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7)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87화(87/218)
아버지가 통신을 종료한 뒤 마주한 내 얼굴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갑작스레 잡힌 일정이 기가 막힌 탓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 표정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일 있느냐? 표정이 좋지 않은…….”
“아버지, 눈치 없는 소리는 그쯤 하시죠.”
아주 속 터지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아버지의 말을 끊은 건 에일런이었다.
에일런은 애써 짜증을 눌러 참는 표정으로 아버지 손에 들린 통신구를 한 번, 그리고 퉁퉁 부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린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래도 아버지가 뭘 잘못하셨는지 모르시겠습니까?’
흘깃 본 에일런의 눈빛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게냐.’
‘에리타한테 설명도 안 하고 다짜고짜 황자 전하를 부르셨잖아요. 저는 이 일에 책임이 없으니 알아서 해결하십시오.’
‘아니, 잠깐, 에일런.’
딱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이 아버지와 에일런 사이를 오갔다.
아버지는 그제야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에리타, 미안해. 나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다급한 눈길을 아주 가볍게 무시한 에일런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분명히 아버지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다.
“……아녜요. 오라버니도 몰랐는데 오라버니가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나는 에일런을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황자 전하를 뵙게 된 게 어떻게 오라버니 탓이겠어요.”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이다.
“…….”
아버지의 당황한 시선이 내게로 꽂혔지만 나는 시선을 반대쪽으로 고정했다.
저 말은 아버지 들으라고 일부러 한 게 맞았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미안하구나, 에리타.”
“…….”
아버지의 사과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가 계속 시선을 피하자 잠시 멈칫했던 아버지가 테이블을 돌아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가, 화가 많이 난 게야? 이 아비가 미안하구나.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게다. 응?”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쌔끈한 흑표범을 연상시켰던 아버지가 지금은 쩔쩔매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갑자기 황자 전하를 만난다니,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아세요? 정말 너무하셨어요.”
“그래, 맞다. 내가 네 생각을 못 했어.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행동이 앞섰구나. 사과하마.”
내가 불만스레 투덜거리자 아버지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당신의 행동을 스스로 비난했다.
그제야 뾰로통했던 기분이 사르르 풀려 갔다.
내가 이제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에리타, 네가 오늘 황자 전하를 만나기 싫거든 오지 말라고 하마. 어떻게, 지금 바로 연락을 하면 되겠니?”
그렇게 말한 아버지가 당장에라도 황자에게 연락할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뭐? 아니, 그건 너무 갔잖아!
“아, 아뇨!”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쳤다.
아버지와 에일런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두 사람의 시선에 나는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됐어요. 이미 오시라고 했는데 어떻게 다시 오지 말라고 해요.”
“내게는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단다. 네가 원치 않으면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야.”
그런 내 대답에 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오늘 만나기 싫다, 한마디만 하면 당장 칼리온에게 연락해 다음에 오십시오,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그 상대가 제국의 황자라구요, 황자!’
하지만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말해 봤자 그게 뭐 어떻냐는 표정을 할 게 뻔했기에 나는 속으로 답답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만날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아버지랑 오라버니 두 분 다 나가 계세요. 저는 짐작도 못 했던 일정 덕에 다시 준비해야겠으니까. 시간 다 되면 메리한테 말해 주시구요.”
그리고 아버지와 에일런을 방 밖으로 내몰았다.
잠깐을 외치던 아버지는 하릴없이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
“아가씨, 웬일로 이렇게 꾸미신대요?”
“으응?”
가족끼리 저녁을 먹는데 답지 않게 새 옷을 꺼내 입고 머리를 다시 다듬는 내 모습이 영 이상했는지 메리가 물었다.
“평소에는 꾸며 드린다고 해도 됐다고 하시잖아요.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부셨지?”
그렇게 묻는 메리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자를 만나는 자리이니 당연히 집에서 입고 있던 그대로 나갈 수가 없어서 그런 거였지만 메리에게 사정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 오늘은 온실에서 저녁을 먹을 거라서 그래. 오랜만에 기분을 좀 내 보고 싶어서, 하하.”
다행히 내 입에서는 적당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어머, 아가씨도 봄을 타시나 보네요. 그럼 내친김에 장신구까지 하는 건 어떠세요? 제가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으, 으응?”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마릴린한테 많이 배웠거든요!”
메리가 순식간에 보석함 몇 개를 꺼내 왔다.
내가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흐음, 이게 좋은가? 아님 이거?”
“저, 메리.”
“네?”
내 부름에 고개를 든 메리의 얼굴이 굉장히 신나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아냐. 예쁘게 해 달라고.”
나는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고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도리어 그 말에 메리의 의욕이 화르륵 불타 버릴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 결과는 바로 한 시간 후에 드러났다.
“…….”
“…….”
옆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지긋한 시선.
‘하아……. 그냥 방에 가고 싶다.’
시선이 박혀 드는 오른쪽 얼굴이 아주 따끔따끔했다.
그때, 시선의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내 동생,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
“오라버니, 그만요.”
나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에일런의 뒷말을 빠르게 잘랐다.
보나 마나 아까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보다 한 세 배쯤 힘을 준 내 모습에 대한 거겠지.
“흠흠.”
“…….”
그런 내게 아버지도 무어라 하고픈 말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꿋꿋이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며 온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릴린과 더불어 나를 꾸미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메리를 간과한 게 나의 패착이었다.
‘메리이…… 이건 너무 과하잖아……!’
메리를 향한 절규는 내 목 안에서만 울려 퍼졌다.
“테르반, 식사에 앞서 잠시 담소를 나눌 것이니 시중들 필요 없네.”
“하면 식사는 언제쯤 들일까요?”
테르반의 물음에 아버지가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제 막 다섯 시가 조금 넘은 하늘에는 옅은 주홍빛이 감돌고 있었다.
“두 시간 뒤쯤이 좋겠군.”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테르반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단정한 자세로 온실 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테르반!”
“별말씀을요.”
내 인사에 테르반이 온화하게 잔주름이 진 눈가를 휘었다.
‘……역시 테르반은 꽃중년이야.’
도착한 온실 안에는 이미 적당한 차가 세팅된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자꾸나.”
“네에.”
그렇게 잠시 아버지와 에일런과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력?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것도 상당히 익숙한 이의 것이.
마법을 사용한 모양인지 잠시 존재감을 드러냈던 마력은 금세 흔적을 감추었으나 미미하게 남은 잔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페른의 마력인데.’
나는 조화롭게 자라 있는 꽃과 나무들 사이를 바라보며 눈을 슬쩍 좁혔다.
혹시 페른도 이 자리에 오는 건가?
“아버…….”
떠오른 것을 묻기 위해 내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여럿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익숙한 파란 머리 마법사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였다.
“오셨습니까, 황자 전하.”
“기다리게 했군요.”
그중 누구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이는, 당연하게도 나를 바라보며 옅게 웃음 짓는 칼리온이었다.
***
총 여섯 명이 둘러앉은 테이블에서는 상당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로 그럴 것이, 칼리온의 뒤에 서 있던 한 사람도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상한 이름의 보석점 주인이잖아.’
온화한 얼굴의 남자는 분명 황혼의 여명이라는, 지극히 판타지 세계 같은 이름의 보석점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까먹었지만 가게 이름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가게 이름이 워낙 중2병 같아서 아직도 기억나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칼리온과 함께 나타났으니 나로서는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나는 스르륵 고개를 돌려 에일런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에일런은 분명히 케이딘인지 하는 저 남자와 친해 보였단 말이지.
“음…….”
에일런은 그런 내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녀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앰브론 남작가의 케이든이라 합니다.”
그런 나와 에일런을 바라보던 남자가 하하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케이딘이 아니라 케이든이었구나.
“아, 저는 에리타 크로바하츠예요, 앰브론 남작님. 일전에 가게에서 뵈었죠.”
“하하, 이리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내가 적당히 대꾸하자 케이든이 상냥하게 웃었다.
근데 고작 에일런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케이든을 이 자리에 불렀을 리가 없는데.
내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케이든을 티 나지 않게 흘끗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 진짜 제 직업을 소개하는 걸 잊었군요.”
“네?”
케이든이 눈꼬리를 슥 휘었다.
‘진짜 직업……?’
그는 특이한 이름의 보석점을 운영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수도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곳을.
“약소하지만 앰버 길드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뒤이어 나온 말에 어째서 그가 이 자리에 함께하는지에 대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