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57화(57/218)
“아가씨,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내 얼굴을 붓으로 톡톡 두드리던 메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나?”
“으음. 주인님이나 소대공님이 보시면 바로 알아채실 것 같아요.”
“일단 볼이 퉁퉁 부으셨어요.”
뒤에서 내 머리를 매만지던 마릴린이 메리의 말을 거들었다.
그들의 대답에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분명 어제는 목욕을 끝내고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잠들었단 말이지.
혼자 고민을 하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이건 내가 아는 사람의 얘긴데…….”
“네에.”
“이거는 그,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부끄러움이 조금 많아서. 알았지?”
“그럼요. 절대 말 안 할게요.”
“비밀로 할게요.”
메리와 마릴린의 비밀 약속을 받아 낸 나는 최대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내가 아는 사람을 베리라고 할게. 그, 베리가 두 번 정도 만난 사람이 있거든? 이름도 알고 같이 놀기도 했대.”
“그런데요?”
“으음. 근데 어느 날 베리가 광장에 나갔다가 그 사람을 본 거야. 그런데 베리는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해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까 그 사람이 사라진 상태였대.”
“흐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내 말을 들은 메리와 마릴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건 내 이야기가 맞았다.
어제 테인이 와서 잊어버렸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어제 내가 광장에서 본 건 리안이 맞았다.
‘닮은 사람이라기에는 얼굴이 너무 똑같았다고.’
아주 멀리서 본 것도 아니고, 스무 걸음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니 확실할 테지.
“그런데 아가씨.”
“응?”
“베리가 만났다던 사람이 혹시 남자예요?”
“응.”
“……아는 건 이름밖에 없고요? 나이라든가, 어디 산다든가 그런 것도 모른대요?”
“으음. 나이는 모르고, 수도에 산다는 거 정도……?”
어쩐지 살벌해 보이는 마릴린에 살짝 눈치를 보며 대답하자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던 메리의 손이 뚝 멎었다.
질문을 했던 마릴린 역시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불편한 정적도 잠시.
“아가씨.”
“으응?”
마릴린이 왠지 모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말은, 아주 신랄하고 직설적인 리안의 욕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리안은 순식간에 빌어먹을 놈이 되어 버렸고, 나는 그런 마릴린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
“에리타, 네게 온 편지란다.”
그 말과 함께 아버지가 연한 보랏빛의 편지 봉투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네? 제 앞으로 온 편지요?”
차를 홀짝이던 나는 아버지의 말에 찻잔을 받침 위로 내려놓았다.
내 앞으로 온 편지가 왜 아버지한테 갔담.
‘원래 내 앞으로 오는 편지는 전부 시녀들이 내 방에 가져다주는데…….’
그리고 사실 사교계 데뷔를 하지 않아 딱히 친분이 있는 이들이 없는 나는 편지를 받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발신인은 기껏해야 북부의 시녀들이나 아니면 릴리 정도.
“음, 이상하네요. 집무실로 잘못 올라갔나?”
“실수가 아니라 이건 내가 직접 받은 편지란다.”
그 말에 더 아리송해졌다.
“아까 아침에 세이안을 만났거든. 그때 네게 전해 달라며 주더구나.”
“후작님이요?”
아버지가 밀어 준 편지를 집어 들자 그곳에는 정갈한 필체로 내 이름과 세이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봉하고 있는 실링도 삐져나간 부분 하나 없이 매끈했다.
답장을 보낸 게 어제저녁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만난 아버지에게 전해 달라고 한 걸 보니 꽤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이따 방에 올라가서 답장을 써야겠네요.”
나는 작게 후후 웃으며 편지를 잘 챙겨 두었다.
그런 나를 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따뜻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내가 세이안과 잘 지내기를 바라셨으니까.
“그보다 세이안이 네게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하더구나.”
“선물요?”
“그래. 네가 직접 자수를 놓은 손수건이랑 아티팩트를 받았다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 그거 말씀이시구나.”
처음 만남 이후로 지금껏 세이안과는 두 번을 더 만났다.
한 번은 세이안이 우리 집으로 왔었고, 바로 저번에는 내가 세이안의 집으로 갔었다.
‘지금 세이안이 사는 곳은 어릴 때 세르비아와 함께 살았던 저택이라고 했었지.’
그 탓에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집으로 초대를 했던 세이안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버지가 말한 손수건과 아티팩트는 비센테 저택에 방문했을 때 내가 선물로 줬던 것이다.
나도 보석이나 옷을 준비하려다가 왜인지 그것보다는 직접 만든 걸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지.
“처음에 후작님과 만났을 때 주셨던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 겸 드렸죠.”
“흐음.”
“다행히 좋아해 주시더라구요.”
“당연히 좋아했겠지. 누가 준 선물인데.”
“뭐, 후작님이 주신 선물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요.”
아직도 그때의 당황스럽던 기분이 생생했다.
내가 살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은 나이를 그리 먹고도 여전히 어린애나 다름없어.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주기 좋아하는 성격은 영 변하질 않는구나.”
흘러나온 말은 그 내용만 본다면 한탄이나 푸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희미하게 휘어진 눈꼬리에서 그 말에 세이안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후작님을 아끼시잖아요. 후작님도 아버지를 엄청 좋아하시구요.”
“뭐……. 툭하면 울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 어쩔 수 없지.”
내 장난스러운 말에 아버지는 픽 웃으며 긍정했다.
아버지가 세르비아와 결혼했을 당시 세이안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다고 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세이안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보아도 아버지는 아주 좋은 가족이었던 것 같았다.
그 무뚝뚝한 성격으로 어린 세이안에게 검술도 알려 주고 목마도 태워 줬다고 했으니까.
그런 아버지의 다정함을 겪었던 세이안이 아버지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내게 아버지와 누님을 닮아 이리 어여쁘게 자랐다 말하며 울던 세이안을 떠올렸다.
“후작님은 지금도 눈물이 많으신 것 같던데요.”
“네 앞에서 또 울더냐?”
첫 만남부터 눈물을 터뜨렸던 세이안은 바로 이전 만남에서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으음. 사실 선물 드렸을 때요. 제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서 다정하게 컸다면서 우셨어요.”
왜인지 일러바치는 기분에 멋쩍은 목소리로 긍정하자 아버지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한 손을 얼굴을 덮었다.
“그렇게 이제는 울지 않겠다 다짐을 하더니 일주일도 못 갔군.”
그 후로 잠시 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상에 앉은 나는 챙겨 왔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작은 칼을 꺼내 찢어지지 않도록 실링을 떼어 내자 희미한 꽃 내음이 퍼져 나왔다.
“향수 뿌리셨나 보네.”
꺼내 든 종이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기에 슬쩍 웃은 나는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렸다.
어제저녁에 답장을 보냈건만 오늘 아침에 전해 받았다던 세이안의 편지는 무려 두 장이었다.
세이안은 유약하고 조용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생각보다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틀 후에 따로 일정이 있던가?”
두 장에 걸친 편지 내용은 이틀 후에 같이 광장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에일런과 광장에 갔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더라니.
“아가씨, 저 메리예요.”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메리가 문을 두드렸다.
“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메리의 품에는 노란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데뷔탕트에 맞춰서 주문한 장신구 하나가 먼저 도착한 것 같아서요. 아가씨께서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들고 왔어요.”
“그렇구나. 그건 되게 빨리 왔네? 같은 데서 시켰으니 원래 다 비슷한 시기에 오지 않나?”
나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다른 귀족들은 드레스 따로 구두 따로 장신구 따로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나는 전부 한 군데에서 샀었다.
“아, 그거 말인데요……. 이건 마담 데린의 살롱에서 온 게 아니에요.”
“응? 그거 말고는 따로 주문해 둔 게 없을 텐데.”
나는 이 정체 모를 상자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주시는 것도 아니고?”
“네. 전해 준 아이의 말로는 다른 지역에서 보낸 거라고 하더라구요.”
메리의 말에 어쩐지 한 가정이 떠올랐다.
“메리, 나 왠지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은데.”
“네? 누가요?”
내 말에 메리가 둥근 눈을 커다랗게 뜨며 되물었다.
나는 메리처럼 둥근 눈매를 가졌지만 성격은 아주 왈가닥이 따로 없던 한 아이를 떠올렸다.
“노란색을 좋아하던 장난꾸러기 아가씨 말이야.”
“어머. 릴리 아가씨 말씀이세요?”
메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내가 북부에 있을 때 만난 백작가의 아가씨였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리센 고아원에 있던 심술쟁이 릴리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뭐, 생긴 것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완전 딴판이었지.’
릴리라는 이름을 듣고 떨떠름했던 건 잠시였다.
우리 가문의 가신인 레미안 백작 가문의 독녀였던 릴리 레미안은 한 살 많은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었다.
나 역시 그런 릴리를 귀여워했고.
“다른 지역에서, 그것도 이런 노란 상자를 보낼 사람은 릴리밖에 없지.”
나는 작게 웃으며 노란 상자를 감싼 하얀 리본을 슥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리본은 별다른 저항 없이 스르륵 풀어졌다.
“하긴, 릴리 아가씨 송별 파티에 참석 못 하신다고 엄청 안타까워하셨죠.”
“레미안 백작 부인이 갑자기 아프셨으니 어쩔 수 없지. ……세상에.”
메리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상자 안에서 드러난 물건에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어머.”
슬쩍 상자를 바라본 메리 역시 나와 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의 눈 색과 똑같네요! 엄청 예뻐요.”
상자 안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던 건 내 눈 색과 같은 보라색 보석을 메인으로 한 화려한 귀걸이 한 쌍과 세트로 보이는 팔찌 하나였다.
그리고 상자의 옆면에는 작은 편지 봉투 하나도 살포시 끼워져 있었다.
“답장할 편지가 두 개가 됐네.”
얼른 편지를 꺼내어 읽어 내린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