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2화(72/218)
“테인?”
익숙한 잿빛 머리칼을 보자 절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긴 어떻게…….”
반갑기도 했지만, 그보다 놀란 감정이 더 컸다.
얘가 왜 여기 있어? 아니, 그보다…….
“잠깐, 잠깐만.”
입술을 달싹이는 테인에게 손을 내저은 나는 급히 발코니 주변과 아래를 살폈다.
테인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그가 발코니로 올라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까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도 저를 본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 내 모습에 테인이 순하게 웃으며 나를 만류했다.
“그래?”
“네. 적어도 제 시야가 닿는 곳에는 아무도 없어요.”
테인은 순혈 늑대족이었고, 신체 능력은 가히 축복받은 수준이었다.
그런 테인이 장담했으니 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리라.
“다들 연회장 안에 있나 보네. 다행이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우리 주변에 마력을 둘렀다.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한다면 이상할 테니, 존재감을 지우는 마법과 사일런스 마법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보지 않는 이상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었다.
“오랜만이야, 테인.”
평소처럼 머리칼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어 올리자 테인이 자연스럽게 몸을 낮춰 주었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살이 빠진 건지 턱선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테인, 살 빠진 것 같은데……. 요즘 힘들어?”
“아뇨. 그냥 훈련을 좀 열심히 했더니 그런가 봐요.”
내 걱정스러워하는 물음에 테인이 아니라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훈련도 쉬어 가면서 해. 테인은 좀 게으르게 지내도 될 것 같다구.”
“그럴게요, 에리타 님.”
까칠해진 눈 아래를 살살 문지르며 타박하자 테인이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내 손에 볼을 기대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제 목소리가 안 떨리네?”
며칠 전 통신구로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여전히 어색한 듯 뚝뚝 끊기던 목소리가 이제는 매끄러웠다.
일부러 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 듯싶었다.
“연습 많이 했어요.”
테인이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며 배시시 웃었다.
만약 꼬리를 드러내고 있었다면 기분 좋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겠지.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야?”
조금 더 테인을 토닥이고 있었을까. 그제야 본론이 생각났다.
여기가 집이었다면 더 오래 같이 얘기를 나누었겠지만, 여기는 데뷔탕트 연회가 한창인 황궁이었다.
테인이 아무 용건도 없이 여기까지 날 찾아왔을 리는 없고.
“아, 유르젠 님이 에리타 님께 급히 전해야 하는 게 있다고 해서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몸을 바로 세운 테인이 품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급하게 전해야 하는 거?”
지금 내가 데뷔탕트 연회를 치르러 온 걸 알면서도 보내야 할 정도면 아주 중요한 일인가 본데.
하지만 어제 연락했을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고 했었단 말이지.
“무슨 일이길래 유르젠이 널 여기까지 보냈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인에게서 서류 봉투를 건네받았다.
“이거 이따 집에 가서 봐도 되는 거래?”
만약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니라면 잠시 아공간에 넣어 두었다가, 파티가 끝난 후 볼 생각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기 있으면 에일런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물론 에일런이 이곳에 신경을 집중하지 않는 이상은 마법이 우리를 가려 줄 테지만.
“유르젠 님은 그녀에 관한 거라고 하면 에리타 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나는 테인의 입에서 나온 그녀라는 단어에 곧바로 봉투를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봉투에서 나온 건 한 장의 보고서였다.
“……!”
그리고 그 내용을 읽어 내린 나는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아일라 디엔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음. 디엔 남작 부부 슬하에 아들인 일라이 디엔 외에 다른 자녀는 없음.]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다시 읽어 보아도 내용은 같았다.
그 아래에는 디엔 남작가의 세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지만, 저 두 문장이 내 눈에 깊게 박혔다.
원작의 여주인공인 아일라 디엔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아일라의 부모인 디엔 남작과 그녀의 오빠인 일라이 디엔은 버젓이 존재하지만, 아일라는 없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
멀쩡하게 존재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분명 몇 년 전에도 아일라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고, 그 결과에 관한 서류 역시 내 방 서랍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에리타 님?”
그런 내 반응에 테인이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불렀지만, 나는 그 부름에 대답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에 절로 몸의 힘이 쭉 빠졌다.
“주인님!”
휘청거리며 난간을 짚자 테인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부축했다.
부르지 말라고 했던 호칭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을 지적할 정신 따위는 없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누군가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여주인공의 존재를 지워 버린 세상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테인, 유르젠이 다른 말은 안 했어?”
“아뇨. 다른 말은 없었어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묻자 테인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그의 반응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일단 테인, 돌아가서 유르젠한테 이따 연락하겠다고 전해 줄래?”
나는 애써 옅은 미소를 지으며 테인을 돌려보냈다.
“네……. 그렇게 전할게요.”
테인은 내가 걱정되는 건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지만, 결국은 어두운 밤하늘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가벼운 몸놀림으로 테인이 사라진 후,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테인의 앞에서 보였던 감정의 조각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의 반도 되지 않았다.
“……아일라의 존재가 사라지다니.”
아무리 원작이 틀어지고 전개가 달라졌다지만 이건 그것과는 결이 다른 문제였다.
만약 디엔 남작 가문을 찾지 못한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원작이 틀어졌으니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적지만 타국으로 망명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디엔 남작가의 다른 사람들은 살아 있잖아.’
아일라의 가족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그 구성원 중 단 한 명의 존재만이 지워지다니.
그것도 이 원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멀쩡하게 존재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게 말이나 돼?”
그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못할 일이자, 이 세상의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물음이었다.
“하…….”
짧은 순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후. 정신 차려, 에리타 크로바하츠.”
흘러나온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려 애를 썼다.
지금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무사히 연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거였다.
“그래. 이따 집에 가서 유르젠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는 한번 들은 사실을 쉬이 잊지 않았다.
내가 사 년 전 가볍게 했던 말도 기억하는 유르젠이니까.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자 하는 내 의지와는 별개로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만약 유르젠마저 아일라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 홀로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거라면?
가정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런 거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냐. 기억하고 있을 거야.’
나는 자꾸만 나를 좀먹는 생각을 애써 구석으로 밀어내고 내 희망을 되뇌었다.
오늘도 이렇게 아일라에 관한 정보를 나한테 보내 줬잖아.
유르젠도 잊었다면 이 정보를 나한테 보냈을 리가 없어.
선명히 떠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속으로 계속해서 아닐 거라는 말만 되뇌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로 이 두려움에 잠식되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
칼리온은 제 앞에 선 이들이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황자 전하! 이리 훤칠하신 모습을 뵈니 소문이 영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소문이 너무 겸손한 게지요!”
“장성하신 모습이 소문의 열 배라도 모자라지 않으십니다!”
콧수염을 기른 백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꺼낸 말에 그의 주변에 있던 귀족 몇이 껄껄 웃으며 동의했다.
몇 마디 받아 줬다고 금세 이런저런 말을 붙여 대는 꼴이 우스웠다.
4년 전, 전쟁터로 향한 칼리온은 고작 반년 만에 전쟁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2황자 전하가 나타나면 적군이 꽁지를 빼고 도망치더라.
-마물도 2황자 전하를 알아보고 산속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더라.
이런 유의 소문이었다.
국경에만 머물던 소문이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간 것은 그가 열 번의 승전보를 울린, 고작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지금 그의 앞에 선 이들도 그런 소문 탓에 그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리라.
칼리온은 그가 처음 황궁을 떠날 때 받았던 냉소적인 시선들을 기억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2황자를 버리신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귀한 황실의 핏줄을 전쟁터로 보내실 리 없지요! 그것도 국경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1황자 전하께서 황태자 자리에 앉으시는 건 시간문제겠군요.
-그간 황후 폐하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습니까.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지요.
저를 보면서 그리 떠들던 이들 중에는 지금 제 앞에서 나불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내 형님의 심기가 꽤 불편하겠어.’
칼리온은 속으로 냉소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린 듯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소문이 너무 부풀려져 민망할 따름이지.”
“부풀려지다니요! 장성하신 황자 전하의 모습을 반도 담지 못한 소문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고작 병사들이 낸 소문이니 그 수준이 낮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작은 목소리로 끝을 흐리듯 뱉은 말이었지만 칼리온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전장에 나가면 하루도 못 버틸 놈들이 입만 살아서는.’
그 병사들보다도 못한 인간인 주제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능글대는 꼴이 같잖았다.
저들이 그렇게 깔보는 병사들과 4년간 동고동락한 제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 드는 걸 보니 눈치도 알 만했고.
“하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즐기다 가길 바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