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79화(79/218)
다행스럽게도 내가 어두운 상념에 잠겨 있던 건 찰나에 불과했다.
만약 내가 세웠던 가설이 들어맞을 경우,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알리기로 결정했었으니까.
‘이래저래 복잡하긴 한데, 차라리 이렇게 밝혀지니까 마음은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
그전까지는 설마 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면, 오히려 지금은 더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는 확실한 사실을 기반으로 계획을 세워 나가면 되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공간을 열어 회중시계를 넣었다.
확인하고자 했던 것을 얻었으니 아티팩트는 안전하게 보관하는 편이 좋겠지.
‘……근데 아버지랑 오라버니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팔 년 전부터 흑마법에 대해 조사했다고 말하면 두 사람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현실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사실을 밝힐 방법이 문제였다.
‘다짜고짜 황후가 흑마법사예요, 이러면 내가 생각해도 못 믿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아버지랑 에일런은 그냥 믿어 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째 수도에 온 뒤로는 평온한 날이 길게 가지 않는 것 같았다.
며칠에 한 번꼴로 고민할 게 생기니까.
‘황후 문제에다가 아공간에 넣어 놓은 칼리온의 고리도 그렇고. ……며칠 전에는 유르젠이랑도 냉전 비슷하게 되어 버렸지.’
유르젠의 말을 듣고 펑펑 운 뒤로 우리는 서로 아무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하지 못했고, 유르젠이 왜 연락하지 않는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유르젠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나는 진실을 말해 줄 수 없는데.’
하지만 그 말이 그에게 딱히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아…….”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라고 하던데, 지금이 딱 그랬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힘든 게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란 말이야.’
어쩐지 무력한 기분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부스럭-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순간 철렁한 마음에 재빨리 뒤를 돌자,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새까만 제복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아마도 소음을 냈던 주인공은 그의 구둣발 아래에 놓인 두 동강 난 나뭇가지겠지.
하지만 그보다도 내 시선을 붙잡은 건 다른 것이었다.
깔끔하게 넘겨진 갈색 머리칼과 가면 안으로도 선명히 보이는 깨끗한 벽안.
내가 모를 수가 없는 이였다.
‘……칼리온.’
내 고민 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였으니까.
마치 리안으로 나와 만났을 때처럼 단정한 갈색 머리칼을 한 칼리온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가슴께에 달린 브로치의 영향일 테지만, 왜 하필 갈색으로 바뀌었을까.
“…….”
“…….”
그와 나 사이에서 짧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내가 그를 알아봤으니 그 역시 나를 알아봤을 터였다.
‘어떡하지.’
이대로 아무도 보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피하고, 도망갈까.
오늘은 가면무도회니 그가 황자임을 모르는 척, 그래서 인사를 하지 않은 척 넘겨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면 될까.
내가 두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잠시만.”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들려온 칼리온의 목소리에 고민하던 선택지가 흐려졌다.
그런 나를 곧게 응시하던 칼리온이 느릿하게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어쩌면 그저 내가 느리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내 의문은 곧 이어진 그의 행동에 풀렸다.
툭-
손을 들어 올린 칼리온이 제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댕- 댕- 댕-
익숙한 그의 얼굴 전부가 드러남과 동시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연회장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왔다.
따뜻한 갈색의 머리칼이 찬란한 은색으로 변한 것도 그때였다.
아마 내 머리카락도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갔을 테지.
나는 천천히 칼리온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자 전하.”
그 모습을 보았기에, 이제는 내가 떠올렸던 선택지 중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다.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딘가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칼리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나직하게 내게 허락을 구했다.
“그대에게 다가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칼리온의 속삭임은 간절하게까지 들렸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그게 긍정을 나타내는 의미임을 알았다.
저벅저벅-
천천히 걸음을 옮긴 칼리온이 나와 세 걸음쯤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나는 가까워진 칼리온의 시선을 곧게 마주치지 않았다.
막상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꼭 그대가 들어 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닥을 바라보다시피 한 내 머리 위로 칼리온의 애원이 떨어졌다.
‘내가 들었으면 하는 말.’
아마도 칼리온의 정체를 알아차린 날,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때 했을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잘게 흔들리는 눈을 들어 칼리온의 턱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변명이라 여겨도 좋고, 그저 흘려들어도 됩니다. ……하지만 제발 거짓이라 여기지는 말아 주십시오.”
지금 그가 어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모양새 좋은 그의 입술은 짓씹은 듯 핏기가 몰려 있었다.
말을 마치고 단단하게 다물린 턱이 그 역시 나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들을게요.”
“…….”
나는 조금 더 시선을 올려 그의 푸른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내 마음 한구석에서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거짓이라 여기지 않고 들을게요, 전하.”
그렇게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고, 내 말에 안도의 빛이 서리는 벽안이 여전히 다정함을 보았다.
“……고맙습니다.”
결국 나는 제국의 황자인 칼리온 루인 엘베르가, 내가 알던 리안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칼리온과 나는 마치 아주 오래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커다란 덤불 앞에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오래 나와 있으면 아버지와 에일런이 나를 찾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앉겠냐는 칼리온의 말을 거절치 못했다.
“……춥지 않습니까.”
“아뇨,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저보다는 전하께서 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나는 말끝을 흐렸다.
추우려면 걸치고 있던 제복 재킷을 내가 앉을 곳 아래에 깔아 준 덕에 셔츠에 조끼 차림인 그가 더 춥겠지.
“그대가 춥지 않으면 됐습니다. 최대한 짧게 말하겠지만 일이 분 안에 끝날 이야기는 아니라서.”
내가 말끝을 흐리며 그를 바라보자 칼리온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칼리온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났던 건 팔 년 전입니다. 선황비인 내 어머니의 장례식이었죠.”
나 역시 그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니까.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날 나는 스스로가 무력하고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
“내 어머니의 죽음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걸 알았고, 또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알았는데…… 그랬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는 동정도, 섣부른 위로도 꺼낼 수 없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날에도 칼리온이 황비의 죽음의 전말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황비의 관 앞에서 주먹을 쥐어 가며 눈물을 참는 것 같던 그의 모습이, 그저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 생각했다.
“황자 전하…….”
고개를 들어 올려 마주한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제는 오래 지난 이야기라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슬퍼 마세요.”
오히려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는 칼리온이 정말로 괜찮아 보여서.
그래서 나는 더 슬퍼지고 말았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괜찮지 않으면서도 항상 괜찮다고 해. 세상에는 아프다고,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언니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알아?
언젠가 고아원에서 함께 지내던 다섯 살 아이가 내게 물었던 말이다.
나는 그런 아이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 물음을 들은 칼리온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괜찮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게 슬퍼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고, 나는 필사적으로 괜찮아져야 했습니다.”
“…….”
“그러다 보니 나는 괜찮다고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내려 막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을 쓰다듬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를 안아 주고픈 마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나는 황궁에서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대도 알겠지만 황후께서는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시니까요.”
나는 조용히 칼리온의 말에 집중했다.
“황후는 내가 열두 살 때 나를 전쟁터로 보내 버리려 했습니다.”
황후가 어린아이의 태를 다 벗지 못한 이 황자를 전쟁터로 보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황비를 죽인 걸로도 모자라서 칼리온까지 죽이려고 했었지.’
본래 황후가 목표했던 바는 열다섯이 아닌 열두 살의 이 황자였다는 사실은 고위 귀족들만이 알았고.
“그때 황후를 막아 준 게 그대의 아버지입니다.”
“……네?”
하지만 이건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