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9화(9/218)
“아버지, 에일런입니다.”
낮은 듯 듣기 좋은 미성에 내 작은 심장이 쿵쿵 뛰어 대기 시작했다.
에일런 크로바하츠.
대공가의 후계자이자 에리타의 하나뿐인 오라버니.
지금만큼은 새로운 가족을 만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들이 모두 사라졌다.
“들어오너라.”
아버지의 허락에 커다란 문이 열렸다. 맞잡은 두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
문을 열고 들어선 에일런을 본 순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모습.
에일런은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다.
‘나보다 다섯 살 더 많다고 들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에일런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귓가를 울리는 내 심장 소리가 더욱 커졌다.
어느새 내 앞에서 멈춰서 나를 바라보는 에일런의 눈동자가 잘게 일렁였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에일런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에 절로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그때였다.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벌벌 떨렸다.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이 화날 때마다 마력이 날뛴다고 나오더니. 이게 딱 그거구나.
실제로 체감해 본 마력은 묵직했다.
“읏……!”
다리 힘이 풀린 내 몸이 휘청였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나를 받친 건 아버지의 팔이었다.
단단한 팔이 나를 감싸자 무겁던 몸이 다시 가벼워졌다.
“에일런,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할 거라면 나중에 다시 오거라.”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말에 잔뜩 놀란 얼굴이던 에일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안해.”
내게로 시선을 돌린 에일런이 자책이 잔뜩 어린 얼굴로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에일런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다무는 모습에 쉬이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조금 불안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드디어 열린 입술 사이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리타, 잠시만 그쪽으로 가도 될까?”
내 이름을 부른 목소리는 아까보다 가라앉은 채였다. 먹먹한 듯 잠긴 목소리.
아까 내가 휘청인 것 때문에 묻는 거겠지.
다친 것도 아니고 아주 무서웠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느릿하게 이쪽으로 걸어온 에일런이 내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췄다.
아버지와 닮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얼굴.
“……한번 안아 봐도 될까?”
조금 떨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그 말에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레 끌어안긴 품은 생각보다 커다랬고, 아주 따뜻했다.
가만히 나를 품에 가두고 있던 에일런이 조심스레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내 동생. 이제 다시는 혼자 두지 않을게.”
작게 읊조리는 말은 마치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 같았다.
***
에일런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어색한 분위기에 괜히 방 이곳저곳으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런 분위기는 싫은데.
둘이서 뭐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버지와 에일런은 아무 말 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것도 묘하게 신경이 쓰여 그만두었다.
“에리타.”
“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들려온 아버지의 부름에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 내 반응에 에일런이 작게 웃었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나와 에일런은 이제 그만 나갈 테니 방을 좀 구경하겠니?”
“……구경요?”
“그래. 옷도 편하게 갈아입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지금 이 옷도 충분히 편하긴 한데……. 하지만 그편이 지금 이 어색한 상황보다는 백배 나을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래. 메리에게 일러둘 테니 편히 둘러보다 집무실로 오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타, 이따 보자.”
나를 향해 작게 웃어 준 에일런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나는 앉아 있던 침대 위로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크로바하츠 대공가.
자연스레 아까 보았던 에일런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가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부드럽게 웃어 줬던 내 오라버니.
‘에일런도 에리타를 많이 그리워한 것 같았지…….’
처음 나를 보았을 때 드러났던, 미처 감추지 못했던 슬픔 그리고 확연한 안도와 기쁨.
나는 내가 에리타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이 잘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들을 속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에일런이 사랑하는 에리타는 내가 아니니까.
그들이 사랑했던 에리타의 몸이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일까, 아니면 몸만 남고 그 속은 에리타가 아닌 나여서 불행할까.
내 속에서 이기적인 욕심이 차올랐다.
기왕이면 그 속에 든 게 나라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만약 들키더라도 그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나는, 그저 메리가 들어올 때까지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
달칵
아슬란을 따라 집무실에 들어선 에일런의 뒤로 육중한 문이 닫혔다.
“에일런.”
“예, 아버지.”
소파에 앉은 아슬란은 복잡한 심경으로 반듯하게 앉은 에일런을 바라보았다.
어렸던 에일런에게 어머니와 동생을 한 번에 떠나보낸 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7년 전 있었던 사고 이후로 웃음을 잃어버린 제 아들.
하지만 아까 전 에리타를 보았을 때 떠올랐던 것은 분명 미소였다.
아슬란은 그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7년간 내가 계속 에리타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에일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부터는 일찍이 후계 수업을 끝마친 에일런이 가끔 아슬란의 일부 업무를 대신 하기도 했던 탓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 에리타를 되찾은 건 알리지 않을 생각이야.”
“……사고가 아니었던 겁니까.”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건만 벌써 일의 전말을 눈치챈 에일런에 아슬란이 헛웃음을 지었다.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거기까지 떠올렸구나.”
“이제 그 정도도 모를 만큼 어리지 않으니까요.”
담담한 목소리로 뱉은 말에 제 아들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아슬란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7년 전 있었던 일은 사고가 아니야.”
아슬란의 긍정에 에일런의 기세가 눈에 띄게 사나워졌다.
어렸던 당시에도 제 어머니와 동생을 끔찍하게 아꼈던 녀석이었으니 이런 반응인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흥분한 것도 잠시, 에일런은 금세 기색을 갈무리했다.
“배후 역시 짐작하고 계시는군요.”
“그래.”
“비밀로 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겠구요.”
생각한 바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짚어 내는 에일런에 약간의 뿌듯함이 섞인 웃음을 지은 아슬란이 말을 이었다.
“물증은 없지만 황실과 연관이 되어 있다. ……아마 황후 쪽이겠지.”
아슬란은 이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무, 문신입니다!’
‘문신?’
‘예! 얼핏 보긴 했지만 아이를 건네준 자의 팔에 해골 문신이 있었습니다!’
벌벌 떨던 원장이 뱉어 낸 내용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토대로 추적한 것들을 모아 놓고 보니,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은 황실이었다.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아슬란은 서류를 보고 터져 나오는 실소를 막을 수 없었다.
황후와 그 가문인 레노센 공작가.
그들이라면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자들이었다.
제가 모를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확실히 아실라 황비는 아니실 테니 1황자 쪽이겠군요.”
아실라 발레리아.
제국의 황비이자 제2황자인 칼리온 루인 엘베르의 모친인 그녀는 세르비아의 오랜 친구였다.
게다가 황비의 가문인 발레리아 후작가 역시 세르비아의 가문과 친밀한 관계였으니 더더욱 그럴 리가 없었다.
“나 역시 그쪽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
에일런은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야 제 어머니와 동생을 건드린 범인을 찾았는데
증거가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그럼 증거가 생길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야 합니까?”
말을 마치고 아슬란을 바라본 에일런은 순간 등골이 선뜩해짐을 느꼈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
“그럼…….”
“에일런.”
“예, 아버지.”
“능숙한 사냥꾼은 사냥을 시작하기에 앞서 덫을 놓는단다.”
짙은 적안이 번뜩였다.
“증거가 없다면 덫을 놓으면 될 것이 아니냐.”
“……!”
“미끼를 물었을 때는 우리에게 명분이 생긴 뒤일 것이다. 황후라 하여도 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명분이 말이다.”
낮게 읊조리는 아슬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
똑똑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들려온 노크 소리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저 메리예요.”
“으, 으응!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고 아침 이후로 보지 못했던 메리가 보였다.
“아가씨! 여기서 뵈니까 더 좋네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메리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 해맑은 웃음에는 꼭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응! 나도 메리 다시 보니까 좋다.”
결국 나도 머릿속을 차지하던 고민을 살짝 옆으로 치워 둔 채 메리를 따라 그냥 웃어 버렸다.
“음, 그건 그렇고 방은 좀 둘러보셨어요?”
“으응, 뭐…….”
나는 괜히 말을 흐렸다. 천장 구경을 실컷 하긴 했지.
“사실 한 3년 전부터인가, 여기 정리한 게 저거든요!”
“정말?”
“네!”
그건 몰랐네.
세르비아의 시녀이자 에리타의 유모였던 이의 딸이어서 그런지, 메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저택에서 입지가 좋은 듯 보였다.
“주인님이 거의 매일같이 오셔서 둘러보시는 바람에 먼지 한 톨도 없게 청소하느라 진땀 뺐다니까요.”
제 청소 스킬은 다 거기서 나온 거랍니다.
장난스러운 메리의 푸념에 잠시 멈칫한 나는 금세 그랬구나……. 하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속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사용한 흔적이 없어 깨끗한 방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포근하게 꾸며진 방 내부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아이용 침대. 나는 천천히 발을 옮겨 창가로 다가섰다. 아마 두 살 난 아이가 쓰기에 적당했을 요람.
딸이 쓰던 가구를 차마 버리지 못해 그대로 둔 채 해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큰 가구를 들여놓았을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버지가 많이 그리워하셨나 봐.”
조금 닳아 있는 매끈한 나무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리자 내 뒤를 따라온 메리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가씨…… 죄송해요. 이러려고 드린 말씀이 아닌데…….”
“으응, 아냐.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는데 아버지는 날 매일같이 생각하셨다는 게 감사해서 그래.”
나는 시무룩해진 메리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어 보이며 부러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나 옷을 좀 갈아입으려고! 아버지가 집무실로 오라고 하셨거든.”
“아가씨…….”
“메리, 나 아버지한테 얼른 가고 싶어. 그러니까 메리가 예쁜 옷 고르는 거 도와주면 안 될까?”
내 기분이 울적해진 이유는 메리 탓이 아니었기에 나는 메리가 울상을 짓는 것이 싫었다.
“응? 메리이.”
일부러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메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괜히 말꼬리를 늘이며 메리를 채근했다.
“……네. 그럴게요. 그럼 같이 골라 볼까요?”
“응!”
“좋아요. 그럼 드레스 룸으로 가요. 아가씨 옷들을 모아 놓은 곳이거든요!”
다행히도 표정을 푼 메리가 같이 고르자며 나를 드레스 룸으로 안내했다.
그 후로 하루에 두 개씩 입어도 일 년 내내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옷들에 기겁한 나와 그런 나를 보며 단장 욕구를 불태우는 메리의 사이에서 조금 전의 분위기는 조용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