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미안. 미리 말하면 안 된다고 할 것 같아서.”
내 당당한 대답에 유르젠은 할 말을 잃은 듯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르젠은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잠시 목뒤를 주무르더니 이내 스산한 목소리로 내게 당부했다.
“정말이지……. 다음에는 이런 일 절대 안 도와드릴 겁니다. 아셨어요?”
“알았어. 어차피 다음부터는 이런 짓 하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진득하게 앉아 엉덩이에 추라도 달았는지 뭉그적거리는 사람들을 기다리기를 한참.
어느새 넓은 지하 공간에 남은 건 나와 유르젠뿐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군요. 혹시 실패한 건 아닙니까?”
“그건 아닐걸. 아마 저쪽도 간을 보고 있겠지. 여기 주인이 의외로 신중한 성격이라고 하더라고.”
이건 물론 정보 길드에 돈을 주고 의뢰한 정보였다.
유르젠과 내가 차린 상단은 벌써 꽤 이름을 날리는 상단이 되었으니 이 정도 돈이야 가볍게 쓸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십여 분쯤을 더 기다렸을 때였다.
“오늘 공연은 끝났는데 무슨 일로 남아 계신지요?”
우리의 앞 허공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역겨운 공연을 주도하던 사회자였다.
“뭐, 당연히 볼일이 있어서 남아 있었겠지.”
나는 부러 고압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사회자는 괴상한 각도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킬킬대는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꽤 고상한 말투를 쓰시는군요. 아주 구미가 당겨요.”
“내가 볼일이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네 뒤에 있는 사람인데.”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쪽 분들이 제 주인님과 만날 자격이 되는지는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그러자 날카로운 바람이 사회자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언뜻 보면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상황.
티딩, 팅-! 털썩-
순식간에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회자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과도 같은 모습에 옆에 앉은 유르젠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이 정도면 자격은 증명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제 나올 생각이 드나?”
내 말과 동시에 우리가 앉아 있던 공간이 일그러졌다.
잠시 울렁거렸던 속이 가라앉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무실의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나와 유르젠뿐이었다.
“……마법진이군요.”
유르젠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사무실 중간에 위치한 소파로 걸어가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뭐, 그래 봐야 바로 옆 공간으로 이동한 거니 그리 대단한 마법진은 아니네. 안 그래?”
내 말과 동시에 책상 뒤의 벽이 열리더니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런 이런, 제가 실례했군요. 미처 레이디를 알아 뵙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모자를 벗어 인사한 다음 내 맞은편으로 걸어왔다.
나는 여유로운 태도로 턱을 당기고는 손톱을 매만졌다.
“뭐, 먼저 찾아온 건 이쪽이니까.”
“하하. 그래도 제법 아끼는 인형이었는데 손 속에 가차가 없으시더군요.”
“자격을 증명하라고 나불거리길래. 적당하지 않았어?”
“뭐, 그런 얘기는 치워 두지요. 우선 차라도 내어 드릴까요? 이곳을 찾은 손님은 꽤 오랜만이라 들뜨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네요.”
“그럼 홍차가 좋겠네.”
“그러시지요.”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가면을 쓴 시종 이 나타나 달그락거리며 금세 차를 내어 왔다.
“뒤쪽의 호위분도 홍차로 하시겠습니까?”
남자의 질문에 유르젠은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아까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한 말을 지킬 모양이었다.
“됐어. 내 건 내가 주는 것만 먹어야지. 남이 주는 걸 받아먹으면 버릇없잖아?”
나는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이런. 제가 또 실례를 끼칠 뻔했군요.”
그런 내 대답에 남자는 재밌다는 듯 웃더니 손을 내저어 옆에 서 있던 시종을 없앴다.
“자아, 그럼 차도 마셨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좋지. 그쪽 토끼 신사는 직설적인 걸 좋아하나?”
“때에 따라서는요. 물론 지금도 환영입니다.”
능글거리는 토끼 가면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답했다.
“늑대 수인. 그것 때문에 왔어.”
그런 내 답에 토끼 가면은 잠시 당황한 듯 말이 없었다.
“……흠흠. 아시다시피 저희 격투장에서는 수인을 팔지 않습니다. 소중한 저희 식구다 보니 고작 돈을 벌고자 팔 수가 없어서요.”
조금의 정적 후 토끼 가면의 남자가 뱉은 말에 나는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데도 여기 온 이유가 늑대 수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남자의 말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눈과 코의 반만을 덮는 가면 탓에 토끼 가면에게도 내 웃음이 제대로 보일 테지.
“내가 가져온 걸 보면 그쪽도 구미가 당길 거야.”
나는 아까 품 안에 넣어 두었던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그의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토끼 가면은 동그란 모양이 도드라지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 구미를 당길 만한 게 무엇인지요? 부끄럽지만 보석이라면 저도 많아서요.”
나는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고작 보석 따위를 가져왔을까 봐? 뭐, 이건 그쪽이 직접 보는 게 좋겠지.”
나는 손안에서 굴리던 가죽 주머니를 토끼 가면과 내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턱, 얹었다.
그런 내 손끝을 따라오던 토끼 가면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그는 잠시 내 의도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이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가죽 주머니를 집었다.
나는 다시금 표정에 신경을 쓰며 태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아, 빼돌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나도 가만있을 수가 없거든.”
내 말에 주머니를 열려던 토끼 가면의 손이 멈칫했다.
“저는 신사랍니다. 숙녀분의 물건을 가로채는 짓은 신념에 어긋나지요.”
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궤변을 늘어놓는 토끼 가면에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픽 웃었다.
“혹시 모르지. 그 안에 든 걸 보면 본성을 드러낼지도.”
“흐음.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신뢰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유감입니다.”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은 하고 있지만 기분이 상한 게 틀림없었다.
저 변태 같은 놈은 진짜로 저를 신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