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2)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92화(92/218)
그 후 이후의 일에 대해 간단히 의논한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십여 분이 더 지난 뒤였다.
“하면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게 좋겠군요.”
“예, 시간도 늦었으니.”
아버지의 말에 다들 수긍했다.
이 작은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는 주홍빛이 감돌고 있던 하늘에서는 어느새 해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며 아버지와 페른이 케이든에게서 무언가를 전해 듣는 사이, 에일런과 칼리온이 마주 섰다.
나는 테이블에 살짝 기대어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배웅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하.”
“뭘 새삼스레.”
양해를 구하는 말과 달리 무심한 에일런의 얼굴에 칼리온이 픽 웃었다.
“다음에 찾아올 때는 대련이나 한번 해.”
“이번에는 봐드리지 않을 겁니다만.”
“지금까지는 봐준 것처럼 얘기하는군.”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심드렁한 얼굴의 에일런과 옅은 미소를 머금은 칼리온은 서로가 어색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퍽 친근했다.
‘칼리온이 반말하는 걸 보니 진짜 친한가 보네.’
에일런의 말도 겉은 존대였지만 어조는 편안했다.
에일런이 디저트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칼리온에게 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보다 친한 모양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팔 년 동안 두 사람이 쌓은 친밀감이 꽤 단단한 모양이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시선을 느낀 내 오라버니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거기에다 대고 오라버니가 황자 전하와 친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아닌 것 같아서요, 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적당히 말을 축약했다.
“아뇨, 그냥 친해 보이셔서.”
그리 답하며 싱긋 웃자 에일런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때 무언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만들다가 잠시 내버려 둔 게 있었지.’
황도에 오기 전 북부에서 만들던 아티팩트에 생각이 미친 나는 칼리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쩐지 묘하게 아까 코앞에서 보았던 깨끗한 이마로 눈길이 가는 것 같았지만 착각일 것이다.
나는 다시 아티팩트로 생각의 초점을 옮겼다.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다가 만들어 낸 아티팩트. 그건 저주의 효과를 약화시키는 종류의 것이었다.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손보고 마무리하면…….’
당장 흑마법에 대한 해결책은 되지 못해도 그의 고통은 덜어 줄 수 있으리라.
계산을 마친 나는 성큼성큼 칼리온에게 다가갔다.
“전하.”
“예, 대공녀.”
아까 얼굴을 맞대며 당황한 얼굴을 하던 칼리온은 어디로 갔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단정했다.
하긴, 리안이었을 때의 칼리온은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으니.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전하, 혹시 전하께 따로 연락을 드릴 방법이 있을까요?”
내 말에 칼리온이 눈을 깜빡였다.
아, 다시 당황한 얼굴이다.
“……제게 말입니까?”
그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누가 보면 내가 괴상한 말이라도 한 줄 알 정도로 얼떨떨한 물음이었다.
조금 전 능글맞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꽤 귀여운 구석도…….
‘……아니, 뭐라는 거야.’
나는 무심코 든 생각을 재빨리 구석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전해 드릴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런 거라면 제가 궁에 돌아가서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평범한 내 대답에 칼리온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던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그리고 저희 아직 못 끝낸 얘기도 있으니까요. 그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하기 좀 그렇잖아요.”
“……!”
그런 칼리온에 장난스레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이자 예쁜 벽안이 둥그렇게 뜨이고.
“예, 그렇죠.”
그가 이내 눈매를 나붓이 휘며 대답했다.
“……이제 그만 가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그때, 나와 칼리온의 옆에서 못마땅함이 묻은 에일런의 재촉이 튀어나왔다.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인지라.”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린 채로 칼리온을 바라보고 있던 에일런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고는 다시 칼리온을 지긋이 응시하며 눈짓했다.
‘그만 가시지요.’
딱 이런 뜻을 담은 눈빛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사이좋아 보이던 두 사람은 어디로 간 건지.
‘……하여튼 오라버니도 참.’
내가 장담하건대 에일런은 칼리온이 내게 연락하는 것이 싫은 게 틀림없었다.
“하면 조금 이따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너무 놀라지는 마시길.”
에일런의 재촉에 헛웃음을 뱉은 칼리온은 잠시 내 옆에 멈추어 작게 속삭이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시작된 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산스러웠다.
“에리타, 황자 전하께 전해 줄 물건이 있다면 내가 대신 전해 줘도 되는데.”
“아가, 귀찮게 네가 직접 줄 필요 없다. 이 아비가 전해 주마.”
에일런에게 전해 들은 건지 아니면 뛰어난 청력으로 들은 건지, 아버지까지 합세해 나와 칼리온이 연락하는 것을 방해하려 했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직접 전달드릴 거예요.”
“으음…….”
그렇게 말하자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아도 아버지와 에일런이 실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끝까지 모른 체했지만.
***
예상치 못했던 오늘의 일정을 모두 끝낸 나는 털레털레 방으로 돌아왔다.
“아, 피곤해…….”
“아가씨, 많이 피곤하세요? 좀 주물러 드릴까요?”
소파에 늘어지듯 앉은 내 모습에 메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역시 메리는 너무 착해…….
나는 그런 메리를 감동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딱히 몸이 피곤한 건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새로운 정보를 너무 많이 받아들인 탓인지 정신적 피로가 심할 뿐이었다.
“아냐, 괜찮아. 대신 따뜻한 물 좀 준비해 줄래? 몸 좀 담그고 싶어서.”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메리가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메리가 목욕물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오 분쯤 피곤한 머리를 쉬게 놔두었을까.
메리가 문 너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아가씨, 준비 다 끝났는데, 지금 가시겠어요?”
“응, 지금 가야지.”
읏차-
나는 마음만은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피곤할 때는 역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둥실둥실 퍼져 있는 게 최고지.’
향긋한 오일과 피로를 풀어 주는 꽃잎이 뿌려진 욕조에 몸을 담그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으, 좋다.”
“푸흡!”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구수한 소리에 메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메리…….”
“죄송해요! 아가씨 반응이 너무, 음……. 하하.”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메리가 변명을 하려다 결국 멋쩍어하는 얼굴로 웃었다.
끝을 흐린 뒷말은 듣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갔었던 목욕탕은 아직 있으려나.’
갑자기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아주 가끔 이른 새벽에 목욕탕에 갔던 기억.
동네에 있는 목욕탕은 본래 사천 원을 받는 곳이었는데, 나는 이천 원에 이용할 수 있었다.
그게 나를 향한 배려였음을 알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싸게 해 주셨었지.’
무뚝뚝하게 이천 원만 내요, 학생, 이라고 하던 목욕탕 사장님은 눈가가 벌겋게 부은 내 사정을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정말 감사했었는데.’
그 어떤 동정보다도 아주머니의 조용한 배려가 내게는 가장 큰 위로였다.
천 원도 아껴야 했던 내가 목욕탕에 갔던 건 주로 원장에게 심한 말을 들은 다음 날의 새벽이었다.
‘샤워하는 물을 쓰면 얼마나 쓴다고 그거 가지고도 구박을 해 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못돼 먹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원의 원장이 되었는지가 의문일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아가씨.”
“어, 어?”
“혹시 물이 너무 뜨거우세요? 표정이 좋지 않으시길래…….”
잠시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린 내게 메리가 물어 왔다.
머릿속을 차지했던 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둘 모두였지만 아무래도 나쁜 기억의 영향력이 더 컸던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휘휘 저었다.
“으응, 아냐. 갑자기 옛날 생각이 조금 나서……. 물 온도는 지금이 딱 좋아.”
“으음, 그럼 다행이지만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마릴린이 새로운 오일을 들여왔거든요! 한번 보실래요? 향기가 엄청 좋아요!”
“응? 어, 그래…….”
순간 잠시 멈칫했던 메리가 재빠르게 우다다 말을 쏟아 냈다.
그에 당황한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벌떡 일어난 메리가 종종 걸어가 선반에서 예쁜 병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예요! 이번에 집사님이 새로운 상단과 거래를 하셨는데, 거기서 마릴린이 골라 뒀던 거래요.”
“그래?”
“네. 두통을 가라앉혀 주는 그런 종류래요.”
살가운 메리의 말에 내가 한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마릴린 요즘 머리 아프대?”
나는 걱정스워하는 어조로 물으며 아까 보았던 마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소처럼 시니컬하던 얼굴은 겉보기에는 두통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아가씨도 참! 저택 물품을 살 때 구매한 건데 마릴린이 사적인 용도로 샀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내 물음에 메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부정했다.
“사실 마릴린이 요즘따라 아가씨께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으신 것 같다면서 점찍어 뒀던 거예요.”
“어? 나?”
“네, 아가씨요. 요즘에 잠도 잘 못 주무시고 넋을 놓고 계시는 일도 빈번했잖아요.”
눈을 크게 뜬 내 되물음에 메리가 속상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수도에 온 뒤로 이래저래 심란했던 나를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걱정시켰구나. 미안.”
“에이, 아녜요. 대신 제가 마릴린이 오일 샀다고 아가씨께 얘기한 거 비밀로 해 주셔요. 안 그래 보여도 마릴린이 부끄러움을 좀 많이 타거든요.”
“아하하, 알았어. 비밀로 할게!”
***
그렇게 나름 수다스럽고 즐거웠던 시간이 끝나고.
“아가씨, 그럼 주무세요!”
“응, 메리도 잘 자!”
침대에 누울 준비를 도와준 메리가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칼리온이 연락을 준다고 했었는데.’
아직 조금 덜 마른 머리에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은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음, 하긴. 편지 같은 건 이 시간에 보내기가 좀 그렇지.”
통신구로 연락이 오려나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칼리온은 마법사가 아닌지라 내게 연락을 하려면 누군가 마법을 다루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했다.
“따로 연락하자고 했으니 통신구로 연락을 하지도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어쨌든 내일 연락이 오겠구나, 결론을 내린 순간이었다.
톡톡-
창가에서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