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6화(76/218)
“하…….”
나는 지친 등을 마차 좌석에 기댔다.
오늘 연회에서는 한 것도 없는데 피로도는 최고를 찍었다.
“춤도 안 추고 이 층에 박혀 있기만 했는데…….”
물론 내가 피곤한 이유는 알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바이올렛을 계속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
아마 본인 딴에는 안 보이게 쫓아다니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보였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애써 시선을 외면하려 노력해 보던 나였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게 더 신경 쓰였다고.’
정말 내가 알아챌 줄 몰랐는지, 성큼성큼 다가서자 바이올렛은 잔뜩 당황한 얼굴을 했었다.
그러고는 그냥 같이 다니자는 내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을 나올 때까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게다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결말이 되어 버렸지.’
헤어질 때까지 사비에르 영애라고 불렀던 탓에 섭섭해하던 바이올렛은 내일 뵈어요, 라는 한마디에 금세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아…….”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더니.
“많이 피곤해?”
다시금 한숨을 내뱉자 내 앞에 앉아 있던 에일런이 낮게 웃으며 물었다.
애초부터 나는 그리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초면인 사람은 조금 가리기도 했다.
사교계에서 하하 호호 하는 거야 어느 정도 괜찮지만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지.
“……오라버니는 알고 있었죠.”
아까 에일런의 반응을 보면 바이올렛이 나를 보면 저렇게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에일런은 눈꼬리를 살짝 내리며 작게 목을 울렸다.
“저 진짜 당황했다구요. 처음 보는데 갑자기 친구가 되어 달라니…….”
나는 지친 어조로 중얼거리며 마차 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나도 사비에르 소후작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거야. 너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그런 내 모습에 에일런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살살 달랬다.
뭐, 비밀까지 운운했으니 알려 주지 않은 것도 이해는 되지만…….
“그렇게까지 적극적일 줄은 예상 못 해서 네가 불편해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 미안해.”
어쩐지 미안함이 가득 담긴 에일런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뭐,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나쁘진 않았어요.”
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하품이 나오려는 입가를 가렸다.
얼른 씻고 침대로 들어가고픈 마음이 가득했다.
내일 가면무도회는 자정 한 시간 전에 시작하니까 열 시까지 자야지.
저택에 도착해서도 계속 꾸벅꾸벅 졸던 나는 재빠른 하녀들의 손놀림 덕에 금방 침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안 오셨나 보네…….’
그게 내가 수마에 빠져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몇 시간 전.
연회를 위해 수많은 마차가 황궁 입구를 통과할 때, 도리어 황궁을 나서려는 이가 있었다.
“전하…… 꼭 오늘 가셔야 합니까?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평소에는 맨날 저한테 가라고 하셨으면서, 꼭 오늘 같은 날에……!”
울상이 된 얼굴로 후드 끄트머리를 놔주지 않는 바론에 칼리온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거 놓지.”
“안 됩니다! 절대 못 놓습니다.”
칼리온이 짜증 서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걱정이 과한 보좌관은 귓등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스승님의 집이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곳인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가는 길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번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도 없고, 거기다 칼에 찔려 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혼자 가시냐고요!”
칼리온의 서늘한 눈빛에 등허리가 쭈뼛 솟는 기분이 들었지만, 바론은 꿋꿋이 제 할 말을 외쳤다.
물론 그도 제 주군이 직접 나서겠다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삼 년 만에 이 빌어먹을 두통의 해답을 찾을 연결 고리가 생겼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소린가?”
그래. 저거.
칼리온은 삼 년 전부터 이유 모를 두통에 시달렸다.
어떨 때는 하루에도 너덧 번도 더 찾아왔고, 어떨 때는 일주일이 넘게 잠잠하기도 했다.
하지만 칼리온이 있던 곳은 전쟁터였다.
몇 초 사이에 생사가 오가는 곳에서 불시에 찾아오는 거센 두통은 그저 위험한 수준을 넘어 목숨과 직결됐다.
지금 칼리온의 몸에 새겨진 상처 중 절반은 그렇게 생긴 것이었다.
“죽으라고 내몬 곳에서 공적을 쌓으니 심사가 뒤틀리셨겠지. 안 그런가?”
칼리온이 조소하며 낮게 읊조렸다.
“전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칼리온을 전쟁터로 내보내도록 황제를 종용한 건 황후를 위시한 1황자파였다.
그 결과 칼리온은 황실 기사단의 비호도 없는 채로 사지에 보내졌고.
그가 전쟁 영웅으로 부상하기 전에는 칼리온을 지지하는 세력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바론, 나는 황후께서 부린 개수작이 뭔지 알아야겠어.”
칼리온이 짓씹듯이 읊조린 말에 바론은 결국 한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황궁을 빠져나온 칼리온은 빠르게 말을 달렸다.
인적이 드문 길만을 이용해 오 분이 조금 넘게 달리자, 거대한 대저택이 보였다.
저택의 뒤로 통하는 작은 입구로 향하자 그를 본 경비병들이 조용히 물러서 문을 열었다.
저들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그들의 입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워워,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선 칼리온은 고삐를 느슨히 당겼다. 그의 애마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차츰 느려지던 말이 아예 멈추어 서자, 그는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 커다란 유리온실이었다.
칼리온이 제 애마의 머리를 쓰다듬자, 커다란 흑마가 푸르릉거리며 발을 굴렀다.
“고생했다, 렉시. 맛있는 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조용히 다가온 시종에게 말을 맡긴 그는 익숙하게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중앙부로 가니 그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내가 제일 늦었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리온 님.”
“그대도 오랜만에 보는군, 페른 경.”
칼리온의 말에 먼저 대답한 건 유들유들한 목소리의 페른 아일리시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와 짧게 인사를 나눈 칼리온이 다른 한 사람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냉소적인 칼리온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였다.
“……웬만하면 하대를 하시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얼른 앉으시지요, 전하.”
칼리온의 인사에 무표정으로 대꾸한 아슬란이 아직 서 있는 그에게 앞에 놓인 의자를 눈짓했다.
“그건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될 터라 지금은 이리하고 싶습니다.”
픽 웃으며 말한 칼리온이 자리에 앉자, 아슬란의 뒤에 서 있던 페른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한 번 찍었다.
세밀한 마력이 온실 전체를 감싸며 퍼져 나갔다.
이제 바깥에서는 이 안을 보아도 아무도 볼 수 없을 것이고,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편히 얘기하시면 됩니다.”
페른이 마법을 펼침과 동시에 세 사람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가 전보다 진지해졌다.
“……스승님, 제 두통과 관련된 연결 고리라는 게 뭡니까.”
칼리온이 먼저 낮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가 조사를 맡긴 사람은 케이든 앰브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연결 고리를 발견한 건 아슬란의 힘이었다.
정확히는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상급 마법사, 페른 아일리시가 알아낸 것이었다.
“페른, 설명하도록.”
“예, 주군.”
아슬란의 말에 페른이 지팡이를 잠시 옆에 놓아두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 정도의 하얀 종이봉투였다.
“그건 내가 보냈던 건가?”
그 안에서 나온 얇은 바늘에 칼리온의 눈이 절로 서늘해졌다.
“예, 맞습니다.”
칼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페른이 손가락 끝에 새하얀 마력을 둘렀다.
“그럼 이쪽을 주목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천천히 반대쪽 손에 든 바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바늘과 손가락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던 찰나였다.
파직-
새하얀 마력과 맞닿은 바늘 주위에서 검은 스파크가 잘게 튀었다.
일 초 정도 튀던 스파크는 금세 사그라들었고, 바늘은 순식간에 부스러졌다.
“……이게 무슨 현상이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칼리온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저 바늘에 평범한 외관과 다른 정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물음에 페른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손가락 끝에 두른 건 순수한 마력을 농축한 겁니다.”
“순수한 마력?”
“예. 제 마력의 삼분의 이를 쏟아부었죠.”
그 말에 칼리온이 미간이 살며시 찡그려졌다.
능글맞은 마법사는 쉬운 듯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최상급 마법사인 페른조차 고작 손가락 끝에 마력을 뭉친 것 하나로 땀을 흘리지 않았나.
“그대 마력의 삼분의 이라면 보통이 아닐 텐데.”
“뭐, 통계적으로 보자면 평균적인 상급 마법사의 마력보다 세 배쯤 많은 양입니다. 최상급 마법사 중에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이 되지 않을 거고요.”
“……그래서 그게 뜻하는 게 뭐지?”
칼리온의 말에 지금껏 서글서글하던 페른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한 단어를 내뱉었다.
“흑마법입니다.”
그런 페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칼리온이 세웠던 가설 중, 가장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건 제 스승인 아슬란조차 해결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