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1)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91화(91/218)
눈을 감고 가만히 기다리기를 몇 초.
따뜻한 손이 칼리온의 이마 위를 덮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 냈다.
잠시 드러난 이마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켠 에리타는 남은 한 손을 마저 칼리온의 손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이마를 맞대기 직전 가까이서 보게 된 눈을 감고 기다리는 칼리온의 얼굴은 고요했다.
쿵- 쿵-
어쩐지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애써 잡념을 덜어 낸 에리타는 깨끗하게 드러난 칼리온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저의 둥근 이마를 맞대었다.
“……그럼 이제 시작할게요. 편한 마음으로 계시면 돼요.”
칼리온이 알겠다는 뜻으로 맞잡은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그의 작은 대답에 살풋 웃은 에리타 역시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화악-
맞잡은 두 손에서부터 미약한 마력이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칼리온의 눈가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이건…….’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마력을 제대로 느낄 순 없지만 어렴풋하게 무언가 제 몸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작은 맞닿은 온기에서부터였다.
손으로부터 시작된 온기가 맞닿은 얼굴을 향해 느릿하게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 마력은 주인을 꼭 빼닮아 있었다.
‘마력에도 저마다의 색이 있다더니.’
칼리온은 언젠가 말 많은 제 부관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법사는 저마다 고유의 마력 파장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
그 뒤로 바론 그의 마력이 어떤가에 대해 무어라 얘기했었지만, 그 사실은 칼리온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칼리온은 무심결인 척 손에 조금 힘을 주어 쥐었다.
그러자 가볍게 맞닿아 있던 온기가 더 바짝 다가왔다.
‘……따뜻하네.’
그의 손안에 쏙 들어와 있는, 마법을 다루느라 그저 곱지만은 않은 손처럼 에리타의 마력은 늦봄의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꾸욱-
그때, 맞잡은 손이 작게 꼼지락거렸다.
그가 약하게 힘주어 잡은 것이 불편한 듯 꼬물거리던 손은 이내 칼리온의 손에 깍지를 꼈다.
자연스럽게 몸이 더 가까이 붙었다.
무심결에 편한 자세를 취한 모양이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감은 눈을 살짝 휘며 웃는 칼리온과 달리 에리타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계속해서 칼리온에게 제 마력을 조금씩 밀어 넣고 있었다.
‘……그대가 모르는 듯하니 조금만 더 이리 있겠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느릿하게 에리타에게 편한 자세로 몸을 움직인 칼리온은 가만히 눈을 감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
나는 입술을 감쳐물고 말을 골랐다.
그런 내 앞에는 아까 자리를 비웠던 사람들과 칼리온이 앉아 있었다.
그들도 좋지 않은 내 표정에 결과를 짐작한 듯 흐르는 분위기가 무거웠다.
조금 더 먼저 내게 결과를 전해 들은 칼리온만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자 전하께서 짐작하셨던 게 맞아요.”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연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흑마법은 본래 생명을 대가로 힘을 얻는 사술이에요. 특히나 사람의 정신이나 목숨에 관련된 저주를 다룰 때는 셀 수 없이 많은 피를 요구하죠.”
내 말에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백 년 전 흑마법이 사장된 이유 역시 그것이었다.
다른 이의 생명을 바쳐 힘을 얻는 사악한 술법.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의 한 맺힌 사념을 양분으로 하는 저주.
“……그리고 황자 전하께 걸린 저주는 대상자의 정신을 장악하는 종류의 것이에요.”
내 시선이 앞에 앉은 이들을 차례로 스쳤다.
“대표적인 특징은 끔찍한 두통과 악몽으로, 서서히 대상자를 미치게 만들죠. 온종일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을 느끼는데 잠을 자면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토대로 한 악몽을 꿔요.”
“……비열한 놈들이.”
아버지가 낮게 짓씹듯이 읊조렸다.
세르비아가 저주로 인해 눈을 감았으니 그런 아버지의 반응은 당연했다.
거기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칼리온을 제법 아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이 저주는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 상대를 미치게 만들기 위해 사용돼요.”
그렇게 서서히 미쳐 간 이는 결국 제 자아를 잃어버리고 만다.
정말 악질적인 저주였다.
내 말이 끝난 후 칼리온의 눈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그 역시 내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것이다.
“……황후는 내가 미쳐 버리길 바랐던 거군요.”
묵직하게 던져진 칼리온의 한마디에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후는 칼리온이 미쳐 버리는 것을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놓아 버린 칼리온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바랐겠지.
나는 찻잔의 손잡이를 한 번 매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이상한 점?”
칼리온이 되물었다.
“본래 그 저주의 대상자가 되면 짧으면 두 달, 길어도 일 년이 지나기 전에 정신을 모조리 놓아 버린다고 알려져 있어요.”
“두 달에서 일 년이라…….”
“그런데 전하에서는 삼 년이나 버티셨잖아요.”
그건 보통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내 말을 들은 칼리온도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골몰하는 낯을 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내 짐작을 말해 주었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전하께는 흑마법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요. 내성이라고 해야 할까…….”
“타고난 체질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페른이 한마디 덧붙였다.
“뭐, 일단은 그렇게 보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의 말에 반쯤 긍정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이건 엄청난 희소식이에요.”
체질인지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긴 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 소식이기도 했고.
“만약 내 체질이 이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미쳐 버려서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겠군요.”
다행스럽게도 칼리온은 그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 픽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육체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격이라 다행입니다.”
칼리온이 덧붙인 말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볍게 환기되었다.
“전하, 그 두통은 주기가 없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딱히 규칙이랄 게 없죠.”
칼리온의 대답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에게 걸린 흑마법을 파훼하는 방법은 존재했다.
몇 년 전에 구했던 타다 남은 책 한 권.
거기에는 이름 모를 어떠한 저주를 파훼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군데군데가 그을리고 찢어지긴 했지만 해석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던 그 책.
“지금 당장 가능한 건 아니지만…… 전하께 걸린 저주, 없앨 방법이 없는 건 아녜요.”
“……!”
“그게 정말이냐?”
내 말에 다섯 남자의 놀란 시선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저마다 정도가 다르긴 했지만 전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에 와서는 흑마법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타다 남은 책 한 권을 구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적힌 술식을 연구해 본 결과 특정한 저주를 파훼하는 술식이었구요.”
내 말을 들은 이들의 눈에 희망이 서렸다.
“그 책에 적혀 있던 술식이 전하께서 당한 그 저주를 푸는 술식이라는 겁니까?”
“네, 아까 제가 말했던 그 저주를 푸는 술식이에요. 아직 보완할 부분이 남아서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지금 바로 칼리온에게 걸려 있는 저주를 없애 버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런…….”
“흠흠. 일단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더 연구해 볼게요.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 하니까요.”
분명히 또 민망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나는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내 성격이 그다지 대범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유난히 다른 이들의 감탄이 민망했다.
물론 가족이나 메리, 마릴린 그리고 페른같이 친한 이들이 그러는 건 예외였지만.
“하면 제가 아가씨의 연구를 돕겠습니다.”
내 말에 페른이 연구를 돕겠다고 자원했다.
나는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페른이요?”
“이래 봬도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니 적어도 조그만 도움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페른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쳤다.
일단 기본적으로 마법사라는 족속 자체부터가 호기심이 많았다.
페른도 흑마법에 호기심을 느낀 모양이네.
“흐음, 알았어요. 제 조수로 받아들일게요.”
“하하, 하, 조수…….”
최상급 마법사를 조수 취급 하는 내 장난스러운 말에 페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허허 웃었다.
“저는 그 분야에서 초짜나 다름없으니 이번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쪼잔하게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하여튼 변하는 게 없다니까.’
오늘은 웬일로 진지하나 싶더니 분위기가 가벼워지자 제일 먼저 살아났다.
이제 서서히 오늘의 자리가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애초에 즉흥적인 만남이었으니 제대로 이야기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하면 저는 최근 오 년 사이에 실종된 이들의 흔적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전하께서 저주에 걸리신 게 삼 년 전이라고 하셨으니 분명 그즈음에 실종된 사람의 수가 미세하게라도 늘었을 겁니다.”
“부탁하지.”
케이든은 흑마법을 사용한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법을 사용한 황후의 흔적을 캐는 것이었다.
흑마법을 사용하려면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납치했겠지. 아니면 속여서 꼬여 내거나.’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저주다.
그러려면 수십 수백이 아니라 적어도 천 명 이상의 영혼이 필요했다.
“실종된 사람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을 집중적으로 알아봐 주세요. 다섯 살 아래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을 가능성이 커요.”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케이든에게 말을 건넸다.
순수한 아이들의 영혼을 바치면 더 적은 양의 피로도 강한 저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예상하건대 황후는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데에 있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다섯 살 아래의 아이들. 알겠습니다.”
케이든이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이들의 목숨마저 죄책감 없이 뺏는 저들의 작태가 역겨운 것일 테지.
깔깔해진 목에 나는 다 식어 차가워진 차를 한 모금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