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5화(75/218)
“으음…….”
방 안으로 비쳐 드는 환한 빛에 감긴 눈매 끝이 파르르 떨렸다.
느릿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자 아직 잠에 젖은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직 정신이 반쯤 잠에 잠긴 탓에 멍하게 앉아 있기를 잠시.
부스럭-
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익숙한 솜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침대?”
드디어 깨기 시작한 머리는 그제야 내가 침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제 책상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기운이 쏙 빠질 정도로 울었던 탓에 언제 잠들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내 발로 침대에 올라온 기억은 없었다.
‘자다가 불편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올라왔나?’
음, 그런가 보네.
지금까지도 그런 적이 왕왕 있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한테 물었을 때도 새벽에는 내 방에 들어온 적 없다고 했으니 내가 걸어갔겠지, 뭐.
“생각보다 몸 상태도 괜찮고…….”
한참을 운 것치고는 눈도 뻑뻑하거나 따갑지 않았고,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도 가뿐했다.
“뭐, 어쨌든 다행이네. 오늘은 아버지랑 오라버니도 내가 운 줄 모르시겠지.”
어제 한참을 내리 운 탓인지 지금은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미 일어난 일을 계속 붙잡고 있어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일라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두려움과 부채감을 느꼈지만, 그와 별개로 내게는 이루어 내야 할 견고한 목표가 있었다.
‘우선은 황후가 정말 흑마법사가 맞는지 알아봐야겠어.’
팔 년 전, 아실라 황비를 죽인 게 황후고, 그 과정에서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내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그때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도 알려야겠지.’
그건 나 홀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또한, 만약 그 사실이 확실시된다면 아버지가 황후의 편에 서는 확률이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내 목표의 칠십 프로는 달성하는 셈이다.
하지만 결국 원작의 흐름대로 아버지와 에일런이 황후의 편에 설 가능성 역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이 칼리온을 적대한 이유만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보자.”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보이겠지.
***
그런데 그런 내 계획에 이런 일은 없었단 말이야.
‘이게 무슨 일이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에 내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허리께까지 굽이치는 하늘색 머리카락. 그리고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 덕에 전체적으로 도도해 보이는 예쁜 얼굴.
“저와 친구가 되어 주세요.”
“네?”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바보처럼 되물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내 모습에 그녀는 아주 당찬 어조로 다시 한번 조금 더 정확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저, 바이올렛 사비에르와 친구가 되어 주셨으면 해요, 크로바하츠 대공녀님.”
그러니까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
이 황당한 사건의 시작은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은 일주일간 열리는 연회의 셋째 날이었다.
어제 온종일 푹 쉬었던 나는 황후를 염탐할 기회를 노리러 연회에 참석했고, 지금은 연회장의 이 층에서 아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내 목표였던 황후는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내 기분이 저조한 것은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오라버니는 아버지가 말씀하신 무슨 일이라는 게 뭔지 아시죠.”
“으음…….”
섭섭한 마음에 입가를 삐죽거리며 묻자 에일런은 난처한 듯 대답을 피하며 웃기만 했다.
원래 아버지도 같이 오기로 했었지만, 어젯밤에 갑자기 생긴 ‘무슨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치사해요. 맨날 저만 쏙 빼고 아버지랑 오라버니 둘만 알고.”
나도 그들에게 숨기고 있는 게 아주 많다 보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에리타,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무슨 일인지 알려 주실 거예요?”
다시금 넌지시 묻자 에일런이 또 입을 다물고 곤란한 듯이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시선을 피했다.
“……됐어요. 저도 안 궁금해요. 안 물어볼 거니까 오라버니도 가서 춤추세요.”
처음에는 장난으로 물어봤지만 세 번 연속으로 거절당하니 어쩐지 마음이 꽁해졌다.
어떤 의미로는 보고 싶던 황후도 참석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에일런은 나만 쏙 빼고 둘이서만 비밀을 주고받다니.
‘진짜 괜히 물어봤어. 안 물어봤으면 안 서운했을 텐데.’
나는 난간에 팔을 올리고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외면했다.
내가 생각해도 별거 아니긴 했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원하는 대로 되던가.
‘……오라버니가 연기만 조금 더 잘했어도 내가 몰랐을 거 아냐.’
누가 봐도 나는 알아요 하는 얼굴을 하니까 그렇지.
나는 애꿎은 에일런을 탓하며 속으로 꿍얼댔다.
“에리타…… 화났어?”
옆에서 에일런이 평소보다 두 배로 다정한 목소리를 냈지만 나는 꿋꿋이 1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였다.
“앗, 소대공님! 대공녀님!”
어디선가 한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우리를 불렀다.
“……사비에르 공자?”
아니나 다를까 몸을 돌리자 유들유들한 얼굴을 한 제롬 사비에르가 보였다.
“하하, 이리 기억해 주시니 기쁘네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부름에 그가 눈꼬리를 휘며 씩 웃었다.
이제 고작 두 번째 보는 사이임에도 그의 태도는 친근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례하다거나 예의가 없다는 뜻은 아니고.
옆을 슬쩍 보자 에일런은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인지 고개를 돌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음, 약간 아버지가 페른을 대하는 모습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페른이 깐죽거릴 때면 아버지는 저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하기 귀찮아하는 느낌이랄까.
“소대공님, 그렇게 대놓고 한숨을 쉬시면 아무리 저라도 조금 상처받습니다만.”
표정은 전혀 아닌데요.
에일런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제롬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후후. 그런 차가운 점도 소대공님의 매력입니다. 대공녀님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네? 네, 뭐…….”
갑작스레 내게 튄 질문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소대공님께서 겉은 저리 차가워 보이셔도 속은 그 누구보다 따뜻하다는 사실을요.”
제롬의 모습은 마치 원맨쇼를 하는 거처럼 보였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옆을 힐끗 보자 에일런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아 참, 이게 아니지.”
다행히도 제롬은 금방 정신을 차린 건지 다시 말끔한 얼굴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사실은 대공녀님께 소개해 드리고픈 성격 나쁜 애가 하나…….”
그가 하하 웃으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야!”
빠르게 달려온 물빛 머리칼의 여인이 곧바로 제롬의 발을 콱! 밟았다. 그것도 구두의 뾰족한 뒷부분으로.
“어억!”
그와 동시에 제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괘, 괜찮나요, 사비에르 공자?”
갑자기 눈앞에서 사람의 발이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를 살폈다.
“하하, 괜찮습…….”
“맞을 만해서 맞은 거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제롬의 말을 끊은 건 에일런이었다.
제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오랜만이군, 사비에르 후작 영애.”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에일런을 바라보자 그는 평온한 얼굴로 제롬의 옆에 선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자와는 담을 쌓고 지낸다던 소문에 걸맞지 않게 꽤 부드러운 태도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대공님.”
그런 에일런의 인사에 청아한 목소리의 답이 되돌아왔다.
그제야 나도 제롬에게서 시선을 떼어 물빛 머리칼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렛 사비에르잖아.’
그 얼굴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제 나와 함께 데뷔한 사비에르 후작가의 차녀.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제롬의 발을 짓이겼냐는 듯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잡고 인사했다.
“처음 뵈어요, 대공녀님. 사비에르 후작의 딸, 바이올렛 사비에르라 합니다.”
***
‘그때만 해도 이런 캐릭터인 줄 몰랐는데……!’
그녀의 인사에 나 역시 인사를 건넨 직후, 바이올렛은 내게 친구가 되어 달라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네?
-저와 친구가 되어 주시면 안 될까요?
당황한 듯 눈만 깜빡이는 나와 그런 나를 강렬하게 응시하던 바이올렛.
-와. 내 동생이지만 진짜 또X이네.
그리고 그런 우리 옆에서 낄낄 웃어 대던 제롬과 한숨만 내쉬던 에일런.
나는 그 쪽팔림을 견디다 못해 무작정 바이올렛 사비에르의 팔을 붙잡고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이고.
‘얘는 진짜 나한테 왜 이러지……. 우리 본 적도 없잖아…….’
나는 내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바이올렛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자칫 까칠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녀의 눈매가 기쁜 듯 휘어졌다.
“그, 사비에르 영애?”
“부디 바이올렛이라 불러 주셔요.”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라니까 그러네!
하지만 과장 조금 보태어 초롱초롱하기까지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바이올렛은 정말로 그걸 원하는 모양이었다.
‘왜 하필 눈동자도 연두색이어서…….’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가 연상되는 얼굴에 나는 차마 친하지도 않은데 왜 그래야 하냐고 묻지 못했다.
까칠한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며 내 손에 머리를 비비대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나는 동물에게 유난히 약했고, 그 탓에 동물을 닮은 사람에게도 약했다.
대표적으로 테인과 세이안이 그 좋은 예시지.
“으음, 그, 사비에르 영애는 저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