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7화(77/218)
“……흑마법이라니.”
페른이 내린 결론에 칼리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삼백 년 전에 금지 학문으로 지정된 흑마법.
하마터면 제 머리에 꽂힐 뻔한 그 바늘이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빌어먹을 두통 역시 흑마법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페른 경.”
“예, 칼리온 님.”
“그 방법은 확실한 건가?”
칼리온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페른에게 물었다.
제 앞의 이가 마법에 있어서는 황실 마법사를 능가하는 이임을 알지만, 그가 지금 들은 말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전하의 두통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바늘이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대답하는 페른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확신하는 말투는 단호했다.
그의 두통에 대한 실마리는 아직 찾지 못했으나, 지금 알아낸 사실로도 충분히 큰 진전이었다.
“……제국의 황후가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니. 기가 막히는군요.”
칼리온은 분노와 허탈감이 어린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본래 높은 자리에 앉은 자일수록 탐욕의 속삭임에 넘어가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자 아슬란이 그의 말에 가볍게 동의했다.
페른에게서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전해 들었을 아슬란은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본래 표정 변화가 그리 큰 인물은 아니었으나, 골치 아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께서는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황후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요.”
“그렇습니다.”
칼리온이 그리 묻자 아슬란은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나지막하게 긍정했다.
그 짤막한 대답에 칼리온은 놀란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흑마법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고작 몇 달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상하셨다는 겁니까.”
그리고 만약 진작 예상하고 있었더라면 왜 굳이 제게 일러 주지 않았단 말인가.
칼리온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슬란을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붉은 적안과 마주하며 답을 기다리길 몇 초.
아슬란이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그가 원하던 답을 해 주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아낸 건 제가 아닙니다. 저와 전하보다 먼저 황후가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따로 있지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칼리온은 자세한 이야기를 청했고, 뒤이어 나온 말에 조금 전의 아슬란과 같이 아연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아슬란에게 인사를 남긴 칼리온은 온실을 빠져나왔다.
조용하고 노련한 집사는 그가 나올 시간에 맞추어 커다란 흑마를 데려왔다.
“살펴 가십시오, 황자 전하.”
“고맙군.”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곧장 제 애마에 올라탄 칼리온은 말 허리를 두드렸다.
그러자 눈치 좋은 흑마는 곧바로 아까 전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탓에 큰길에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지만, 칼리온의 표정은 굳은 채였다.
“……빌어먹을.”
그다지 좋지 않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욕설이 나직했다.
부러 헤매듯이 몇 번 골목을 누빈 그가 황궁 정문이 보이는 곳을 지나칠 때였다.
“……!”
그가 급하게 고삐를 잡아 세우자, 빠르게 달리던 말이 순식간에 속도를 줄였다.
“렉시, 잠깐.”
무슨 일이냐는 듯 푸르릉거리는 애마를 다독인 칼리온은 진득한 눈빛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이제 돌아가나 보군.”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꽤 멀게 보이는 황궁의 정문. 정확히는 지금 빠져나오는 마차의 문양이었다.
덩굴에 감싸인 두 자루의 검이 새겨진 마차.
그가 방금까지 있었던 크로바하츠 대공가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배려하듯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는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뒤로 가려졌다.
조금 전 제가 스승으로 여기는 대공에게서 들은 말이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흑마법에 대해 페른 경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도대체 누굽니까.
-……칼리온.
참으로 오랜만에 들었던 스승의 하대였다.
-예, 스승님.
-만약 그 아이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와 한 맹세를 저버리고 내 복수조차 기꺼이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 아슬란이 가라앉은 얼굴로 내뱉은 말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 아이라면.
아슬란이 내뱉은 맹세를 저버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가 다정히 그 아이라 칭하는 사람.
그런 이는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에리타 크로바하츠. ……내 딸이다.
제 스승이 고민 끝에 내놓은 이름은 그 순간 칼리온이 떠올렸던 이였다.
칼리온은 시야에서 마차가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 동안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에리타.”
상대에게 닿지 못할 그의 부름은, 밝은 밤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
다른 연회와 달리 늦은 밤에 시작되는 가면무도회의 특성상, 나는 열두 시까지 깊이 잘 수 있었다.
“얼음 가져와!”
너무 푹 잔 탓인지 눈이 부어 하녀들이 기겁했던 건 아주 작은 해프닝이었다.
“아가씨, 머리는 이 정도면 될까요?”
나는 마릴린의 부름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유심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음, 좋아, 이 정도면 괜찮네.’
긴 머리를 늘어뜨렸던 지난 두 번의 연회와 달리, 오늘은 느슨하게 묶어 위로 틀어 올린 채였다.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아티팩트를 착용하긴 할 거지만, 자정이 되면 전부 해제해야 하니 묶는 편이 더 좋겠지.
“고마워, 마릴린.”
“별말씀을요. 아티팩트는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작은 걸로 사 왔어요.”
마지막으로 머리 모양을 한번 만져 준 마릴린이 작은 브로치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받아 든 브로치를 연분홍을 띠는 드레스 위에 착용했다.
“응, 고마워. 색은 너도 모르고?”
“네.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더라구요.”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마법이 새겨진 브로치에는 자그만 호박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건 황가의 상징인 금색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 브로치는 황실 마법사의 마력에만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 사사로이 발동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확실히 황궁에서 주최하는 가면무도회는 수준이 남다르네요. 염색 아티팩트가 필수라니…….”
“그러니까. 소설보다 더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던 메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자, 마릴린이 맞장구쳤다.
‘음, 그건 나도 놀랐지.’
나는 하하 웃으며 속으로 둘의 말에 동의했다.
황후한테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하기 전에 진작 연회에 대해서나 알아볼걸.
‘그랬으면 진작 해결됐을 텐데.’
삼 년에서 오 년 사이에 한 번, 일주일간 진행되는 데뷔탕트 연회.
가면무도회는 그런 일주일의 중간에 열렸다.
그때는 황제와 황후가 모두 연회에 참여했고, 남작 이하의 귀족들과 준귀족은 참석할 수 없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적당히 화려한 나비 가면을 집어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가면무도회가 황제 찾기 놀이인 줄 알았겠냐고. 물론 내가 좀 흘려듣긴 했지만.’
황궁에서 주최하는 가면무도회에서는 머리색을 바꾸는 아티팩트를 필수로 착용해야 했다.
그 이유는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몇백 년 전에 유흥을 좋아하던 황제가 황명으로 정해 둔 법이라던가.
“아가씨.”
내가 한창 조금 후 있을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메리가 나를 불렀다.
“응?”
“그런데 파티 도중에 황제 폐하를 찾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 맞아요. 제가 봤던 소설에서도 귀족들이 일부러 모른 척하던데.”
내가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해 되물으려고 할 때, 로맨스 소설의 애독자인 마릴린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메리가 궁금해하는 건, 내가 참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거라면 일부러 안 찾는 거 맞대. 그냥 열한 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진짜 가면무도회처럼 즐기고, 자정이 되면 동시에 아티팩트가 해제된다나 봐.”
그리고 그때 귀족들 사이에 섞여 있던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다나 뭐라나.
머리색을 바꾸고 하는 건 보여 주기식이나 다름없었다.
하여튼 나로서는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가 황후에게 접근하기 좋은 기회인 건 틀림없었다.
가장 큰 고민이던 내 검은 머리칼이 해결되었으니까.
그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치를 슬쩍 보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아가씨, 정말 혼자 다녀도 괜찮으시겠어요? 주인님이랑 도련님께서 엄청, 음…… 걱정하시는 것 같던걸요.”
파티에 대해 얘기하다가 내가 혼자 다닐 거라는 소리가 갑자기 왜 나오지.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메리.”
“아, 아뇨. 그냥 가면무도회에서 혼자 다니실 거라고 하셨으니까…….”
내가 의아해하는 말투로 되묻자 메리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중간에 조금 더듬은 것과 잠시 내 눈치를 보던 걸 보니…….
“……메리,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어?”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가느스름해진 눈으로 바라보며 묻자 메리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늘 파티에서는 자정이 되기 전까지 혼자 다닐 거라고 했더니, 그게 불만스러운 아버지가 메리에게 조용히 눈치를 줬음이 틀림없다.
“그런 게 아니긴. 안 봐도 뻔한데, 뭘. 아버지도 정말! 자꾸 메리한테 부담 주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 출발하기까지는 시간도 남았겠다, 아버지한테 가 볼 요량이었다.
“아, 아가씨! 어디 가시려구요?”
메리가 그런 나를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울상이 된 메리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으나, 나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걱정하지 마, 메리. 내가 가서 제대로 얘기하고 올 테니까. 나만 믿고 기다려!”
“아가씨이!”
그렇게 외치며 방을 나서자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올게!”
물론 나는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