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85화(85/218)
그렇게 한 부분의 과거 이야기가 끝났다.
십육 년의 시간 중 내가 가족들과 만나기 전의 칠 년에 대한 이야기였다.
“…….”
하늘의 정점에서 빛나던 태양이 어느덧 세 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에일런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과거가 이래.’
나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연다면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십육 년 전의 사고부터 구 년 전 내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 그때까지의 이야기.
‘이런 과거를 줘 놓고도 고작 소모용 악역이었다니.’
눈앞에 원작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가 이곳에서 눈을 뜨기도 전의 과거였지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돌에 짓눌린 듯 저렸다.
이건 에리타의 감정일까, 아니면 내 감정일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꾸만 속이 상해 와 나는 옅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의 숨을 더 뱉어 내자 차분함이 돌아왔다.
‘……세르비아가 죽은 게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구나.’
그저 마차 추락 사고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계획된 범죄였다니.
다른 것도 아닌 저주와 연관된.
나는 왜 아버지가 칼리온의 도움 요청을 거절치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말할 차례라는 것도.
나는 주먹을 꾹 쥐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이 황자 전하와 손을 잡으신 이유.”
조금 떨리는 목소리.
십육 년 전 세르비아와 에리타에게 있었던 사고, 그리고 팔 년 전 있었던 아실라 황비의 죽음.
“……어머니와 선황비 전하를 죽음으로 몬 배후가 같아서였군요.”
그 두 사건을 주도한 세력이 같았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퍼즐이 들어맞았다.
‘세르비아에게서 나타났던 저주의 흔적도 황후의 짓이야. 아니면 적어도 황후와 관련이 있다.’
여전히 의문은 발에 챌 만큼 많았다.
황후는 어째서 세르비아를 죽였는가. 그리고 왜 에리타는 죽이지 않았을까.
원작의 내 가족은 그 사실을 알았나? 그렇다면 어째서 황후의 편에 섰던 거지.
무언가 거스를 수 없는 협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내가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죽게 두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의문을 제쳐 두고 오로지 그 사실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복잡한 생각을 밀어낸 나는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를 곧게 바라보았다.
날카롭게도 보이는 적안이 느릿하게 자취를 감추었다가 드러났다.
“……그래.”
아버지가 나지막이 긍정했다.
그 목소리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짙은 감정이 배어 있었다.
“네가 말한 게 맞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은 분노.
“아버지, 오라버니.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제는 내가 가족들과 발을 나란히 할 차례였다.
아직 칼리온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내와 딸을 잃었던 아버지에게 내가 알아낸 사실을 먼저 말하고 싶었다.
“……제가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오랫동안 숨겨 왔던 게 있어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말을 골라 보았지만 결국 나온 말은 투박한 고백이었다.
구태여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덧대고 싶지 않았다.
“숨겼던 것.”
에일런이 내 고백을 조용히 되읊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언젠가 확실해지면 밝히려고 했었는데, 그때가 지금인 것 같아서요.”
팔 년간 흑마법을 조사해 왔다는 사실과 내가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알아낸 사실.
내가 어떻게 흑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와 왜 조사를 시작했는지는 말할 수 없었다.
‘황비의 장례식에서 원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봤다는 걸 어떻게 말하겠어.’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그건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비밀과 연관되어 있으니.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걸 전부 믿어 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어쩐지 긴장이 되어 손가락을 꾹 맞잡으며 물었다.
“이 아비는 언제든 너를 믿는다.”
“오늘 비가 온다고 해도 믿어.”
에일런의 말에 나는 창밖을 흘끗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정말이야.”
에일런이 다시금 살풋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답에 어쩐지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오라버니도 참.”
에일런이 나를 위해 일부러 가벼운 말을 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흠흠. 어쨌든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괜스레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나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저는 지난 몇 년간 흑마법에 대해서 조사해 왔어요.”
정확히는 팔 년 동안이지만.
“물론 제가 흑마법에 손대려고 알아본 건 아니에요!”
혹시나 잠시라도 오해할까 싶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네가 흑마법에 손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게 답하는 아버지의 말투가 다정했다.
단호히 나를 믿는다는 말은 분명히 기쁜 것이었다.
그런데…….
“……안다구요?”
나는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질문에 아버지의 몸이 부자연스럽게 굳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도 아니고 손대지 않았다는 걸 알아……?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알고 계셨어요?”
“하…….”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묻자 옆에 있던 에일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에일런의 한숨에 아버지는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가.”
망설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아버지와 에일런은 내가 흑마법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예요?”
어안이 벙벙해 나도 모르게 그런 물음이 튀어나왔다.
“…….”
“…….”
아버지와 에일런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궁금한 건 그거였다.
혹시나 누군가 보게 될까 싶어 여태껏 모은 자료들은 전부 내 아공간에 보관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들을까 싶어 저택에서는 흑마법에 관련해서는 입도 벙긋 안 했는데.
‘게다가 가문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메리한테도 얘기하지 않았…….’
순간 내 머릿속에 파란 머리 마법사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페른 경이?”
지금까지 흑마법에 대해서는 혼자 조사한 게 맞았다.
하지만 팔 년 전 딱 한 번 페른에게 저주 마법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고작 열 살 어린이였고 주위에 물어볼 마법사라고는 페른뿐이었으니까.
‘페른이 아버지한테 얘기한 건가?’
그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내 말에 알겠다고 답하긴 했으나 그는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내가 물어본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아버지, 페른 경에게서 들으셨던 거예요?”
“음, 그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묻자 아버지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나는 우선 수긍했다.
아버지가 페른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내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이해는 했다지만 막상 아버지에게 홀랑 말해 주고는 내게 어떤 언질도 없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나중에 연구나 도와 달라고 해야지. 잡다한 건 다 페른에게 시켜야겠어.’
내가 언젠가 페른을 부려 먹으리라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와 에일런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서로에게 순서를 떠넘기는 걸로 보였다.
결국 이긴 건 고집 센 아버지였다.
“저, 에리타, 혹시 기분이 상했어?”
아버지의 시선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에일런이 드물게 정말로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음…….”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언젠가 말하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어차피 그 조사 자체가 가족들을 위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조금 심통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지금껏 내게 숨기고 있던 칼리온과의 동맹을 꿈에도 몰랐는데 두 사람만 내 비밀을 알고 있었다니.
“솔직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긴 해요.”
“으응, 그렇지.”
“제가 얼마나 열심히 숨겼다구요.”
“미안해.”
조금 부루퉁하게 대꾸하니 에일런의 눈매가 조금 더 아래로 처졌다.
내가 저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숨겨서 미안하구나.”
에일런의 옆에 앉은 아버지도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휴…….”
한숨을 내쉬자 아버지의 시선이 티 나게 움찔거렸다.
세상에 무서운 거 하나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이 저러는 모습을 보니 참 뭐랄까……
‘대형견을 키우는 사람 마음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네.’
순간 떠오른 생각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리타……?”
두 사람은 그런 나를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녜요. 잠시 뭐가 생각나서…….”
나는 떨리려는 어깨를 애써 진정시키고는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 냈다.
“……그렇구나.”
마지못해 긍정하는 얼굴들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샐샐 웃기만 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보니 새까맣고 늘씬한 흑표범이 생각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흠흠. 어쨌든 제가 흑마법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니까 알아낸 사실부터 말씀드릴게요.”
목을 가다듬은 나는 우선 아공간에서 책 한 권과 시계 하나를 꺼냈다.
“아공간 마법……?”
허탈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 앞으로 책을 내밀었다.
“이건 제가 한 달 전에 찾은 책이에요.”
그건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에 놀러 나갔던 날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었다.
책의 제목을 힐끗 본 아버지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었던 사고가 흑마법과 관련되었으니 그 반응도 당연했다.
“흑마법에 관한 책인가 보구나.”
“네, 맞아요. 그런데 제가 보여 드리고 싶은 건 이쪽이에요.”
나는 하도 많이 봐서 손때가 탄 페이지를 펼쳤다.
“……흑마법사를 구분하는 아티팩트라니.”
에일런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하긴. 나도 처음에 엄청 놀랐지.’
심봤다는 생각도 했고.
아티팩트의 효능을 본 두 사람의 시선이 책 옆에 놓아둔 시계로 가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럼 이 시계가…….”
아버지가 시계를, 정확히는 시계 중간에 박혀 있는 보석을 한 번 보고는 내게 시선을 옮겼다.
“맞아요. 여기 나온 방법대로 만든 아티팩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