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5)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95화(95/218)
칼리온과의 대화, 아니, 정확히는 필담을 끝낸 후 나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 옆에 놓인 줄을 당겼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메리와 마릴린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둘이 같이 왔네?”
“마침 마릴린이 새로 만든 머리 끈을 나눠 주고 있었거든요.”
메리가 그렇게 대답하며 팔을 들어 손목에 차고 있는 머리 끈을 내게 보여 주었다.
마릴린의 손재주가 좋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마릴린, 대체 재능의 끝이 어디야?”
“흠흠, 뭐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었어요. 다음에 아가씨께도 가져다드릴게요. 그보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내 놀란 표정에 마릴린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묘하게 부끄러워하며 말을 돌렸다.
마릴린은 겉으로 보기에는 표정 변화가 딱히 크지 않지만 칭찬만 했다 하면 괜히 말을 돌리는 습관이 있었다.
“아, 나 지금 외출하려고 하는데 준비 좀 도와 달라고 불렀어.”
유르젠과 테인에게 해야 할 얘기를 마친 후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사실 유르젠과는 저번 아일라가 사라졌을 때 이후로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
아무렇지 않은 척 연락을 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탓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 뻔뻔하더라도 방긋방긋 웃으며 들이댈 각오까지 한 참이었다.
“지금 나가시려구요?”
“응, 아마 점심도 먹고 올 것 같은데.”
“평소처럼 꾸밀까요? 아니면 몰래 나가실 때처럼?”
메리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수도에서는 내 검은 머리칼도 그다지 시선을 끌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에일런에게도 내가 라그라스 상단과 관련이 있다는 걸 말했으니까 굳이 몰래 갈 필요는 없지.
“오늘은 평소처럼 해 줘. 대신 힘은 좀 빼고.”
“네엡. 그럼 옷도 튀지 않는 드레스로 골라 올게요!”
“응, 부탁해.”
메리와 마릴린은 금세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수수하지도 않은 드레스를 하나 골라 왔다.
옷을 갈아입은 후 조잘거리는 메리의 말에 몇 번 대답하니 어느새 마릴린이 머리단장을 끝냈다.
손재주가 뛰어난 마릴린은 머리를 매만지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거기다 손도 빠르고.
“오늘도 고마워.”
“별말씀을요.”
거울에 요리조리 모습을 비춰 본 나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셔? 나가기 전에 잠시 뵙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음, 집사님이 아까 그쪽으로 가셨으니까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그래? 그럼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평소였다면 두 사람에게 아버지와 에일런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한 후 집을 나섰을 텐데.
“어쩐지 오늘은 그냥 가기가 좀 그렇단 말이야.”
오늘따라 묘하게 오늘 유르젠을 만나러 갈 거라고 직접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감추고 있던 것들을 털어놓은 지 나흘밖에 안 돼서 그런가?
나갔다 오겠다고 말을 남겨 놓기만 하는 것은 어쩐지 또 비밀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져 그다지 내키지 않는 탓이 컸다.
“앗, 테르반!”
층계를 올라 아버지가 있을 집무실로 향하던 내 눈에 막 집무실 문을 열고 나선 테르반이 보였다.
“아가씨.”
후다닥 걸어가자 테르반이 깊은 눈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주인님을 뵈러 오신 게지요?”
“나갔다 오려고 하는데 그 전에 잠깐 아버지를 보고 싶어서요.”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내 모습에 테르반이 흐뭇하게 웃었다.
테르반은 유독 내가 아버지와 에일런, 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내가 돌아온 뒤로 저택 분위기가 눈에 띄게 유해졌다고 했었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민망하지만 솔직히 나도 약간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아버지와 에일런의 본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으니까.
테르반은 그런 두 사람을 안타까워했었고.
“그럼 들어가 보십시오. 밖은 조심히 다녀오시구요.”
“헤헤, 그럴게요.”
내 대답에 멋쟁이 미소를 지은 테르반이 먼저 자리를 떴다.
똑똑-
“들어오렴.”
내가 노크를 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조심스레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무색하게도 아버지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는 여전히 많았다.
나는 사뿐사뿐 걸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앞에서 테르반과 얘기하는 걸 들었다.”
들고 있던 깃펜을 잉크병에 넣어 둔 아버지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다 들으셨구나. 전에 페른 경이 아버지 집무실은 방음이 엄청 잘된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었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내 표정이 샐쭉해지자 아버지가 옅게 웃으며 대신 내 기분을 풀어 주었다.
“방음이 잘되는 건 맞는단다. 아비가 유난히 귀가 좋아서 그런 게지.”
“아……. 그래서 일부러 방음이 잘되게 하신 거예요?”
“그래.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리니.”
아버지의 대답에 나는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소드 마스터라고 다 좋은 건 아니네요.”
“……그렇지.”
내 중얼거림에 아버지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스친 감정의 이름은 그리움이었으나 내가 알아보기에는 너무 빨리 사라졌다.
‘내 말이 뭔가 이상했나?’
혹시 소드 마스터를 폄하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표정을 언짢음으로 받아들였다.
“저한테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신 거 아시죠?”
“……그래, 고맙구나.”
내가 황급히 물은 말에 아버지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픽 웃었다.
내 원맨쇼에도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다정했다.
“아하하…….”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내가 멋쩍은 웃음을 흘릴 때였다.
“그보다 아침부터 어딜 가려고 이리 준비까지 다 했어.”
의자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 잠시 라그라스 상단에 다녀오려구요.”
“……라그라스 상단에?”
내 쪽으로 다가온 아버지가 되물었다.
사실 아직 아버지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조금 어색했지만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 더 일찍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유르젠…… 음, 상단주가 자리를 비웠었거든요. 어제 돌아왔다길래 가서 얘기 좀 하고 오려구요.”
편지로 대충의 상황을 전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칼리온을 돕겠다고 결정한 건 상단에 있어서도 큰 결정이니까.
“……나중에 한번 아비에게도 소개해 주려무나.”
“앗, 정말요?”
“그래. 그 유르젠이라는 상단주가 너와 꽤 가까운 사이인 듯하니 한 번은 봐야 하지 않겠느냐.”
“으음…….”
“저택에 초대해 같이 식사라도 하면 딱 좋겠구나. 네 오라비도 같이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미소가 어쩐지 아주 약간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었으면 했다.
물론 착각이 아닌 것 같지만.
……아버지는 그냥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의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이면 무조건 다 못마땅한 게 아닐까?
왜인지 그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팍팍 들었으나 나는 애써 그 생각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오늘 가서 한번 물어볼게요.”
미안, 유르젠.
***
일이 바빠 보이던 아버지는 결국 나를 저택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다녀올게요!”
“저녁 먹기 전에는 오려무나.”
“네, 그럴게요. 그럼 이따 봬요!”
아버지의 배웅을 받아 저택을 나선 나는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완연한 봄이 다가왔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마냥 따갑지 않은 햇살과 산뜻한 바람.
길가에서는 연두색의 풀들이 저마다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벌써 꽃이 피기 시작하네.”
성격이 급한 꽃들은 벌써 색색의 꽃잎들을 펼쳐 내고 있었다.
“마차 안 타고 오길 잘했다.”
직접 걸어 보니 생각보다 더 좋은 날씨에 나는 걸어가겠다고 했던 조금 전의 내 선택을 마구 칭찬했다.
나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대공저는 의외로 번화가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를 가볍게 걷자 금방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시야에 나타났다.
‘……아, 긴장돼.’
라그라스 상단이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가 되자 괜스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뻔뻔한 얼굴로 유르젠을 볼 각오를 했다지만 막상 닥치면 또 걱정이 되는 게 사람이었다.
일주일도 넘는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유르젠이 했던 말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 평소에도 내가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것이었으니 더 그렇겠지.
“진짜 어렵다…….”
그가 그렇게 느끼게 만든 건 따지자면 내 잘못이었다.
자존심 강한 유르젠이 제가 못 미더우시냐 물을 정도였으면 내가 티를 많이 냈다는 거니까.
“으으, 몰라.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하자.”
그리고 정 못 하겠다 싶으면 오늘은 테인 뒤에 숨어야지.
그나마 테인이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이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마음을 정리한 나는 거리에 있는 골목 중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딱-
그러고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혹시나 누군가 내가 라그라스 상단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는 선택지를 남겨 두지 않기 위함이었다.