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81화(81/218)
서둘러 돌아온 연회장은 아까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여전했지만, 자유롭던 분위기가 사라졌다고나 할까.
“설리번 부인, 새로운 모임이 너무 기대되네요.”
“호호, 브리튼 부인께서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너무 기쁠 거예요.”
서로의 정체를 유추하지 않던 아까와는 달리 곳곳에서 가면을 벗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 보였다.
아티팩트의 효과가 사라지자 평소와 같은 연회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에일런을 찾아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단상 위를 힐끗 바라보았다.
단상 중앙에는 어딘가 굳은 얼굴의 황제가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창백하게 보이기도 했다.
‘……황제는 인자한 성군의 이미지를 고집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황제와 아버지에게 들은 황제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뭐,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지 않거나 몸이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어, 저기 계시네.”
황제에게서 시선을 돌린 내가 위층에서 아버지와 에일런의 검은 머리칼을 발견했을 때였다.
연회장에 흐르던 음악이 전부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으로 향했다.
“다들 연회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기가 좋군.”
흘러나온 황제의 목소리는 증폭 마법을 쓴 건지 연회장 곳곳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까 황제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인 듯, 황제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제국의 영광이…….”
지도자의 자리에 앉은 이라면 모두 그러듯, 황제가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오랜 서론이 존재했다.
속된 말로 쓸데없는 소리가 많다는 뜻이었다.
‘뭐, 지금은 다행이지.’
나는 그사이 저택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아무에게도 부딪히지 않고 재빠르게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아래를 힐끗 보자 태연한 얼굴로 황제의 뒤쪽에 앉아 있는 칼리온이 보였다.
그도 황제가 일어나기 직전에 연회장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며 황제가 잘 보이는 방향에 있는 내 가족에게로 향했다.
“……아버지, 오라버니.”
“에리타.”
조심스레 다가가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쏙 내밀자 아버지와 에일런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슬쩍 옆으로 비켜서 내 자리를 내주었다.
“밑에서 무슨 일은 없었고?”
“음……. 네.”
일단은요. 뒷말은 우선 속으로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칼리온을 만나고 왔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그래, 알겠다, 라는 말을 하고는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늦었다고 한두 마디는 할 줄 알았는데.’
일단은 다행인 일이었으나 솔직하게 말해서 평소의 아버지와 에일런답지는 않았다.
‘아니면 칼리온이랑 만났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건가?’
어쩐지 아버지와 에일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감이 그랬다.
“에리타, 왜 그래?”
수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에일런이 내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곤 다정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얼른 집에 가고 싶어서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차분해진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오늘 칼리온을 만났다고 털어놓으면 되겠지.’
칼리온이 말하기를 두 사람도 조만간 내게 말할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오늘 파티를 마치고 집에 가면 늦은 시간일 테니 자세한 얘기를 나누는 건 내일이 되겠지.
‘아, 이미 자정이 지났으니까 오늘 오후인가.’
잡다한 생각을 하며 난간에 기대어 황제의 말을 듣고 있을 무렵이었다.
“다들 듣게.”
길었던 서론을 끝낸 황제가 엄숙한 목소리를 냈다.
나 역시 조금 늘어뜨렸던 자세를 바로 했다.
황제의 동향은 나 역시 주시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진중한 눈빛으로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은 차기 황제를 정하는 데 있어서 두 황자를 똑같은 출발선에 세울 것이네.”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연회장 안에는 없었다.
***
“……두 황자 중 황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이를 황태자로 삼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게.”
황제의 폭탄 발언이 끝난 후, 쉬이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분노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황후와 테시스,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가린 칼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팔걸이에 걸친 팔에 턱을 괸 칼리온은 예상과 똑같이 흘러가는 상황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레노센을 경계하는 황제가 순순히 테시스를 황태자 자리에 앉힐 리가.’
당장 테시스를 황태자로 임명하게 되면 레노센의 권위는 금세 황제에게 도전할 터였다.
‘그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칼리온을 생각해 지금 이런 해결책을 내놓은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와 테시스가 서로 경계하며 힘을 빼게 만드는 게 목적이겠지.
칼리온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분노한 얼굴의 레노센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레노센 공작이 제 곁에 있던 귀족들에게 고갯짓했다.
바로 그 직후였다.
“폐하! 지금 하신 말씀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초대 황제께서는 장자를 황태자로 세우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디 현명하신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귀족들 사이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1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자 레노센의 가신들이었다.
한 명이 입을 열자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말이 터져 나왔다.
칼리온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공작은 그리 겪고도 황제를 잘 모르는군.’
그의 아비이자 제국의 현 황제는 인자한 낯을 한 탐욕가였다.
그런 황제가 공식 석상에서도 본성을 드러내는 상황이 딱 하나 있었다.
“황태자를 임명하는 것은 황제의 권한이네. 그대들이 감히 그것을 침범하려 하는가?!”
황제가 형형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오나 폐하……!”
“그만!”
포기하지 못한 귀족 하나가 입을 열었지만, 분이 묻은 황제의 눈빛이 그에게로 향하자 그는 금세 고개를 조아렸다.
기실, 따지자면 현 황제는 특출난 재능이나 타고난 카리스마로 귀족들을 휘어잡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제의 권력이 귀족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강한 군사력 덕분이었다.
정확하게는 황권이 강했던 선황제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지만.’
선황제. 즉 칼리온의 조부는 젊을 적 전쟁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힌 강한 군주였다.
당연하게도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황권은 모든 귀족을 압도했고, 현 황제는 그 모습을 직접 보며 자랐다.
‘그런데 조부의 업적을 자신이 이룬 양 과거에 취한 꼴이라니.’
선황제가 키워 둔 황실 기사단이 아니었다면 누리지 못할 권력이었다.
물론 황제의 그 어리석음은 칼리온에게 호재로 돌아왔다.
칼리온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황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 일에 관해 반론은 받지 않을 것이니 다들 잘 알아들었길 바라네.”
중후한 목소리로 그 말을 남긴 황제는 뒤에 시종장과 시종들을 매단 채로 연회장을 나섰다.
쿵-
육중한 문 너머로 황제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제국의 장자 상속 법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시지만 초대 황제께서 정하신 법을 이리 무시하시다니요!”
연회장에는 더 이상 우아한 음악이 흐르지 않았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황제가 연회장을 떠난 후, 나는 소란스러운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원래 보통 이런 건 건국 기념일에 발표하는 거 아닌가.
‘원작에서는 테시스가 황태자가 됐었는데.’
인제 와서는 별 소용이 없는 원작일지 몰라도, 여전히 이런 틀이 바뀔 때면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 가문이 칼리온이랑 한편이라서 다행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사실이 내게 가장 큰 위로였다.
내일 두 사람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긴 해야겠지만 내 가장 큰 목표가 벌써 반쯤 이뤄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근데 아버지랑 오라버니는 황태자와 관련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옆을 힐끗 보자 아버지와 에일런의 얼굴에는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해 보인다면 모를까. 두 사람은 황제의 말에 단 한 톨의 흥미도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시선을 칼리온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방금 했던 생각을 굳혔다.
황후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평소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 옆에 앉은 테시스 역시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였고.
하지만 칼리온의 얼굴은 평온했다.
‘칼리온을 지지하는 세력은 전부 알고 있었나 보네.’
그저 표정 관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까 보았던 그의 여유로운 태도를 생각하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에리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생각을 멈춘 건 아버지의 부름이었다.
“네?”
“더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느냐?”
아버지의 나직한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긴 했으나 지금 떠올려 보아도 딱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은 칼리온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머리가 복잡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너도 피곤해 보이니.”
“음, 그게 좋겠네요.”
그래서 나는 그만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동의했다.
연회장 문을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뒤로 돌아 칼리온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폭탄선언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게 있어서 더 놀라웠던 건 칼리온의 말이었다.
‘……곧 다시 만나자고 했으니까 그때 얘기하면 되겠지.’
지금은 그와의 오해를 어느 정도 풀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를 경계하고 피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칼리온과 시선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모습은 금세 가려졌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아. 바이올렛한테 오늘 보자고 했었는데.’
그 사실을 떠올린 건 이미 마차에 올라탄 후였다.
‘……별일이야 있겠어? 귀족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인사치레 같은 거였으니까.’
그런 내 인사치레를 바이올렛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