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6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65화(65/218)
화창한 어느 날의 오후.
넓은 집무실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은발의 남자는 무언가 고심하는 얼굴이었고, 그 앞에 선 붉은 곱슬머리의 남자는 화병이 날 것 같은 심신을 달래는 중이었다.
바론 재클린.
제국의 명문가 재클린 후작가의 차남이자 상급 마법사.
그는 제 자신이 객관적으로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스물네 살에 황자의 보좌관이 되었으니 능력도 이만하면 괜찮고, 얼굴도 제법 봐 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정한 아버지와 엄한 어머니, 그리고 망나니 같은 형이 하나 있는 그는 지금껏 제 인내심의 대단함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형이라고 부르고도 싶지 않은 망할 놈이 어릴 적 좋아했던 여자아이 앞에서 오줌싸개라 놀렸을 때도.
사춘기 때 망나니 형 자식이 침대 밑에 숨겨 둔 빨간 딱지의 책을 어머니께 그대로 가져다 바쳤을 때도.
조금 열이 뻗쳤을지언정 그의 인내심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터웠던 인내심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것도 존경과 애증의 대상인 제 주군에 의해서 말이다.
“후…….”
사 년 전, 치기 어린 스무 살의 바론은 전쟁터에서 본 2황자의 모습에 매료되어 덜컥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황자를 보필하라며 전쟁터로 보냈던 어머니의 뜻이 제 뜻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사 년간 충실히 그를 모셨고, 지금은 그의 보좌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황자 전하.”
눈앞의 2황자는 바론의 부름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를 가진 남자가, 고작 생각 좀 한다고 저의 부름을 못 들었을 리 없다.
저 멍한 듯 심드렁한 표정은 그냥 제 말을 씹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생각하는 걸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게 되는 상황이 아니니까 그렇지!
“……즌하.”
바론이 이를 지르물고 다시 한번 제가 섬기는 이를 불렀다.
“…….”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칼리온의 반듯한 얼굴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까부터 몇 번을 불렀는데 제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냐는 말이다.
그것도 어젯밤부터 한숨도 자지 않고!
‘……참자, 바론. 너는 교양 있고 지적인 남자다.’
그는 애써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분명히 어제 그렇게 말리는 저를 따돌리고 나갔던 곳에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입도 벙긋하지 않으시니, 바론으로서는 답답함만 쌓여 갈 뿐이었다.
결국, 교양을 잠시 내려 둔 바론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황자 전하!”
목이 다 칼칼했다.
집무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가 되어서야 매끈한 얼굴이 느릿하게 바론의 쪽을 향했다.
그런 칼리온의 얼굴에는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이 매달려 있었다.
놀란 기색도 없어 더 짜증이 나는 속내를 바론은 애써 삼켰다.
“귀 안 멀었어.”
칼리온의 대답은 표정과 똑같이 아니꼬운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저, 저……!’
그 적반하장의 태도에 바론은 씩씩대며 불만을 다다다 쏘아붙이는 제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귀가 안 멀었는데 제 목소리는 왜 안 들리시죠? 제가 부르는 게 들리지 않으시는 걸 보니 그냥 귀를 먹으신 것 같은데요.’
당장에라도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는 상상만으로도 충족감이 몰려와 마음이 포근해졌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상한 머리는 눈앞의 남자가 제 상사이며 주군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수 없다는 게 정말이지 아쉽기 짝이 없었다.
한 번이라도 하극상을 일으켜 보고 싶었는데.
그래 봤자 이 상태의 칼리온은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듣기 싫다는 뜻으로 잘 알아들어야지. 몇 년을 옆에 있어 놓고 그것도 몰라?’
돌아올 대답이 이렇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제 주군은 대체로 그림 같은 미소를 매달고 있는 얼굴이었으나, 그건 주변에 누군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칼리온의 본래 성격은 서글서글한 것과는 아주, 아주,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지랄맞다거나 더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속을 알 수 없을 뿐.
사 년을 함께해 온 저였지만, 아직도 제 주군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크흠! 지금까지 제가 말한 건 제대로 들으셨습니까?”
“어.”
짤막한 대답에 다시금 바론의 혈압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하다못해 들었어, 이 세 글자 말하는 게 어렵냐고.
“제가 드린 말씀이 뭔데요.”
절로 불손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것까지 막기에는 제 인내심이 빈약하다는 것을 바론은 드디어 인정했다.
칼리온이 표정 변화 없이 무심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틀 뒤에 황위에 대해서 발표하실 거라고 했지.”
지금껏 나온 대답 중 가장 길었다.
여상한 어조는 평소의 비꼬는 듯한 말투도 아니었다.
물론 그 대답 역시 바론의 끓는 속을 식혀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바론은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태평하게 대답하실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다가 황제 폐하께서 1황자님을 황태자 자리에 올리기라도 하시면 일이 더 복잡해질 텐데요.”
물론 저희가 세운 계획 중에는 1황자가 황태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계획보다 다소 복잡한 건 확실했다.
“황제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초조한 바론과 달리 칼리온의 대답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내뱉은 어조에 약간의 실소 내지는 비웃음이 섞인 것도 같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황제로 죽을 인간인데.”
짓씹는 듯한 말투가 낮게 깔렸다.
칼리온은 제 생물학적 아버지인 황제를 잘 알았다.
그는 아무리 핏줄이라고 해도 그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쉬이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끝없는 그의 탐욕이 그것을 허락지 않을 테니까.
사랑한다던 이조차도 그리 쉽게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나. 죽어 가는 걸 알면서도 방관한 인간이었다.
칼리온이 잠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이, 바론은 진지한 얼굴로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원래는 건국 기념일에 발표하는 게 통상적인 관례인데, 갑자기 당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흐음.”
“그리고 요즘 레노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도 아시잖아요. 황제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를 자주 찾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않다는 건 귀족이라면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황제가 황후를 자주 찾는다는 소리를 들은 바론은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바론은 최근 레노센과 그 파벌 가문들의 동향을 줄줄 늘어놓았다.
확실히 하나같이 무언가 미심쩍은 기운을 폴폴 풍기고 있기는 했다.
물론 바론의 걱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현재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는 들어 두어 나쁠 것이 없었다.
그제야 칼리온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여전히 삐딱하긴 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적어도 대화할 의사라도 보이는 자세였다.
“계속 말해 봐.”
“1황자 측에서 중립을 표방한 가문들에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던 거잖아.”
“아뇨, 이전과는 다르게 압박의 정도가 더 거세졌다고 합니다. 조금 더 있으면 행동까지 들어갈 것 같다고 하던데…….”
바론이 끝말을 흐렸다.
칼리온은 책상 끄트머리를 느릿하게 툭툭 두드렸다.
잠시 작은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제국의 두 황자가 황위를 두고 대치하는 사이라는 건, 제국민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이야기다.
겉으로 보이기에 그 중심추가 확연히 1황자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도.
‘……레노센 공작가.’
황후의 외척으로, 1황자의 가장 큰 세력이자 현재 수도 귀족 중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가문.
확실히 황후와 레노센을 중심으로 뭉친 1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대단했다.
숫자로만 나눈다면 정치에 발을 걸친 귀족 중 5할 이상이 1황자파였다.
그리고 중립 세력이 3할, 칼리온의 세력이 2할쯤 되었다.
물론 지지 세력의 수가 권력의 척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었으나, 1황자가 우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쪽이 접근한 곳 중에 파악된 곳은 몇 군데지?”
“열넷입니다.”
“우리 쪽은.”
“일곱입니다.”
“흠.”
바론의 빠른 대답에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거둬들인 칼리온이 낮게 목을 울렸다.
현재 유력 귀족 중 중립을 고수하는 가문은 스물에 조금 못 미쳤다.
“두셋 정도는 굽히는 척해야겠군.”
칼리온이 혼잣말을 하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옆에 놓여 있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새까만 만년필을 쥔 손가락은 수려했으나, 검을 휘두르는 이들 특유의 굳은살이 새겨져 있었다.
사각사각-
바론을 앞에 둔 칼리온은 유려한 필체로 편지를 적어 내렸다.
그 손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완성된 편지는 한 장이었다.
“케이든에게 전달해.”
“답신을 받아 올까요?”
“아니. 나중에 보고가 올라오면 그것만.”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바론은 여전히 불안한 감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탁-
작은 소리를 내며 닫힌 문 너머로 바론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아…….”
잠시 문을 응시하던 칼리온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어젯밤, 제게서 등을 돌린 이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 리안 경.
제가 거짓으로 알려 준 이름을 부를 때의 목소리는 맑았다.
– ……황자 전하.
하지만 제 정체를 알아낸 직후의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탁했다.
다정한 보라색 눈동자는 저를 외면하듯 빗겨 나갔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더 이상 저를 친근하게 여기지 않았다.
먼저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주제에 그 모습을 보자 초조해졌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칼리온은 내쉬어지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기적이고 한심한 작태라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간 얼굴이 내비쳤던 감정의 파편이 자꾸만 머릿속을 갉작댔다.
칼리온은 죄여 오는 가슴에 괜히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렸다.
목이 죄이는 이유가 셔츠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랬다.
경악과 배신감이 떠오른 얼굴에 미약하게 스쳐 지나간 건,
‘……봐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지.’
선명한 두려움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