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6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68화(68/218)
나는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귀족들의 고개가 우리에게로 향했다.
날아드는 시선들은 아버지와 에일런을 빗겨 나 내게 머물렀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양호하긴 한데…….’
하지만 구경거리가 된 듯한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게 호의가 담긴 눈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집요하게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별로였다.
‘정식으로 파티가 시작하기 전에는 정해진 자리 근처에만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
오늘은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 날이니, 황후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귀족들 역시 문에서 단상까지의 길을 틔워 놓고 그 양옆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와 같이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오늘 연회의 주된 목적인 사교계 데뷔를 위해 온 귀족 영애들이었다.
일주일 동안 열리는 연회의 첫날, 하얀 계열의 드레스를 입는 건 새로이 데뷔하는 이들뿐이니까.
아버지와 에일런, 나는 터져 있는 길을 따라 쭉 걸어갔다.
몇 년 전 페른에게 예법을 배울 때가 생각났다.
-대전 회의든 황궁 연회든 황궁에서 귀족들이 도열하는 순서는 계급대로입니다.
-무조건요?
-예, 적어도 황궁에서는 무조건입니다. 문부터 시작해서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순이죠. 대공가는 귀족 중 가장 앞이구요.
-……무슨 줄 세우기도 아니고.
내 말을 들은 페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하. 뭐, 줄 세우기도 틀린 말은 아니죠. 귀족들은 권력에 예민하니까요. 아마 아가씨께서 더 자라셔서 황궁 연회에 가 보시면 확실히 느끼실 겁니다.
그때의 떨떠름하던 기분이 다시금 살아났다.
“대공 전하. 에일런, 에리타.”
자리에 서서 묘한 표정으로 주위를 쓱 훑어보던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안, 너도 왔군.”
“에리타의 사교계 데뷔가 아닙니까. 당연히 저도 와야지요.”
어디선가 나타난 그 사람은 세이안이었다.
세이안은 아버지와 에일런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는 환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후작님, 오랜만에 뵈어요.”
“일주일 만에 보는구나. 잘 지냈어?”
“그럼요. 아, 보내 주셨던 꽃은 잘 받았어요! 제 방에만 두기에는 너무 많아서 하녀 아이들에게 좀 나누어 줬는데……. 편지에 쓴다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허락 없이 나눠 줘서 미안하다는 내 말에 세이안은 선물로 준 것이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보다 첫 데뷔를 하는 건데, 떨리지는 않고?”
그의 물음에 나는 눈꼬리를 살풋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긴장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요.”
확고한 목표가 있어서 그런지, 첫 연회라는 것에 대한 떨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뭐, 다른 이유로 긴장이 되긴 하지만.’
따지자면 내 사교계 데뷔보다도 원작이 시작된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이 더 심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첫 춤은 에일런과 춘다고 했었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세이안의 말이 이어지던 내 생각을 끊어 냈다.
“아, 맞아요.”
보통 데뷔탕트의 첫 춤은 가족이나 사촌 형제와 춘다.
누구와 첫 춤을 출지를 정할 때 아버지와 오라버니 사이에 흐르던 살벌한 기류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는 두 분 중 누구와 춤을 추실 겁니까?
페른의 그 말이 시작이었다.
나는 고르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와 에일런은 대련으로 승패를 냈다.
도대체 첫 춤이 뭐라고 그렇게 열을 올렸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잠시 그때를 떠올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세이안에게 마저 대답했다.
“첫 춤을 추는 상대 자리를 두고 아버지랑 오라버니가 대련을 했는데, 오라버니가 이겼거든요.”
내 말을 들은 세이안의 순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에일런이 아슬란 님을 이겼단 말이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는 놀람과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가 묻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가 이겼어요.”
“어떻…….”
“누가 아버지 뒤통수를 쳤거든요.”
경악이 어려 있던 세이안의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변했다.
나는 짧고 간략하게 페른이라는 마법사가 있는데 그가 중간에 아버지한테 마법을 쐈다, 라고 설명해 주었다.
“평소에 부려 먹었던 거에 대한 복수라고 했던가? 하여튼 그래서 지금 얼굴이 퉁퉁 부었어요. 아버지한테 특훈을 빙자한 폭행을 당했거든요.”
그러자 세이안도 이해를 했는지 옅게 하하 웃었다.
오늘 페른이 오지 못한 이유도 얼굴이 전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래도 싸다고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하여튼 그래서 오늘의 제 파트너는 오라버니랍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때마침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누고 있던 에일런의 시선이 잠시 이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러이 웃어 보이고는 다시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선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온 건 절대 내 착각이 아니었다.
‘……이미 에일런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꽤 많은 모양인데.’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얼굴을 붉히고 에일런을 바라보는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에일런 님이 웃으셨어!”
“세상에, 평소에는 그렇게 서늘한 표정이신데.”
약간의 마법을 사용해 엿들어 본 내용이었다.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도 내 오라버니의 잘생김을 가리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더 그들의 반응을 들으며 속으로 같이 웃은 후 마법을 거둬들였다.
잠시 주위를 힐끗 바라본 내 시선이 황족만이 앉을 수 있는 높은 단상을 향했다.
다시 현실적인 고민이 닥쳤다.
‘아티팩트를 사용하려면 적어도 다섯 걸음 이내에 있어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 어떻게든 황후에게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게 내게는 가장 큰 과제였다.
이번 연회가 아니면 내가 개인적으로 황후를 볼 일이 없으니까.
거기다 이틀 후면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아일라도 이곳에 올 것이다.
그리고 운명처럼 칼리온과 마주치고, 결국 사랑에 빠지겠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칼리온을 떠올리자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가 실수하면 안 되는데…….’
나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숨을 후 뱉었다.
그때였다.
“제국의 가장 고귀하신 달, 아이샤 레노센 황후 폐하, 테시스 루인 엘베르 1황자 전하 드십니다!”
우렁찬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 문이 열렸다.
그러자 여전히 내게로 와 닿던 시선들도 전부 그리로 향했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렸다.
피처럼 붉은 화려한 적발과 순금을 녹인 듯 반짝이는 금발이 눈을 사로잡았다.
‘……황후와 테시스.’
단 한 번 보았지만, 지난 8년 동안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이들이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벌써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문에 가까이 있던 이들이 가장 먼저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진짜 꿇는구나…….’
무릎을 꿇는 건 황제와 황후에게만 바치는 예의였다.
황후와 1황자는 그런 귀족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또각또각-
저벅저벅-
빛을 반사할 만큼 깨끗한 대리석 바닥. 그 위를 밟는 두 쌍의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단상을 향해 걸어왔다.
그때마다 귀족들이 몸을 낮추어 경의를 표했다.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근데 원래 황후랑 테시스가 같이 입장했던가?’
원작에서는 따로 입장했던 것 같은데…….
‘뭐…… 이런 게 중요하겠어? 지금 바뀐 원작 내용이 몇인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어느덧 황후와 1황자가 정해진 자리에 올랐을 때.
후작가를 비롯한 그 이하의 가문들은 전부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예법상, 황궁 연회에서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를 뵈었을 때는 대공가와 공작가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래요?
-예. 황족에 대한 예의거든요. 저도 꿇어야 합니다.
-근데 왜 연회에서만 무릎을 꿇는데요? 예의가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그야 연회에 귀족들이 많이 오니까요. 이래저래 말을 붙이긴 해도 그냥 황권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귀족들보다 위에 있는 자가 누군지를 알리면서 황실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거죠.
언젠가 페른에게 배웠던 예법이었다.
‘……과시하기 위함이라더니.’
이백이 넘는 귀족들이 전부 무릎을 꿇은 모습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없던 경외도 생겨날 지경이다.
속으로 고개를 저은 나는 배웠던 대로 고개를 살짝 숙이기만 했다.
우리와 같이 무릎을 꿇지 않은 공작가의 사람들은 전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확실히 우리 가문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
크로바하츠가는 초대 황제에게 황족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어도 되는 자격을 허락받았다.
그랬기에 황제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었고, 칼도 차고 있을 수 있었다.
다른 황족들조차 황제를 알현할 때에는 무기를 반납해야 하는 걸 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들 일어나세요.”
황후가 일어남을 허락했다.
그녀는 고아하게 몸을 세운 자세로 입을 열었다.
“우선…….”
하지만 높은 목소리는 채 한마디를 끝내지 못했다.
“칼리온 루인 엘베르 2황자 전하 드십니다!”
다른 황자의 입장을 알리는, 커다란 시종의 외침이 연회장 안을 울렸으니까.
황후의 눈가가 살짝 떨림과 함께 거대한 문이 입을 쩍 벌렸다.
내 시선도 절로 그곳을 향했다.
저벅저벅-
고요하게 숨죽인 연회장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발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일전에 황후와 1황자의 걸음이 느릴 정도로 여유로웠던 것에 비해 확실히 빠른 속도였다.
화려한 제복과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 그리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수려한 얼굴.
내가 알던 모습과 달라진 건 화려한 옷과 머리카락의 색뿐이었다.
‘……진짜 리안이 칼리온이었구나.’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시금 깨달았다.
칼리온이 내 앞을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눈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떨려 버릴 것 같아서.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나 오라버니는 뭔가 눈치챌지도 몰라.’
다행히도 칼리온은 단상을 향하는 걸음을 단 한 번도 늦추지 않았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당당하게 황후와 1황자의 앞에 선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