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8)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8화(78/218)
“레이디, 춤을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반가면을 쓴 남성이 손을 내밀자, 화려한 깃털 가면을 쓴 여인이 그 위로 제 손을 얹었다.
보통의 연회에서는 춤 신청을 하기에 앞서 본인의 소개를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다른 곳에서는 늑대 형상의 가면을 쓴 남성이 여우 가면을 쓴 여인에게 춤을 청했다.
“친절한 신사분, 정말 즐거웠어요.”
“저야말로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레이디.”
그러한 장면이 넓은 연회장 곳곳에서 펼쳐졌다.
가면무도회의 정의는 신분과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즐기는 파티다.
게다가 지금 열리는 파티에서는 머리색을 바꾸는 아티팩트까지 착용했기에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이따위 쓸모없는 짓은 왜 하는 건지.”
하지만 그런 즐거운 연회장에서도 못마땅해하는 이는 존재했다.
-아버지, 저 오늘은 혼자 다닐 거예요. 만약에 뒤에서 저 지켜보고 계시거나 그러면 진짜 화낼 거라구요!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예요!
대표적으로 달아오른 분위기에 섞이지 않고 싸늘한 얼굴로 연회장 이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둘이 그랬다.
본래의 머리칼이 아닌 푸른 머리칼을 한 그들은 아래에서 뽈뽈대며 돌아다니는 나비 가면의 여인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저놈이.”
한 남자가 그런 나비 가면의 여인에게 다가서려 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가면 밖으로도 보일 만큼 험악해졌다.
누군가 본다면 남자가 아주 몹쓸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흉흉한 모습이었다.
“대공 전하, 에일런?”
그런 그들의 곁으로 검은 머리칼을 단정히 늘어뜨린 남자가 다가왔다.
그러자 살벌했던 두 사람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세이안?”
먼저 그를 알아본 아슬란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답하자 세이안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는데, 역시 아슬란 님이 맞으셨군요. 에일런 너도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외숙.”
무뚝뚝한 에일런의 대답에도 세이안은 개의치 않고 눈매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갑지 못한 조카여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이안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물론 기쁜 건 맞지만, 지금은 긴장으로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세이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바뀐 머리색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는 검은색이 될 줄은 몰랐어서…….”
“어찌 된 게 머리색이 변해도 유약한 인상은 그대로구나.”
“하하, 그야 제 얼굴이 변한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검게 변한 머리가 낯선 듯 작게 하하 웃는 모습은 어딘가 뻣뻣한 구석이 있었다.
세이안은 오늘 제가 고른 가면이 입술만 내놓고 얼굴을 전부 가리는 것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리타, 도대체 뭘 하려는 거니.’
조금 전 저를 찾아온 사랑스러운 조카가 시간을 끌어 달라 했으니 최대한 두 사람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오 분이면 돼요! 부탁할게요, 외숙부!
게다가 처음으로 에리타가 불러 준 외숙부라는 호칭에 세이안은 거절이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
나는 슬쩍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음, 세이안이 잘해 주고 있네.’
그곳에서는 푸른 머리칼을 한 아버지와 에일런, 그리고 검은 머리칼의 세이안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앞에 가족을 두고도 시선을 돌릴 수는 없는지 둘은 세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틈에 얼른 황후 쪽으로 가야겠다.’
아버지와 에일런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진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확인해 두었던 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붉은 드레스 차림의 황후와 세 명의 귀부인들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후 폐하, 이리 성대한 무도회를 준비하느라 밤낮으로 애쓰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쩐지 오늘따라 연회가 더욱 활기차 보인다 했네요!”
부채를 살랑이는 황후를 중간에 두고 그들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아첨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생각보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적어.’
자정이 되어 아티팩트의 효과가 사라지면 황후는 본래 황족이 앉는 자리로 간다.
‘그렇게 되면 접근할 수가 없으니까 기회는 지금뿐인데.’
연회장 벽에 달려 있는 시계를 보니 자정까지는 이십 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삼 분쯤 더 기회를 살피고 있었을까.
‘저 사람들은…….’
한 무리의 여자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 눈을 좁히고 그들을 빤히 바라보자, 가장 앞에 선 여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밀라이아 레노센? 그 옆에는 블레인 공작 영애잖아.’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귀족 레이디들은 전부 열댓 명쯤 되어 보였다.
아마도 밀라이아 레노센이 제 고모인 황후를 보러 가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다.’
그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쯤,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존재감이 옅어지는 마법을 걸고 밀라이아 레노센 무리의 마지막쯤에 따라붙었다.
마력 소모가 큰 마법이었다면 황실 마법사가 눈치를 챌 수도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제발 몰라라, 제발.’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주의를 기울여서 보는 게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길 터.
다행스럽게도 주위에 있는 이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무사히 그들에게 합류해 몇 걸음을 더 걸었을까.
“고모님!”
가장 앞에 서서 가던 밀라이아 레노센이 높은 목소리로 황후를 부르며 뛰어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어서 오렴, 밀라이아.”
황후는 그런 밀라이아 레노센을 어여뻐하는 얼굴로 맞았다.
“고모님,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러니? 그보다 뒤에 있는 영애들은 전부 우리 밀라이아의 친구들인가요?”
밀라이아 레노센을 보며 다정히 입꼬리를 올렸던 황후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차례로 일행을 훑던 황후의 시선이 내 쪽으로 닿을 때쯤이었다.
“아!”
밀라이아 레노센의 작은 외침에 황후의 시선이 금세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은 잔뜩 신이 나 조잘대는 밀라이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후의 시선이 돌아간 틈을 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한 발, 두 발.
황후와 내 사이에 세 명이 남았을 때.
나는 한 손가락을 드레스 자락에 감추어 황후를 향해 뻗었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에 꾹 쥐고 있던 아티팩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오 분 같은 오 초가 지나고.
‘됐다……!’
마법이 성공할 때 드는 특유의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내가 만든 아티팩트가 결과를 저장하는 시간은 십 분.
‘정원으로 가야겠어.’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금 무리의 가장 끝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내 존재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데뷔탕트 연회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은 황실 정원을 개방해 둔다.
그런 정원 중에서도 미로 정원에 발을 들인 나는 최대한 정원 깊숙이 들어갔다.
“하아, 하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입구에서 이 분쯤 빠르게 걸어온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후우.”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손에 쥐고 있던 아티팩트를 들어 올렸다.
나는 말라 오는 입술을 한 번 적신 후, 조심스레 회중시계를 뒤집었다.
그러자 드러난 시계의 앞면. 그리고 보인 시계 중앙의 보석.
“……망할.”
그 모습을 본 나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에 눈을 꾹 감고 말았다.
본래 하얗게 빛나야 할 다이아몬드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도 한 점의 하얀색도 없는, 그저 칠흑 같은 까만색으로.
‘……그렇게 아니기를 바랐는데.’
이로써 황후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그 말의 뜻은 아실라 황비를 죽인 이가 황후라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수많은 아이의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무거운 진실에 그저 옅은 숨을 내쉬며 주먹을 꾹 쥘 수밖에 없었다.
***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칼리온이 에리타를 알아본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리타?’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제 옆을 스쳐 지나간 에리타의 머리칼은 옅은 밀짚색이었다.
그리고 그건 리안으로서 그녀를 만날 때 보았던 에리타의 모습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모르겠으나 칼리온에게 그 모습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저긴…….’
칼리온을 스쳐 지나간 에리타가 급하게 향한 곳은 정원으로 통하는 테라스였다.
분명히 방금 에리타는 초조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걱정과 지금이 그 스스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양립했다.
어쨌거나 두 생각 모두 그녀의 뒤를 따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바론,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뒤를 부탁하지.”
“예, 그러시지……. 예? 아니, 잠깐만……!”
멍하게 있던 바론이 제 상사의 말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그의 옆이 비워진 채였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바론의 소리 없는 절규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테라스로 나선 칼리온은 정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늦은 탓인지 에리타의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했나 보군.’
그가 아는 그녀는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였고, 그런 그녀에게 황궁에서 들키지 않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방금 연회장에서 그리 급하게 나갔는데도 아무도 그녀를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으니.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칼리온은 이내 한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긴가.”
그곳은 방금 에리타가 들어갔던 미로 정원이었다.
저벅저벅-
봄이 다가와 촉촉한 잔디가 그의 발소리를 고요히 머금었다.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척을 따라 빠르게 다리를 뻗었다.
그렇게 일 분쯤 걸어 깊숙한 미로의 중심부로 접어들었을까.
‘……에리타.’
칼리온의 시야에 한 여인의 뒷모습이 들어와 박혔다.
곧게 뻗은 하얀 목과 하얀 어깨 위로 몇 가닥 늘어진 베이지색 머리칼.
그 사람은 며칠 전부터 그가 계속해서 떠올리고 되뇌던 이였다.
칼리온은 우두커니 서 있는 에리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작정 그녀의 뒤를 따라나서긴 했으나, 사실은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그의 머릿속에서도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잠시 망설이던 칼리온이 에리타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