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3)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3화(73/218)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사라지자 칼리온의 시선은 연회장의 끝으로 향했다.
“…….”
잠시 누군가를 바라보던 칼리온의 눈빛이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그곳에는 한 레이디에게 춤 신청을 하는 귀족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순진한 얼굴의 청년은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누군가에게 구애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음에 드는 이에게 저리 호감을 표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파티에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칼리온은 그런 저들의 모습을 의연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에리타.’
그 대상이 곤란한 듯 눈매를 살짝 휘며 웃고 있는 에리타 크로바하츠였으니까.
그가 이곳에 오며 가장 만나기를 소망했던 사람이자, 꼭 설명해야 할 게 있는 사람.
칼리온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고픈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그가 에리타와 대화를 나누는 건 다른 이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여야 했다.
지금의 칼리온은 몸을 낮추고 힘을 감춘 상태였고, 그런 상태의 그와 대공녀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내가 다가가면 황후는 분명히 알아챈다.’
그렇게 된다면 에리타는 그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이게 될 테지.
언젠가는 그녀도 알게 될 테지만 칼리온은 그녀가 끝까지 깨끗하고 안전한 곳에만 있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칼리온은 그 스스로가 그 소망에 흠집을 냈음을 이미 알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군.’
칼리온은 속으로 조소했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다가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우연히 마주친 눈길에 계속해서 그 시선을 갈망하게 되었다.
가짜 이름, 가짜 신분.
언젠가는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될 것을 알면서도 잠시의 달콤함을 탐했다.
자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
곱게 휘어진 시선 하나에, 다정한 부름 한 번에 그간 쌓아 온 인내가 종잇장처럼 무너졌는데.
칼리온은 아슬란이 그녀의 곁에 다가서는 것까지 본 후에야, 못이라도 박힌 듯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에리타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자 에일런은 걱정스러워하는 낯을 하면서도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전에도 가끔 보긴 했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에일런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게 제롬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 가려 에리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에일런은 언제 다정했냐는 듯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에일런 님, 이럴 때 보면 정말 무서운 거 아십니까?”
그런 에일런의 변화에 옆에 있던 제롬 사비에르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 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라 혼자 중얼거린 것에 가까웠다.
그걸 아는 에일런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방금처럼 웃으시면 지금보다 인기가 배로 많을 텐데요.”
“필요 없다.”
“에이. 제가 장담하는데 1황자 전하보다도 인기 많으실 겁니다. 솔직히 저는 에일런 님이 더……. 아닙니다.”
말을 잇던 제롬은 서늘한 눈초리에 입을 합 다물었다.
에일런이 고작 이런 말로 무어라 하지 않을 건 알지만 저 붉은 눈동자를 보면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됐다.
‘……저렇게 보시면 살이 떨린다니까.’
제롬 역시 수준급으로 검술을 구사했지만, 제 앞의 인물에게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만약 제가 그와 같은 목적을 가져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리라.
아니, 정확히는 2년 동안 그의 곁에서 그나마 친분을 쌓은 덕이었다.
그 증거로 같은 편에 선 이들조차 크로바하츠 대공과 소대공에게 쉬이 다가오지 못하니 말이다.
‘참…… 대공녀님은 이런 성격을 아실는지.’
조금 전 대공녀에게는 그 누구보다 다정했던 에일런의 모습을 떠올리자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에리타는 몇 년도 더 전에 에일런의 본래 모습을 알아챘지만.
그 후로 에일런과 제롬은 앞으로 있을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개된 공간이니만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간단한 보고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시작 전에 푸른 검을 한 번 두들겼다고 합니다.”
가볍기 짝이 없는 제롬의 표정은 여전했지만 오가는 내용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푸른 검을?”
그의 말을 들은 에일런의 시선이 제롬에게 닿았다.
그에 제롬은 여전히 유들거리는 얼굴을 꾸며 내며 작게 말했다.
“예. 도중에 이물질이 나와 대장간에 맡겼다고 하는데, 시간 되실 때 직접 가 보시는 편이 좋을 듯싶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저 대화가 오늘 칼리온에게 있었던 독살 시도에 대한 것인 줄 알겠는가.
더욱이 말을 이어 가는 두 사람의 표정이 평온했기에 더 그랬다.
“알겠다. 며칠 내로 찾아가도록 하지.”
그렇게 그들이 평온한 모습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에일런의 시선이 한 곳에 박혔다.
그곳에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이 있었다.
“……에리타?”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함과 걱정에서 비롯된 분노가 묻어 있었다.
아까 제가 걸쳐 준 재킷을 어깨에 얹고 걸어가는 에리타의 얼굴이 창백했다.
누가 보아도 좋아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보자 에일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분명 발코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밝았는데.
“제롬, 나중에 얘기하지.”
아직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제롬을 두고 에일런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금세 제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지?”
에일런이 떠나고 혼자 남은 제롬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였다.
***
테인이 떠난 후 십여 분을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여전히 머리는 아프고 생각은 복잡했지만, 다행히도 처음 편지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조금 가셨다.
창백해졌던 볼을 몇 번 두드리자 그나마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표정 관리 하자.’
아버지와 에일런이 본다면 바로 알아챌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표정을 다듬은 나는 발코니 문을 열고 나섰다.
“어머,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문을 열고 나서기가 무섭게 은은하게 깔린 음악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굳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지 않고 벽을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표정을 다듬긴 했지만 당장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런 얼굴로 에일런과 마주한다면 그는 분명히 걱정할 테니까.
‘일단 조금만 쉬고 가야겠다.’
나는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어 까칠해진 뺨을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내 시야 먼 곳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지만, 나는 일부러 그쪽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발코니로 나갔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한 생각 역시 머리를 가득 채웠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칼리온을 볼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당연히 칼리온과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여주인공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편지에 적혔던 내용은 사실이겠지.
유르젠이 엄선한 정보원들의 솜씨는 뛰어났다.
그러니 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던 에일런과 눈이 마주친 건.
“오라버니?”
왜인지 굳은 그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의아한 듯 살짝 높아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일런이 내 앞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아프지 않게 내 양어깨를 잡은 뒤 내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 시선에는 걱정이 담뿍 배어 있었다.
‘……멀리서 봐도 내 표정이 안 좋았나.’
에일런이 다가와 나를 이렇게 볼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에리타, 무슨 일 있었어?”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내 앞에 선 에일런의 표정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에일런의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것을 알아챈 건지 서늘하게 굳어 있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에리타, 나쁜 말이라도 들은 거야?”
그가 다시금 나직하게 물었다.
이번에는 얼굴은 다정했지만 목소리가 음산했다.
나는 에일런의 오해를 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내 표정이 안 좋은 건 그저 내 개인의 문제였으니까.
“저 정말 괜찮아요. 진짜예요!”
한참을 그의 말에 극구 부정하자 에일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것인지 여전히 표정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만약 일찍 나가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거 아녜요. 그냥 제가 더 있고 싶어서 그래요.”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정말 괜찮아요.”
나는 부러 더 밝게 웃으며 괜찮노라 대답했다.
에일런은 괜찮다고 했지만, 황제나 황후가 참여한 연회에서 그들보다 먼저 자리를 떠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땅땅땅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공공연히 알려진 규칙이었다.
“이런 커다란 파티가 처음이라 조금 긴장해서 그랬나 봐요.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니까 더 있을 수 있어요. 네?”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의 에일런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팔을 살살 흔들었다.
물론 에일런의 말처럼 우리 가문이 황실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계획을 생각해서라도 지금은 자리를 지키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이런 일로 황후의 신경을 끌어서 좋을 게 없어. 지금은 최대한 황후의 시선을 피해야 하니까.’
이제는 망가지고 뒤틀려 도저히 원작과 같은 세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세워 둔 계획뿐이었다.
아일라가 언제 사라졌는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해도 시간은 평소처럼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 사실만 아니었다면 나 역시 자리를 떴을 것이다.
“네? 오라버니이-”
한 번 더 그의 팔을 흔들며 말꼬리를 늘리자 그제야 에일런의 표정이 유해졌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다행히 이제 내 얼굴에도 평소처럼 혈색이 도는 모양이었다.
“……알았어. 대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럴게요!”
나는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이 돌아가자고 했으면 나도 이기지 못했을 테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황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장을 떠났고, 그로부터 오 분쯤 뒤 나 역시 때마침 마주친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겉으로는 괜찮다 했지만, 사실은 진이 다 빠졌던 나는 내 뒤를 진득이 응시하는 푸른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