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4)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54화(54/218)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얌전한 자세로 앉아 있는 테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리던 때에 비해 지금은 듬직할 정도로 커진 그였지만 몸을 잔뜩 웅크리고 덜덜 떨던 어린 테인이 떠올라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이라는 계절 탓에 더 그랬다.
“테인, 잘 지냈어?”
나는 부러 느릿한 속도로 입을 열었다.
내 물음에 그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 대신 벙긋거리는 입술이 느릿하지만 한 자 한 자 확실한 모양으로 단어를 만든다.
-에리타 님이 보고 싶었어요.
그가 만들어 낸 답에 나는 눈매를 활짝 휘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더니 또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진한 얼굴에 떠오른 맑은 미소가 기꺼웠던 나는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밝게 물었다.
“아, 뭐라도 좀 마시는 게 나으려나. 테인은 코코아를 좋아했었지. 오랜만에 내가 코코아 타 줄게. 어때, 괜찮아?”
내 말에 테인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예상외로 달달하고 따뜻한 코코아를 좋아했다.
“잠시만 기다려. 금방 맛있게 타 줄게!”
그의 선선한 대답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내가 혼자 책을 볼 때 자주 사용하는 주전자와 깨끗한 컵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물병을 기울여 주전자에 물을 부은 후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꽃 위에 주전자를 동동 띄워 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끓자 꺼내 놓은 코코아 가루와 함께 뜨거운 물을 컵에 부었다.
혼자 마시라고 하면 절대 안 마실 테니 내 것도 준비했다.
“자, 여기. 뜨거우니까 조심해.”
달콤한 냄새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테인의 앞에 놓아 준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진한 색의 코코아를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컵을 매만졌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내 몫을 홀짝였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힘들진 않았어? 저택 경비가 꽤 삼엄했을 텐데.”
내 말에 테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순둥한 그 표정은 정말 힘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어요.
벙긋거린 입술이 만들어 낸 답에 나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내뱉었다.
“하긴 테인 네 기척을 알아채려면 아버지나 오라버니 정도는 되어야겠네.”
우리 집 기사들은 훈련을 조금 더 열심히 해야겠다.
내가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테인의 귀가 움찔하더니 이내 기운 없이 뒤로 누웠다.
내가 저를 타박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칭찬이야, 칭찬. 이래 보여도 우리 가문 기사들 실력이 꽤 좋거든. 그러니까 테인 네가 뛰어나다는 뜻이야.”
그제야 안심한 듯 시무룩하게 누워 있던 테인의 귀가 살며시 일어나며 쫑긋거렸다.
아마 후드 뒤에 숨겨진 꼬리도 똑같이 움찔거리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온 거야? 네가 오면 내가 찾아가려고 유르젠한테 연락해 달라고 했는데.”
내 말에 테인의 푸른 듯한 회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시 대답을 생각하는 듯 망설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르젠 님이 에리타 님께서, 제게 주실 게, 있다 하셨다고…….
평소와 달리 긴 말이라 그런지 중간중간 멈칫거렸지만 뜻을 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까 유르젠 앞에서 흘렸던 말을 전해 듣고 온 모양이었다.
“아, 맞다!”
나는 그제야 책상 한쪽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떠올렸다.
오늘 주려고 했다가 테인을 만나지 못해서 다시 가져왔던 물건.
나는 빠른 걸음으로 책상에 다가가 푸른색 상자를 집어 들었다.
테인의 시선은 그 상자에 못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예전부터 그는 내가 선물을 줄 때마다 안에 든 것을 알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다고 해서 안에 든 게 보일 리도 없건만.
그 이유를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어렸던 그가 예쁘장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만 내젓는 탓에 그 후로는 다시 묻지 않았다.
“내가 줄 게 있다고 해서 이 저녁에 찾아온 거야?”
내 물음에 테인이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걸 보니 민망한 모양이었다.
덩치는 커다라면서 순진한 건 여전히 어린 늑대일 때와 똑같았다.
“이건 평소처럼 산 건 아니고 내가 직접 만든 건데…….”
그 말에 바닥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던 테인의 시선이 순식간에 휙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후드 안에 얌전히 숨기고 있던 꼬리가 슬쩍 바닥으로 삐져나와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테인이 유난히 기분 좋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있지, 테인, ……혹시라도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면 꼭 말하기로 나랑 약속해. 알았지?”
그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만들긴 했으나, 만약 테인이 원치 않는다면 나 역시 강요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꼭 말해 줘. 테인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도 싫으니까. 알았지?”
내 말에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던 테인이 다시금 묻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들고 있던 푸른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 네 거야.”
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상자는 테인이 받아 들자 아주 자그맣게만 보였다.
방금 내가 한 말 때문인지 테인은 잠시 상자를 열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나는 아무런 재촉 없이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까.
느릿하게 움직인 테인의 손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달그락-
이내 안에 들어 있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지손톱 정도 크기의 짙은 푸른색 보석이 박혀 있는 팔찌.
테인은 아무런 말 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은색 링에 손가락을 얹었다.
하지만 상자 안에서는 꺼내지 않은 채로 잠시 매만지기만 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기쁨과 동시에 난감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인은 장신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특히나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을 죄는 것을 싫어했다.
테인의 목과 팔목, 그리고 발목의 지워지지 않는 흉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테인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팔찌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테인, 네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잠시만 나를 믿어 줄래?”
나를 응시하던 테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기분이 나쁘거나 두렵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인이 들고 있던 상자 안에서 팔찌를 꺼내 들었다.
테인의 시선은 얌전히 내 손을 따라오고 있었다.
괜스레 말라 오는 입술을 한 번 깨문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 팔찌를 차 줄 수 있겠어?”
내 말에 테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벌써 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를 옥죄고 있는 기억이 옅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내 속상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애써 꾹꾹 눌러 참으며 아주 천천히 테인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짓물렀던 붉은 흉터가 남은 그곳은 촉감마저 매끄럽지 못했다.
“딱 한 번만 해 보자. 네가 싫으면 그 이후에는 버려도 괜찮아.”
나는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테인의 흉터 위를 토닥였다.
그렇게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사락-
테인이 반대쪽 손을 들어 내 옷자락을 잡았다.
할 말이 있다는 그 제스처에 나는 테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채워 주세요.
테인이 느릿하게 달싹인 말은 다행스럽게도 승낙의 말이었다.
“응, 내가 해 줄게.”
나는 시큰해진 눈가를 깜박이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테인의 얼굴에도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끼워 줄게.”
나는 살짝 떨리는 손길로 팔찌를 들었다. 뒤이어 있을 일에 대한 생각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테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과거의 파편.
그것을 위해 더욱 열심히 마법과 아티팩트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팔찌를 만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테인의 손목으로 팔찌를 끼워 넣었다.
조금 큰가 싶던 팔찌는 어느새 테인의 손목에 딱 맞는 크기로 변해 있었다.
화악-
팔찌 중간에 박힌 보석이 잠시 밝은 빛을 발했다가 사그라들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팔찌를 내려다보는 테인은 아직 이 팔찌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지?”
끄덕끄덕
테인의 긍정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심하게 반발할까 했는데 다행이다.’
나는 천천히 팔찌를 낀 테인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테인의 목소리.
격투장에서 다친 성대는 포션 수십 개로도, 고위 신관의 치료로도 되돌릴 수 없었다.
테인이 격투장에 잡혀 온 건 다섯 살 때라고 했다.
난도질을 당하듯 무참히 베인 성대는 테인에게서 목소리를 앗아 갔다.
내가 테인을 데려왔을 당시에 그는 열여섯이었고, 십 년이 넘은 상처는 이미 되돌리기에 너무 늦은 상태였다.
어떤 방법으로도 손쓸 수 없다는 말에 눈물을 펑펑 흘리던 나를 달랜 것은 가장 속상했을 어린 테인이었다.
그렇게 사람에게 학대를 당하고도 부드러운 손길 두어 번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던 어린 늑대.
말은 하지 못했지만 영민한 늑대는 가르쳐 준 지 얼마 되지 않은 서투른 글씨로 나를 위로했다.
‘……눈물, 싫어요. 웃으면, 좋아.’
그러고는 곧장 늑대로 변해 내 발치를 감싸고 누웠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내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던 아이는 늑대 모습마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때의 삐뚤던 글씨를 속으로 다시 한번 떠올리자 다시금 눈가로 열이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테인을 만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던 어느 날이었다.
나를 위로했던 테인이 유르젠을 붙잡고 우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그날의 기억
이 아직도 생생했다.
저도 내 이름을 부르고 싶다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테인에게,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어 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문 뒤에서 바라본 나는 테인에게 꼭 목소리를 되찾아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내 다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테인.”
나는 조금 잠긴 것도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 내 이름 한 번만 불러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